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만만하니(4)
“일단 인터뷰에서는 신청자의 사연에 대한 우리 생각을 묻더라. 따로 대화를 나눠 봤는지랑, 어떤 플랜을 짜고 있는지. 자세히는 말 안 하고 대략 틀만 말했어.”
“아무래도 인터뷰 먼저 공개될 텐데 다 말하면 긴장감이 떨어지긴 하죠.”
“그리고 랜덤으로 뽑게 된 신청자의 사연이 부담스럽지 않냐는 질문이 있었어.”
이 부분은 나도 조금 궁금했던 내용이라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대하며 하준 형을 바라봤는데, 대답은 의외로 영빈 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떤 사연이었어도 똑같이 어려웠을 거라고 했어. 아직 우리는 우리 일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나이라 어떤 사연이 나왔어도 똑같이 어려웠을 거라고.”
“영빈 형이 말을 되게 잘했어. 우리 이전 앨범이랑 연결해서 말하는데 듣는 내가 다 끄덕이게 되더라.”
“오…. 우리 영빈이 형이 바뀌었어요?”
앨범 자체가 우리가 살면서 겪을 두려움에 대한 마음을 담은 곡들이기에 꽤 그럴싸하게 말을 잘했던 것 같다.
평소 인터뷰에서도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영빈 형이 나서서 대답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꽤 고무적인 일이었다. 다들 마음껏 환호하며 영빈 형을 우쭈쭈 해주었다.
경환 형의 말과 내 반응이 또 쑥스러웠던지 조용히 하라며 툭툭 쳤지만, 어차피 포잉이 앞발로 때리는 거나 이 형이 때리는 거나 별반 차이는 없었다.
이렇게 무해한 사람이 없다니까!
여러분, 우리 빈이 형 파세요!
“크, 우리 언래블 많이 컸다.”
“뭐래, 누가 보면 네가 우리 키운 줄 알겠다.”
“언제는 나보고 보모라면서요!”
인터뷰 얘기를 하다 또 이상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샜지만 다행히 하준 형이 다시 주제를 잘 끌고 와줬다.
“뭐 인터뷰는 그런 식이었고, 앞으로 우리 일정이나 그런 거 물어봐서 우진 형이 사전에 조절해 준 내용 안에서만 대답했어. 정윤 실장님이랑 박 PD님이 대화한 건 우리가 못 들어서 자세한 건 모르겠어.”
“그래도 어떻게 진행될 거다 뭐 그런 것도 없었어요?”
“일단 이번 신청자 사연 해결이 어떻게 되더라도 프로그램 진행 중에 3회 추가로 게스트 초청해준다는 것 같더라고.”
“그 정도면 나쁘지 않네요.”
“자세한 건 월요일에 너 있는 자리에서 다시 말해주신다고 하셨어. 주말은 쉬기로 했으니까 다른 생각 말고 그냥 쉬라고 하시더라.”
정윤 실장님이 저것만 얻어내진 않았을 것 같았다.
우리가 한참 활동기였다면 당장 무대에서 춤을 출 수 없게 된 내 공백이 우리 활동에 지대한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포잉에게 듣고 월요일에 실장님께 들으면 대략적인 상황은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으…. 그래도 잘 해결됐다니 다행이네요.”
“다른 거 다 떠나서 너 다친 게 제일 걱정이지, 인마.”
“한 일주일만 걷는 거 조심하면 그 이후에는 괜찮을 거래요. 앨범 준비도 하고 팬 미팅도 해야 하는데 빨리 나아야죠.”
“활동도 중요하지만 네가 무리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해.”
하준 형은 조급해하지 말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조급해하다 만성 질병이 되어버릴까 걱정하는 것 같아서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직 행사를 받는 짬이 안 돼서 지금은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사정을 상대방이 일일이 고려해 주지 않을 테니까.
“리얼리티 홍보 영상은 내용 수정해야 되니까 월요일에 같이 알려주신다더라.”
“아… 맞네.”
원래 무사이 촬영 후 리얼리티 홍보 영상을 간단하게 회사에서 찍을 예정이었는데 망둥이 놈이 난장판을 만드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하여튼 그놈의 생선 대가리는 도움이 안 돼요.”
“쯧….”
멤버들 모두의 얼굴에는 못마땅함이 떠올랐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항의하기 어려웠던 만큼 표정이 좋지는 못했다.
“원래 아무 때나 펄떡펄떡 뛰어서 망둥이잖아요. 오죽하겠어요?”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자 그제야 다들 조금씩 얼굴이 풀렸다.
다들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지쳤는지 잠시 편안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 맞다! 저희 숙소 어떻게 됐어요?”
