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만만하니(5)
천호역과 강동역 사이 대로변 뒤쪽 주택가에 나, 아니 지환이와 누나가 살던 집이 있었다.
정작 나는 처음 가보건만 왜인지 익숙한 소방서를 지나쳐 놀이터로 보이는 곳도 지났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 집이라 인식되는 건 생각보다 더 아득한 기분이었다.
조금 쩔뚝거리긴 했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택시에서 내려서 집 앞까지 걸어가면서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 나 열쇠 잃어버린 것 같아.]
누님 [그럴 줄 알았어. 도어락으로 바꿔놨으니까 누르고 들어와.]
[비번 뭔데?]
누님 [엄마 아빠 생일]
기분이 참 이상했다.
우리 엄마 아빠 생일과 지환이의 어머니, 아버지 생일이 같다는 게.
누나를 내 누나로 이해하고 인정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종종 이렇게 낯선 듯 낯설지 않은 것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조금씩 멈칫하게 되었다.
“나왔어.”
“밥 먹었어?”
“응. 애들이랑 먹고 왔어.”
“…너 다리는 또 왜 그래.”
와, 순간 야차인 줄.
순식간에 험악해지는 누나의 표정에 움찔한 나는 최대한 순화해서 재빨리 말했고, 그들에게 크고 아름다운 엿을 먹일 거라는 말도 빼놓지 않고 덧붙여주었다.
“후. 그런 꼴이 돼서도 그놈의 아이돌을 꼭 해야겠니.”
“뭐래, 이미 난 아이돌이야.”
“이런 새끼를 동생이라고 키운 내가… 하.”
“주름 생긴다?”
“닥쳐.”
“넹….”
생각해보면 지금 숙소 크기나 누나랑 지환이가 살던 이 집의 크기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방 2개에 거실 겸 주방.
다른 건 베란다가 있다는 점 정도일까?
“앉아있어. 뭐 먹을 것 좀 꺼내줘?”
“어, 나 과자 먹고 싶어.”
“너 다이어트 안 해?”
“…지금은 먹어도 되거든?”
구시렁거리면서도 감자깡을 꺼내서 던져주는 손길이 매섭지 않았다.
“그나저나 주말인데 누나는 약속 없어?”
“주말은 집에서 쉬라고 주말인 거야.”
“나가서 사람도 좀 만나고 해…. 히키코모리도 아니고 뭐야.”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알지?”
그렇게 별것 아닌 대화들을 나누면서 과자를 주섬주섬 꺼내 먹는데 문득 찬이가 생각났다.
아주 가끔, 하준 형이나 영빈 형이 과자를 사 와서 우리끼리 몰래 먹을 때가 있었다.
내가 감자깡 사다 달라고 했더니 찬이가 자기랑 동갑 맞냐고 왜 이렇게 취향이 올드하냐고 놀렸었다.
“뭐야, 과자 먹다 왜 웃어?”
“아, 힘찬이 생각나서.”
“그러고 보니까 너희 멤버들 얘기를 제대로 들은 적이 없네. 집에 온 김에 얘기 좀 해봐.”
누나는 작정한 듯 과자 몇 봉지와 음료수까지 꺼내오고 수박도 잘라왔다.
와, 이거 다 먹으면 오늘 하루 밥은 못 먹겠….
거기까지 떠올렸다가 잠시 생각을 멈췄다.
어차피 내가 오늘 뭐 먹는지 회사 사람들은 모르잖아?
급격하게 밝아지는 내 표정에 작게 혀를 찬 누나는 잘라놓은 수박을 접시에 덜어주면서 포크를 툭 내밀었다.
“흘리지 말고.”
“얼마 전에 하준 형이….”
그렇게 시작된 멤버들과 내가 지내온 일상에 대한 이야기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회사에서 어떤 루틴으로 수업을 받는지, 일과 마치고 숙소 거실 바닥에 누워서 다 같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 와중에 우리 하준 형이 얼마나 멋있는지, 세빈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등.
“아, 맞다. 누나 새벽 좋아했지?”
“걔네만큼 내 취향인 애들도 없지.”
누나는 키스 형 특유의 분위기를 극찬하기 시작했고 나는 키스 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키스 형이랑 친하다고 자랑하려고 했는데, 막상 핸드폰에 형이랑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같이 사진 좀 찍어둘걸.
만나면 매번 작업 얘기나 멤버들 이야기만 하다 끝나곤 했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일이 갑자기 아쉬웠다.
만나게 해주는 건 무리여도 사진 한 장만 부탁드리는 건 괜찮지 않을까?
[형, 바빠요?]
키스(윤혁) 형 [아니. 왜?]
