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79)화 (79/456)

79. 그들만의 휴일(3)

다리가 불편한 나 대신 양손에 팝콘과 콜라를 챙겨 든 힘찬과 세빈이가 내 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다른 멤버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떤 영화인지 알게 된 순간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모처럼 밖에 나온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학교, 숙소에서 회사, 혹은 방송국이나 스튜디오.

그 루트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도 멤버들도 밖에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많이 들떠있었다.

“진짜 딱 이번 한 번만 봐준다. 다음부터 나 몰래 공포영화 예매하면 난 그냥 숙소 갈 거야.”

“알았어. 진짜 다 같이 보고 싶어서 그래.”

“아까는 촬영 대비 연습이라며?”

“아니이! 그러니까 겸사겸사!”

손을 내저으며 금방 말을 바꾸는 힘찬이가 얄미워서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한쪽 뺨을 잡고 쭉 늘려줬다.

적당히 말랑한 볼살이 잡아당기는 대로 쭉쭉 늘어나서 그동안 잘 먹인 보람이 있었다.

“아하, 지하나.”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아프다고 울상 짓는 찬이 말을 못 들은 척 반대쪽도 쭉 잡아당겨 주자 양손을 모으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쟈모해숴!”

“또 안 그럴 거지?”

“으어어…. 녱.”

애기 옹알이 같은 소리에 영빈이 형이나 경환이 형은 고개 숙인 채 소리 죽여 웃느라 바빴고, 하준 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힘찬이를 놔주고 세빈이를 돌아보자 내 시선에 움찔한 세빈이가 양쪽 팔을 살짝 들면서 자진 납세를 했다.

“앞으로 안 그럴게요….”

“…진짜 멤버들이랑 같이 보는 첫 영화가 공포영화라니.”

작게 혀를 찬 내가 힘찬이 위에 털썩 앉았다.

체중을 마음껏 실어서 앉은 탓에 헉하고 찬이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하면서 세빈이를 불렀다.

“이리 와, 막둥이.”

“네에….”

눈치 보느라 슬금슬금 옆에 온 세빈이를 품에 안아주자 금세 배시시 웃는다.

얘는 화도 못 내게 왜 이렇게 귀엽게 생긴 걸까?

찬이처럼 행동이 귀여우면 타박이라도 하지.

무겁다고 끙끙거리는 찬이를 무시하며 별 것 아닌 이야기들로 웃고 떠들다보니, 준이 형이 전광판에 노출된 시간을 확인하고 들어가자며 우리를 불렀다.

“아, 곧 상영 시작하겠다.”

“하아…. 나 들어가면 잘 거니까 아무도 깨우지 마요.”

“나갈 때 꼭 챙겨서 나가마.”

내 푸념에 영빈 형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아마 저 마스크 안의 입술은 슬며시 웃고 있을 게 뻔했다.

큰형들이 양쪽에서 나를 부축해 줬고 경환 형은 힘찬이랑 세빈이가 든 팝콘과 콜라를 나눠 들었다.

다행히 자리는 영화관의 제일 뒷좌석이었다.

내 양옆으로 큰형들이 앉았고 하준 형 옆에는 경환이 형과 힘찬이, 영빈 형 옆에는 세빈이가 앉았다.

팝콘과 콜라를 적당히 나눠 놓고 나니 괜히 긴장되어 입안이 말라왔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이런 벌을 받는 걸까 하는 번뇌를 담아 스크린을 바라보자 하준 형이 작게 속삭였다.

“억지로 있지 말고 아니다 싶으면 그냥 나가자. 알았지? 볼 애들은 보게 두고 우린 나가서 쉬고 있으면 되니까.”

“알았어요. 진짜 아니다 싶으면 나갈게요.”

그제야 조금 안심됐는지 하준 형은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고 그사이 다른 멤버들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영화가 시작되었다.

* * *

걱정과 달리, 중간에 뛰쳐나갈 것 같았던 나는 의외로 끝까지 좌석을 지킬 수 있었다.

처음 놀래키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손잡이를 꽉 잡았더니, 그 후로는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면 하준 형과 영빈 형의 손이 내 귀와 눈을 가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시야를 가리는 손에 더 놀랐지만, 그 손의 주인이 누군지 알게 되자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얌전히 있을 수 있었다.

정작 자기들도 놀라서 움찔거리는 게 가려준 손으로 다 느껴지는 데 내 눈과 귀를 가려준다고 자기들은 고스란히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노출되는 게 미안해서, 소리는 괜찮다고 형들에게 속삭였다.

이렇게 공포영화를 본 적은 또 처음이라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 와중에 오랜만에 먹는 팝콘은 왜 이렇게 맛있는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입장했던 그대로 두 형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상영관을 나갔다. 그 뒤로 경환이 형, 찬이, 세빈이가 우리가 있었던 자리를 주섬주섬 정리하며 쓰레기를 챙겨서 나왔다.

“커피 한잔하고 갈래, 아니면 숙소로 돌아갈래?”