그리고 그때, 경환 형의 배를 베고 누워있던 세빈이가 하준 형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그거. 단톡방에 사진 보낼게. 너희도 한번 봐봐.”
“우와! 이사!”
지금보다 좋은 집으로 이사 간다는 생각에 마냥 신난 힘찬이는 어서 사진을 보내라고 하준 형을 재촉했고 세빈이는 그런 찬이를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러다 조만간 찬이가 팀의 막내로 소개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잠시 찬이에 대한 걱정은 한편으로 밀어버리고 하준 형이 보낸 사진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타이틀곡 녹음 때도 이렇게들 집중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거 기분 탓인가…?
“어때?”
“어… 이런 집은 비싸지 않아요?”
“여기는 방이 3개야….”
“뭐야, 무서워. 팀장님 우리한테 왜 그러시지?”
방이 생각보다 커서 조금 낯설었다.
게다가 묘하게 후보지 3곳 전부 주방 겸 거실이 지금 집보다 훨씬 넓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는 건 좋다만 많은 실적을 쌓은 게 아닌데 이사를 시켜준다고 하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지금 머무는 곳은 연식이 있는 빌라였다.
그래서 방이 조금 넓은 편이었고 한 방에 2층 침대를 2대씩 넣어도 바닥에 약간의 공간이 남았다.
“가격은 나도 몰라. 그냥 소현 팀장님이 이 중에서 고르라고 사진 보내주신 거라….”
“우리 이렇게 넓은 집에 이사가 놓고 잘못하면 막 팔려 가고 그래요?”
순진한 우리 막둥이는 사진에 보이는 넓은 방에 살짝 기가 죽은 것 같았다.
“세빈아, 사람만 사진빨을 받는 게 아냐.”
“응?”
“사진은 엄청 좋아 보이지? 근데 실제로 보면 그거보다 덜할걸? 물론 팀장님이나 우진 형이 한번 봤다고 했으니까 어느 정도 검증된 곳이겠지만.”
“아, 그래요?”
내 설명에 세빈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고 힘찬이는 표정이 미묘해졌다.
“사진으로 보이는 것보다 한 30~40% 정도 덜 좋다고 생각하는 게 맘 편할 거야.”
“지환이 너 이사 많이 다녀봤어?”
“아뇨. 하다못해 과일도 핸드폰으로 찍으면 예뻐 보이는데 집은 오죽 하려고요.”
내가 이사를 다닌 적은 몇 번 없지만 몇 안 되는 친구들이 자취할 때 같이 발품은 많이 팔아봤다.
하지만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어서 그냥 대충 웃으면서 뭉갰다.
“나 방금 지환이 말 듣고 쟤 이사 한 열댓 번 해본 사람인 줄 알았잖아.”
“쟤는 묘하게 생활력이 강한 것 같단 말이야.”
여태 기껏 밥 해먹이고 챙겼더니 이 인간들이 이제 와서 날 앞에 두고 수군거린다.
“와, 내가 뭐 어때서! 여태 챙기고 거둬 먹여놨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네!”
“오구오구, 우리 지화니 삐져써요?”
“최힘찬아, 그거 하지 마 진짜….”
진지한 얘기 좀 하나 했더니 결국 오늘도 우리의 밤은 애꿎은 쿠션이 날아다니는 것으로 끝났다.
어휴, 내가 못 살아 진짜.
* * *
모처럼 늦잠을 자도 되는 공식적인 휴일의 첫날이었지만 늦잠 자는 멤버는 평소와 같았다.
집에 가면 더 맛있는 것들을 먹을 테지만, 아침에 밥을 챙겨 먹이던 게 버릇이 된 나는 평소랑 비슷한 시간에 눈을 떴다.
그때까지도 잠들어 있는 포잉의 모습에 약간 걱정이 됐지만, 그동안 내가 너무 고생시켰나 싶어서 깨우지 않았다.
최근 내 부탁들 때문에 포잉이 무리한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전날 잠들기 전에 찬이랑 경환 형이 노래를 부른 김치볶음밥을 한다고 밥을 올려두고 김치를 볶고 있자니 영빈 형이 먼저 방에서 나왔다.
“좀 더 자지 왜.”
“어제 자기 전에 찬이랑 경환이 형이 김치볶음밥 해달라고 해서요….”
“어리광 다 받아주니까 애들이 자꾸 너한테 칭얼거리잖아.”
잠이 덜 깬 영빈 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고 허스키했다.
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도 꽤 잘 어울리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하며 그냥 웃었다.
“괜찮아요. 저도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형, 얼른 씻고 나와요. 주스 갈아줄게요.”
앨범 활동은 마무리되어서 다행히 활동기처럼 극단적인 식사 조절은 없었다.