[형, 제가 부탁이 있는데요….]
키스(윤혁) 형 [잠깐만]
괜히 누나한테 잘난척하려다 키스 형이 기분 상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사진 대신 그냥 앨범에 싸인을 부탁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나중에 같이 사진 찍으면 그때는 누나한테 보여줘야지.
마음을 정하고 나중에 앨범 가져가면 사인 해달라는 이야기를 남겨야지 하는 찰나, 갑자기 키스 형에게 전화가 왔고 당황한 나는 나도 모르게 누나를 쳐다봤다.
“회사 아냐? 빨리 받아봐.”
“어? 어.”
잠시 멈칫했던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고 이내 키스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 지환아, 무슨 일 있어?
“아, 형 그게 아니고요….”
- 무슨 일인데 네가 부탁이라고 해.
내가 부탁이 있다고 말한 게 이럴 정도인가 싶어서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저희 누나가 새벽 팬이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앨범 가져가면 혹시 사인해 주실 수 있나 해서요.”
옆에서 내 통화를 듣고 있던 누나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공 지진 일으키는 누나라니 상냥한 힘찬이 만큼이나 낯설었다.
- 뭐야,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전화했더니.
“죄송해요. 사심 채우는 거 같아서 말씀드리기가….
- 우리 사이에 그런 걸로 무슨. 아, 너희 이번 주말 쉰댔지?
“네. 지금 집이에요.”
- 스피커폰으로 바꿔봐.
“네?”
- 빨리.
잠시 핸드폰의 마이크 부분을 가린 나는 누나에게 정신을 가다듬을 시간을 주기로 했다.
“누나, 키스 형인데 누나가 팬이라고 했더니 스피커폰으로 바꿔 달래.”
“헐… 너 진짜 아이돌 맞네.”
그럼 가짜 아이돌도 있어요…?
- 안녕하세요, 키스입니다.
“안녕하세요! 지환이 누나 연희라고 해요. 어떡해, 진짜 키스야!”
아이돌 팬이 최애와 통화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알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한 옥타브 올라간 누나 목소리는 여러모로 낯설었다.
오랜만에 본 동생한테 보이던 행동과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 저희 팬이시라고 지환이가 그러던데요, 저희 중에 누가 제일 좋은지 여쭤봐도 될까요?
형? 갑자기?
“멤버들 다 좋아하지만… 키스님이 제일 좋아요! 저번에 믹테 내주신 거 너무 좋았어요….”
“형, 저희 누나 울겠어요. 너무 좋아하는데요?”
- 가영 형, 들었지? 누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 저녁은 소고기 얻어먹게 됐네요. 다음에 지환이 통해서 앨범 보낼게요.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하죠! 꼭 비밀로 할게요!”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키스 형의 목소리 너머로 가영 형과 세비 형이 무어라 말하는 게 언 듯 들렸다.
“형, 혼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와, 이렇게 낚는다고요…?”
- 처음부터 혼자 있다고 안 했는데? 별일 없으면 저녁 같이 먹자. 가영 형이 쏠 거야.
“하하…. 톡 할게요….”
키스 형의 목소리를 들은 누나가 기뻐서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누나와 반대로 가영 형과 세비 형이 이 전화를 들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두 형님이 얼마나 닦달할지 앞이 캄캄해졌다.
가영 형이 복수한다고 자기 작업실로 날 데려가면 어떡하지?
“내 동생이 아이돌 된 게 맞긴 맞구나. 새벽님들한테 잘해, 진짜…. 하. 오늘은 일기 써야겠다.”
“…사람이 이렇게 바뀌네. 누나 동생네 그룹을 더 좋아해야 하는 거 아냐?”
“취존요.”
마법의 단어에 내 입은 다물어졌다.
아니, 그래도 원래 누나 언래블 팬이거든?
나한테 영업한 것도 누난데!
이 억울함을 해소할 길이 없다는 게 가장 슬펐다.
통화 후 내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언뜻 확인한 바로는 가영 형과 키스 형이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왜 다 같이 있는 단톡방 아니고 1:1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는데…
어떻게 키스 형이 이렇게 날 버릴 수가 있지. 하…,
“누나 새벽 최신 앨범 있어?”
“샀지.”
“거기에 누나 동생이 피처링한 건 알아?”
“모르는데?”
이 뻔뻔한 사람아….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누나 방으로 향했고, 누나도 벌떡 일어나 방문을 잡았다.
“어디 남자애가 숙녀 방에 함부로 들어오려고 해!”
“숙녀요? 이 집 어디에 숙녀가 계신지 저는 잘….”
“까분다? 내 방은 왜.”
