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만만하니(1)
그들이 발뺌한다면 충분히 발뺌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앞에서 사람이 넘어지는 데 그쪽을 바라보며 웃는 건 제3자가 봐도 썩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고의로 발을 건 게 아니고 내가 그냥 걸려서 넘어졌다고 우기더라도 웃고 있는 얼굴 앞에선 설명이 구차해진다.
명확하게 넘어지는 내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 있고, 살짝 숙이고 있다 뿐이지 내 움직임을 따라 고개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건 누가 봐도 고의입니다! 회사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할 겁니다!”
“우진 씨, 혹시 회사에 연락하셨나요?”
“네. 아이들의 일에 대해서는 모든 사항을 팀장님께 공유드리고 있습니다.”
“하아…. 소현 씨라면 분명 그렇게 하라고 하겠죠. 그러면 소현 팀장님이 오고 계신 겁니까?”
“정윤 실장님과 대표님께 보고드리고 바로 온다고 하셨습니다.”
급격하게 피곤한 얼굴이 된 박세날 PD를 보고 있자니 조금 안쓰럽기도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는 데미갓을 생각하면 회사의 적극적인 대응이 고맙기도 했다.
아직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데미갓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여러모로 많이 부족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이 조금 분했다.
그때,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PD님, 저예요.”
“아, 예진아. 들어와.”
스태프가 들어오더니 음료수를 PD와 우리 앞에 내려놔 주었다.
“PD님, 세영 씨랑 민수 씨가 다음 스케줄 때문에 얼마나 대기해야 할지 물어보셨어요.”
아직 신인인 우리야 스케줄이 하루에 한 개, 많아야 두 개겠지만 우리를 제외한 대부분은 시간이 곧 돈인 사람들이었다.
“후우…. 일단 신청자분들이랑 영상 딴 분들은 퇴근하셔도 된다고 안내 드려.”
“네….”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던 스태프가 눈에 띄게 안도하며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대기실을 나갔고, 반대로 박 PD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촬영이 정해진 일정에서 벗어나서 늘어지면 그건 곧 돈이 더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앞으론 이런 충돌이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없으니 썩 좋지 못한 분위기도 이해는 되었다.
그리고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우리 멤버들은 우진 형 옆에 모여앉아 입을 꾹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우진 씨, 소현 팀장님은 도착하는 데 얼마 정도 걸릴까요?”
“잠시만요. 여쭤보겠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서글서글한 우리 매니저 형이 지금은 날이 서 있었다.
박세날 PD도 평소의 우진 형 모습을 알기에 지금 내보이는 목소리와 몸짓에 섞여나오는 분노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지나갈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잘 나뉘어 있는 우진 형.
그래서 나도 멤버들도 믿고 의지하고 있을 수 있었다.
“10분 내로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휴우…. 그러면 10분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일단은 저쪽에서도 무어라 하는지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저, PD님.”
“네?”
“그런데 정윤 실장님도 함께 오신다고 합니다.”
“허…. 일단 알겠습니다.”
그렇게 PD가 나가고 우리만 남게 되자 힘찬이 크게 숨을 내쉬더니 우진 형의 어깨를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와, 우리 형 오늘 되게 멋있는데?”
“이 녀석이? 평소에는 안 멋있고?”
“평소에는 쫌….”
“얼씨구?”
그사이 잔뜩 긴장했는지 어깨가 아주 돌덩어리 같다고 호들갑을 떠는 힘찬과 이게 다 우리가 평소에 말을 안 들어서 그런 거라는 우진 형의 모습에 다른 멤버들도 모두 피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대기실 안에 모든 사람이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게 뻔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새파란 신입인 내 입장에서는 과장을 적당히 보태서 하느님과 동기동창이라고 해도 믿는 시늉을 해야 하는 게 방송국 PD였다.
그런 방송국 PD에게 당당하게 우리 입장을 전한 우진 형이 오늘따라 굉장히 듬직했다.
“그나저나 하준 형, 우리 몰래 연기 배웠어요?”
“응?”
“아까 막, 응?”