아침이나 점심은 꼭 밥으로 잘 챙겨 먹는 편이고 저녁은 아직 닭 가슴살과 샐러드였다.
내가 팀장님과 가장 먼저 합의를 본 건 멤버들의 식단이었다.
적어도 우리 애들이 못 먹어서 영양실조 오는 일은 없었으면 했던 나는 트레이너 쌤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눈 후 대략적인 식단을 들고 갔다.
그 식단을 근거로 적어도 하루 한 번 정도는 밥 다운 밥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칼로리 계산을 마친 식단이었기에 문제없이 통과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이렇게 볶음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중간중간에는 고기반찬도 꽤 자주 먹었다.
어차피 다시 앨범 준비하면 또 식단 조절하면서 바닥을 기어 다니게 될 게 뻔했으니, 짧은 공백기에라도 먹는 행복을 누리자는 게 내 속마음이었다.
“아, 맛있는 냄새다….”
“영빈 형 씻으러 들어갔으니까 여기 앉아서 이거나 마시고 있어.”
비척비척 걸어가며 중얼거리는 힘찬이 모습은 영락없는 좀비였다.
아직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나는 화장실로 직진하려는 힘찬이를 끌어다 거실 바닥에 앉히고 물을 한 컵 내밀었다.
“어우… 졸려 죽겠네.”
“더 자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엄마가 일찍 오래….”
“어머님이 우리 찬이 때문에 고생이 많으셔.”
대충 완성된 볶음밥을 내버려 두고 한쪽 발로 통통 뛰어서 바닥에 주저앉았더니 영빈 형이 다 씻고 나왔다.
“너 씻고 와.”
무슨 릴레이도 아니고 힘찬이를 씻으라고 들여보냈더니 하준 형이 방에서 걸어 나왔다.
하준 형은 영빈 형이 화장실로 못 들어가게 끌고 나왔고, 힘찬이는 빨리 씻는 편이라 지금 이 멤버들 먼저 밥을 먹일 것인지 아니면 나머지도 깨워서 같이 먹을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경환이랑 세빈이 깨울게. 밥은 같이 먹어야지.”
“형,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어요…?”
“양쪽 방문을 번갈아 가면서 노려보면 누구라도 알아챌걸?”
“하하하하하….”
영혼 없이 웃어준 나는 한바탕 소란을 예상하며 느긋하게 누나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 오늘은 집에 있어?]
누님 [어. 왜? 집에 와?]
[응, 나 휴가래.]
누나 [알았어. 집에 있을 테니까 도착하면 말해.]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외면하며 물끄러미 메시지 창을 바라보았다.
내 누나지만 누나가 아닌 사람.
얼굴을 보면 애달픈 마음이 일지만 어린 나를 강하게 키워준 우리 누나가 아닌, 공지환의 누나.
상념은 길지 않았다.
눈앞에 좀비 두 마리가 앉아서 앓는 소리를 내고 있어서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으어어…. 너무 졸려요….”
“그래서 밥 안 먹을 거야?”
“아녀…. 밥 주세요….”
유달리 잠을 못 깨는 세빈이와 경환이 형이었지만 아침에 밥을 하는 날은 눈을 제대로 못 뜨면서도 밥은 챙겨 먹었다.
기나긴 다이어트에 시달리면 사람이 이렇게 살려고 먹게 되더라.
“자알 먹겠습니다아….”
“지환이 너는 앉아있어. 차리는 건 우리가 할게.”
하준 형이 늘어진 테이프같이 흐늘거리며 지나가는 힘찬이 등짝을 때리자 다들 각자 할 일을 찾아서 움직였다.
우리 민하준 님은 아무래도 아이들 조련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것 같았다.
지금 반쯤은 인간의 이성이 날아간 저 중생들을 저렇게 잘 다스리는 걸 보면.
오늘도 궁중팬 가득한 김치볶음밥이 깔끔하게 없어졌다.
식사를 마치자 설거지 당번인 영빈 형이 내가 택시 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집에 가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집에 안 가고 숙소에 멍하니 있기도 좀 그랬다.
내가 안 가면 멤버들이 눈치 볼 것 같기도 했고.
“마스크 잘 챙기고, 너네 집에 갔다고 너무 풀어지면 안 된다?”
“네엥….”
하준 형의 잔소리가 한바탕 이어지고 나니 하나, 둘 가방을 들고 마스크를 썼다.
포잉에게 누나 집에 간다는 말을 메시지로 남겨놓고 멤버들과 인사를 나눈 뒤 영빈 형의 도움을 받아 택시도 잘 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천호동으로 가주세요.”
결국, 나는 지환이네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