아까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아, 작은 좌석에서 고생한 내 팔, 다리를 쭉 펴서 기지개 켜는데 하준 형이 어깨를 주무르며 물었다.

“글쎄…. 숙소 가서 슬슬 저녁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

대답은 영빈 형에게서 들려왔다.

의견을 묻는 하준 형의 시선에 다른 멤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면 더운데 마스크 못 벗으니까 그냥 숙소로 가요.”

그렇게 우리는 짧은 외출을 끝내기로 했고, 더 걷는 건 내 다리에 무리가 될 것 같다며 택시를 잡아, 올 때보다 비교적 시원하고 편안하게 숙소로 도착할 수 있었다.

“아고고…. 집 나가면 고생이라더니.”

내가 앓는 소리를 내며 거실 바닥에 철퍼덕 누워버리자 세빈이가 방에서 쿠션을 들고나와 다리 밑에 받쳐주었다.

“고마워. 그놈의 데미갓 때문에 별 고생을 다 하네.”

뻐근했던 다리를 조금 높게 올려두니 왠지 저리는 느낌이 덜해지는 것 같아 세빈이에게 웃어주었다.

“지환이는 좀 쉬고, 나랑 영빈이가 저녁 준비할 테니까 경환이는 화장실 청소, 세빈이랑 힘찬이는 각 방 정리하자.”

“어, 밥은 제가 할게요.”

다들 움직이는데 혼자만 누워있긴 뻘쭘할 것 같아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경환 형이 이마를 꾹 눌러 그 자리에 그대로 다시 눕혀졌다.

“환자는 얌전히 쉬고 있어.”

“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어차피 어머님이 조리해서 보내주신 거라 데우기만 하면 되니까 금방 끝나.”

멤버들 다 움직이는 데 나 혼자 편하게 누워있을 기회가 언제 또 오겠나 싶어, 편안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다리 다친 건 번거롭고 짜증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어쩐지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달까?

좁은 주방에 다 큰 남자 둘이 서 있으려니 비좁았는지 영빈 형은 거실 바닥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하준 형은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들을 정리하며 갈비찜을 냄비에 올려두었다.

숙소 생활을 오래 했던 두 사람이라 그런지 집안일을 하는 손길이 생각보다 야무졌다.

고개를 돌려더니 창문을 다 열고 방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기는 힘찬이 모습과 언제 걸레를 챙겨갔는지 바닥을 닦고 있는 세빈이가 보였다.

화장실에서는 경환 형이 열심히 청소하는지 물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누워서 지켜보는 이 광경에 정말 가족이 된 것 같아서, 어쩐지 기분이 몽글몽글한 것도 같고 조금 이상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 명, 한 명 멤버들을 구경하다 시선을 돌리니, 꼼꼼하게 바닥을 닦는 세빈이를 구경하다 말고 포잉이 느긋하게 꼬리를 살랑이며 내 배 위로 올라왔다.

‘계약자야, 외출은 즐거웠음?’

‘음, 그럭저럭?’

‘다리 그래가지고 돌아다니기 힘들었을 텐데.’

포잉이 다친 다리를 치료해 줄 수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혼자 있다가 다친 것도 아니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다친 터라 갑자기 멀쩡해진 다리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터.

게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 편이었다.

더 번거로워지느니 얌전히 자연의 순리에 맡기겠다고 했더니 포잉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우리 둘이 외출하자, 포잉.’

‘다음에?’

‘응. 조금 여유가 생기면 우리 누나가 있는 집에도 가보고 산책도 하고.’

늘 숙소와 회사를 오가는 나 덕분에 포잉도 비슷한 신세였다.

한창 바쁘게 돌아다니고 안 보이던 시기에는 요정들이 사는 곳을 오가며 인간 세상에 대한 공부와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공부, 도와줄 수 있는 능력과 도구에 대한 공부를 했다고 했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상황에 대한 숙지가 끝나서 이제는 어지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 곁에 있었지만.

‘포잉은 안 답답해?’

‘뭐가?’

‘늘 숙소랑 회사만 오가잖아.’

‘어차피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새로운 공간에 가는 게 더 스트레스임.’

이상한 데서 보통의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 포잉이 귀여워 웃었다.

다른 멤버들에겐 혼자 있다가 갑자기 웃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다들 바쁘니까 뭐.

포잉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는 사이. 청소가 끝났는지 힘찬이와 세빈이, 경환이 형이 거실을 한 자리씩 차지했고, 갈비찜이 다 데워졌는지 맛있는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다.

“이제 먹으면 되겠… 어라?”

“응? 왜요?”

밥통을 열어본 하준 형이 얼빠진 소리를 냈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하준 형에게 꽂혔다. 주걱을 든 손이 잠시 허공을 배회하는 것 같더니 하준 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우리를 바라봤다.

“밥 새로 해야겠는데?”

“네?”

슬프게도 밥통에는 6명이 먹기에 턱없이 모자란 양의 밥이 남아있었다.