“앨범 가져가야 사인을 받아다 주지.”
“기다려!”
내가 방으로 들어갈까 봐, 누나가 후다닥 자신이 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 뒤에서 빼꼼 누나 방을 확인한 나는 왜 그토록 나를 막았는지 알 수 있었다.
왠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져 거실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아씨, 무슨 앨범을 저렇게 많이 사놨어.
슬쩍 본 방 한쪽에는 전에는 없었던 5층 선반이 생겼고, 그 선반 아래쪽에는 언래블의 앨범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같은 앨범을 몇 장을 산건지….
심지어 포토 카드를 모으는지 바인더까지 꽂혀있었다.
똑같이 생긴 바인더에 언래블 포토 카드를 모았던 나였기에 슬쩍 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누나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좀 기특해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갓 성인이 된 나이에 10살 차이 나는 동생을 남기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다.
다른 친척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지환을 여태껏 키워낸 누나. 그녀에게 이렇게 동생을 잘 키웠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이 몸을 차지했고, 누나가 어렵게 키워낸 진짜 공지환은 이제 없지만… 그래도 내가 누나 동생으로 살겠노라고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버릇없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키스 형에게 부탁을 하려고 했던 건데 다행히 새벽 형들은 내 생각보다 나를 더 좋게 봐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나는 역시 누나였다.
티 내지 않았지만 우리 애들 이름도 벌써 다 외우고 있었고 앨범도 사 모으고 있었다.
누나가 앨범을 들고 나온 후 나는 한참 동안 멤버들에 대해, 그리고 아이돌 생활을 하며 겪었던 일들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했다.
누나는 무심한 척했지만,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고민했던 거에 비해 편안하고 안락한 시간이 천천히 느리게 흘러갔다.
“아까 저녁에 키스 님이 밥 먹자고 한 거 아니야?”
“그래도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누나랑 밥 먹어야지. 회사에서 언제 또 집에 보내줄지 몰라.”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인맥이야, 점심 나랑 먹고 저녁에 나가서 새벽 분들이랑 먹어.”
“아, 왜 자꾸 보내려고 해.”
“니 말대로 나도 약속 만들어서 나가 놀려고 그런다, 왜!”
“이미 다음에 먹자고 했어. 걍 오늘은 우리끼리 소고기 먹자.”
새벽 형님들에게는 오랜만에 누나랑 밥을 먹어야 한다고 양해를 구해놨다.
형들도 초반에는 가족들 만나기가 쉽지 않을 걸 알고 있었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이해해줬고, 다음에 같이 밥 먹자고 이미 대화를 끝낸 상태였다.
아직 정산받지 않은 덕에 내 수중에는 거창한 돈은 없었지만, ON 엔터는 연습생들에게 약간의 생활비를 보조해 줬다.
따로 옷을 사지도 않았고 군것질도 하지 않았던 덕에 그 돈들은 고스란히 통장에서 잠자고 있었고, 누나에게 저녁 한 끼 사줄 정도는 모여있었다.
물론 그 생활비도 다 빚이라고 생각하면 까마득했지만 이대로 쭉쭉 잘 크면 되지 하고 그냥 생각을 접었다.
“너 정산도 아직 안 받았다면서 돈이 어딨어. 누나가 살 테니까 헛소리하지 마.”
“누나 밥 한 끼 사줄 돈은 되는데?”
그렇게 누나와 쉴 새 없이 투닥거렸지만 마음은 편했다.
모지리 [엄마가 자꾸 잔소리해ㅠㅠㅠㅠㅠ 왜 난 집에 와서도 구박 받지?]
[네 평소 행실을 잘 떠올려보면 알 수 있을 거야.]
모지리 [ㅡㅡ]
내 동생 [인정]
모지리 [아, 내 편이 없어…]
우리 준이 형 [찬아, 형은 널 구박한 적이 없다.]
우리 경환이 형 [나도]
[잘못한 걸 고치라고 지적해 준 적은 있지]
내 동생 [동생한테 지적받다니 창피해….]
모지리 [왜 니가 창피해하냐?? 와, 강세빈 인성….]
[준이 형, 다섯째가 막내 구박해요]
모지리 [왜 내가 다섯째야??]
[내가 생일 더 빠름]
모지리 [아… ㅠㅠㅠ]
중간중간 멤버들과 계속 냥톡으로 대화를 나눴다. 누나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며 멤버들의 실제 모습을 까발리는 것도 꽤 즐거웠다.
키스 형이 저녁 인증으로 찍어 보낸 사진을 보며 가영 형의 지갑에 애도를 표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모처럼의 휴일이 조용히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