슬금슬금 하준 형의 곁으로 다가간 나는 아까 망둥이 앞에서 보였던 모습을 상기시키며 하준 형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어허,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
“에이, 연기 수업받으면 진짜 쩔겠던데?”
“맞아, 누가 보면 걔가 형을 협ㅂ….”
“쉿. 거기까지 해.”
힘찬이가 꼭 망둥이 놈이 하준 형을 어떻게 한 것 같다고 쫑알대려 해서 내가 급히 힘찬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타 팀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하는 건 우리 같은 신입들한테 별로 안 좋은 모습이야.”
얌전히 있던 영빈 형까지 힘찬에게 한마디 하자 급격히 쪼그라든 힘찬이를 달래려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기껏 세팅한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고 툴툴거렸지만 지금 분위기상 촬영이고 뭐고 그른 건 다들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주변을 잠시 살핀 나는 멤버들을 톡톡 쳐서 핸드폰을 톡톡 건드리고는 멤버들끼리 있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자세한 얘기는 회사나 숙소가서 하고 우리는 쉿 합시다.]
다들 촬영 중이라 무음으로 해두었을 텐데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렸다.
우리 준이 형 [누가 매너 없이 진동해놨냐]
우리 빈이 형 [난 알 것 같은데]
모지리 [미안요….]
내 동생 [ㅎ…. 숙소가서 얘기해요.]
우리 경환이 형 [ㅇㅇ]
우리 준이 형 [힘찬이 무음으로 바꾸자]
모지리 [넹ㅠㅠㅠㅠㅠㅠ]
다들 살짝 우진 형의 눈치를 보면서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고 지적당한 힘찬이는 핸드폰을 무사히 무음으로 바꾼 듯했다.
[ㅋㅋㅋㅋㅋㅋ…. 최힘찬 모지리 인증]
내 메시지를 확인한 힘찬이가 눈에 힘을 주고 날 쳐다봤지만 마주 보고 히죽 웃어주자 답답하다는 듯 자기 가슴만 탕탕 쳤다.
“내가 말을 말지!”
“응, 넌 조용히 있을 때가 제일 멋있어.”
“와, 내가 진짜!”
“사실이라 반박 불가.”
경환 형의 마무리 멘트 함께 기다렸다는 듯 노크 소리가 들렸고, 세빈이가 냉큼 문을 열자 정윤 실장님과 소현 팀장님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지환아, 너 괜찮아?”
“네. 좀 놀라긴 했는데 다행히 크게 안 다쳤어요.”
“진짜 굿이라도 해야 되나. 왜 자꾸 다치냐.”
심란한 표정을 하고 내 몸을 여기저기 살피던 소현 팀장님과 그 모습을 찌푸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정윤 실장님.
둘 다 얼굴과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묻어있어서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언래블을 아끼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환이 병원부터 가자. 너희는 몸이 재산이야. 축나면 안 된다.”
“우진 씨, 지환이 병원 좀 데려가 주세요. 다른 애들은 저희가 인솔하겠습니다.”
“네네. 그럼 치료 끝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들어온 박 PD가 눈에 보여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윤 실장님, 소현 팀장님 어서 오세요. 지환 군은 가서 얼른 치료받아요. 나중에 따로 인터뷰 넣어도 되고 하니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우진 형에게 기대는 내 모습에 멤버들의 표정은 다시 굳어졌고 나는 괜찮다는 대답 대신 손을 흔들며 폰을 살짝 흔들었다.
메시지 보내겠다는 말이었고 알아들은 멤버들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우리 애들이 착한데, 뭐가 그리 못마땅해서 괴롭히려고 하는지, 쯧.
새삼스럽게 데미갓 놈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포잉, 실장님이랑 PD님이 무슨 대화 하는지 들어보고 말해줘야 된다? 가능하며 데미갓 애들 대화도!’
‘나를 또 이렇게 쓰는 거냐, 계약자 놈아….’
‘헤헷, 포잉 고마워.’
‘웃지 마셈. 정든다….’