“아, 우리 어제 아침에 밥 먹고 갔었지….”

뒤늦게 전날의 아침이 떠올랐지만 이미 늦어버렸고, 남아있던 밥을 덜고 새로 밥을 올려둔 하준은 머쓱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위장의 안녕을 물었다.

“조금 더 있다가 먹어도 괜찮… 지?”

“넴. 괜찮아요.”

씩씩한 힘찬이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하준 형이 영빈 형 옆에 앉았다.

“…그러면 밥 먹기 전에 잠깐 얘기나 좀 하자.”

담담하게 잠깐 얘기하자는 영빈 형.

그 모습이 왠지 그냥 말을 꺼낸 것 같지 않아 내가 몸을 일으켜 앉자, 다들 조금씩 움직여 둥글게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한번 이야기를 해야지 했던 거긴 한데.”

잠시 하준 형을 바라보던 영빈 형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더 잘 지내기 위해서는 선을 잘 지켜야 할 것 같아.”

“선이요?”

“응.”

세빈이가 의아한 목소리로 영빈에게 되묻자 옆에 있던 하준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들끼리 이미 이야기를 한번 나누었던 주제였나 보다.

“여태까지는… 우리가 데뷔 하나만 보고 정신없이 왔잖아?”

“네.”

“다행히 너희가 다 말하면 알아듣는 애들이었고, 착하기도 했고.”

보통 이런 분위기에서 하는 말들은 앞에 말이 긍정적이면 뒤에 말이 부정적이던데….

“그런데 데뷔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 얘들아. 앞으로 몇 배는 더 힘들 거고 그만큼 더 조심해야 해.”

영빈 형이 여기까지 말을 하더니 하준 형의 어깨를 툭 쳤다.

남은 말을 하준 형보고 하라는 것 같았다.

“저번에 라디오 때 기억나지?”

라디오라는 말에 경환 형과 힘찬의 어깨가 움찔했고 세빈이는 상처가 생겼던 내 이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소현 팀장님이 말씀하셨어. 우리에게 자유를 줄 테니 각자 역할을 확실히 하자고.”

그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지는지 한번 크게 숨을 들이켠 하준 형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다른 아이돌에 비해서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 건 맞아. 너희도 알지? 대신에 그만큼 우리가 앞으로 더 처신을 잘해야 해.”

당연하다면 너무 당연한 말이어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처신이 꼭 외부에서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우리는 서로에게도 잘해야 한다는 말이야.”

“….”

그제야 나는 하준 형과 영빈 형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서로가 싫어하는 것들, 불편해할 만한 것들은 하지 말자. 앞으로 조금씩 조율해나가야겠지만 일단은 이거 한 가지는 먼저 챙기고 가자.”

찬이와 세빈이의 어깨가 움츠러드는 게 눈에 걸렸다.

“우리가 그동안 부대끼고 살면서 알게 된 것들도 많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앞으로 알아가야 할 거야. 그러니까 꼭 자기 의사 표현을 상대방한테 하고 상대방은 그걸 존중하자. 장난치지 말라는 게 아냐. 서로한테 상처가 될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자는 거야.”

말을 먼저 꺼냈던 영빈 형이 눈치 보고 있는 힘찬이 손을 가볍게 잡았고 경환 형이 세빈이 어깨에 팔을 둘렀다.

혹시라도 동생들이 오해할까 봐, 지레 겁먹을까 봐 영빈 형과 하준 형은 둘이서 오래 고민하고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았다.

평소보다 훨씬 더 천천히 그리고 더 부드럽게 말하려 노력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아, 밥 먹기 전에 이런 딱딱한 얘기 하는 거 아닌데.”

“에이, 딱딱한 얘기 아니예요. 우리 공동생활하는 중이니까, 그러니까 서로 취향 존중해 주자! 매너 있게 살자! 이 얘기해 준 거잖아요.”

밥 먹고 조금 풀어진 분위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았던 하준 형이 부러 툴툴거리자 먼저 총대를 멨던 영빈 형이 부스스하게 웃었다.

분위기가 더 가라앉지 않게 내가 조금 빠르게 말을 덧붙이자 세빈이 어깨를 두들겨주던 경환 형의 눈매도 부드럽게 휘었다.

“앞으로 꼭 선 잘 지킬게요! 혹시 제가 선 넘는 거 같으면 말해주세요!”

“저도요!”

힘찬이도 진지한 눈으로 한 손을 들고 외쳤고, 세빈이도 한 손을 같이 들고 외쳤다.

“어이구, 여기가 학교냐? 손은 왜 들어.”

아무래도 전에 영빈이 형이 말했던 게 맞는 것 같았다.

이런 멤버들로 모일 수 있었던 우리 모두가 운이 좋았던 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밥이 다 됐다는 알림이 울렸고, 우리 모두의 기대처럼 힘찬이 어머님이 해주신 돼지갈비찜과 동치미는 끝내주게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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