한숨을 푹 쉰 포잉이 내 다리를 계속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늘 나에게 까칠하게 굴고 툭툭 말을 내뱉는 포잉이었지만, 걱정도 많고 마음도 약하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다친 내 옆을 떠나는 게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그보다 지금 여기서의 대화가 더 중요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포잉에게 이곳의 일을 맡겼다.
* * *
“정윤 실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박 PD님은 여전하네요.”
“하하, 저야 뭐. 여기 지박령 아닙니까. 큼, 그런데 자리를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정윤 실장은 ON 엔터가 처음 자리를 잡아가던 초창기 때 박정균 대표가 직접 뽑은 사람이었다. 박정균 대표가 면접을 보자마자 팀장 자리를 덜컥 내준 걸로도 유명했다.
그간 정윤 실장이 관리했던 많은 연예인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칼 같은 관리를 칭찬했다.
덕분에 업계에도 다양한 인맥을 가진 정윤 실장을 대하는 건 박세날 PD도 마냥 편하지 않았다.
거기다 지금은 안 좋은 일로 만나게 된 경우라 조금 난감하기까지 했다.
“PD님, 저희 대화 나누는 동안 아이들은 일정대로 인터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네. PD님은 저랑 대화 나누시고 소현 팀장님이 저희 애들 챙겨주실 겁니다.”
“아이고, 그럼 저야 감사하죠. 만수야! 언래블 인터뷰 시작해!”
조연출을 급히 부른 박세날 PD는 정윤 실장을 데리고 대기실을 나섰고 포잉은 잠시 다른 멤버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 뒤를 따라나섰다.
“먼저, 저희 촬영장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어서 유감입니다.”
“PD님이 잘못하신 게 아닌데요, 뭐. 그래서 간신히 뛰어나오시려는 대표님을 말릴 수 있었어요.”
“하, 하하…. 그래도 실장님이 오셨으니 대표님이 오신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박세날 PD는 담담히 말하는 정윤 실장의 모습에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다.
ON 엔터는 큰 회사가 아니지만 박정균 대표의 인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각 방송국의 국장들뿐만 아니라 본부장들과도 꽤 끈끈하게 선이 닿아있다는 말이 돌았다.
방음이 잘 되는 회의실로 정윤 실장을 안내한 박세날 PD는 자리에 앉자마자 들려오는 정윤 실장의 발언에 일이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제논 엔터에서 얼마나 지원했습니까.”
“저는 잘….”
“얼마나 찔러줬길래 저희 애들이 촬영장에서 굴렀는데 그쪽 관계자는 사과 한마디 없죠?”
“정윤 실장님, 잠시 진정하시고….”
작정하고 온 정윤 실장의 혀는 매우 날카로웠고 누구도 모르게 지켜보고 있던 포잉은 이게 바로 인간들이 말하던 팝콘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흥미진진한 상황을 놓칠 수 없었지만, 지환이 데미갓이라는 몹쓸 녀석들의 대화도 궁금해했기 때문에 그쪽에도 다녀와야 했다.
계약자를 잘못 만나 자신만 바빠지는 상황이 조금 못마땅했지만, 이게 중요한 갈림길이라는 건 포잉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새롭게 배워둔 능력을 써보기로 했다.
상대방을 지정하면 어느 정도 거리 안에서는 그 상대방이 있는 곳의 대화도 3시간 동안 들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무척이나 유용했지만, 체력적인 소모가 너무 컸다.
한번 능력을 사용하고 나면 진이 빠져 10시간은 자야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 쓰지 않으려 했다만 이번에는 그 능력을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망둥이 놈에게 능력을 써야 할지 그놈들을 데리고 다니는 다른 놈에게 스킬을 써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포잉은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건 그 매니저라는 놈이라고 추측했기에 상대방으로 매니저를 지정했다.
그 와중에 포잉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계약자에게 제대로 설명해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것들을 짐작하고 일을 맡기는지 조금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지환이 알고 부탁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요정이니까 당연히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매우 낙천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요청이었지만 포잉은 알 리 없었다.
알았다면 포잉 성격에 지환을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