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Wake up(2)
“우리 막둥이, 놀랐어요? 오구오구.”
“아, 형…. 놀리지 마요.”
“풉, 솜뭉치들 막내 울면 안 되니까 비밀이에요.”
“형 그런 말 알아요?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요.”
“오, 우리 세빈이 똑똑하네. 그런 말도 알고.”
채팅방은 세빈이가 놀라서 주저앉은 걸로 난리가 났다.
‘엄마야!’라는 외침과 울 것 같은 얼굴의 세빈이 모습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화면을 캡쳐 뜨던 솜뭉치도 있을 터.
팬들의 손은 빛보다 빨랐고 영상을 나노 단위로 쪼개보는 게 그들의 일상이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나중에 움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섬세한 감정을 가진 우리 막내는 내가 솜뭉치들과 같이 웃어버리면 삐질 게 분명했다.
“휴… 갑자기 튀어나오면 놀라는 게 당연하거든요?”
“응. 그래그래, 알았어.”
채팅창을 도배한 ‘ㅋㅋㅋㅋㅋ’의 물결과 ‘오구오구’라는 단어에 세빈이의 얼굴이 세상을 잃은 것 같아졌지만 분위기는 확실히 달아올랐다.
“자, 세빈 군. 뭐 하고 있었어요?”
“갑자기 인터뷰를 한다고요?”
“대답해야지.”
“휴…. 생각나는 안무들을 만들어보고 있었어요. 솜뭉치들에게 들려줄 다음 곡도 생각해야 하니까.”
“기특하네. 솜뭉치들, 들었죠? 우리 막내가 이렇게 여러분을 아껴요.”
방금 전 장면만 없었어도 기특하고 멋있는 장면이 되었을 텐데.
“그럼 다음으로는 우리 히스 형을 만나러 가볼까요?”
“히스 형은 어딨는데요?”
“늘 있던 곳에 있겠지?”
조금 빠르게 진행하자 다행히 분위기는 늘어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영빈 형을 찾는 것에 분위기가 맞춰졌다.
간간이 어그로를 끄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웃으면서 흐린 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GIVE 앱을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어서 이제는 저런 어그로는 없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심한 사람은 모니터링하고 있을 다른 직원분들이 따로 체크해서 신고를 넣을 테니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고 하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아직 인지도를 쌓지 못한 신생 그룹이라 키보드 워리어들이 별로 붙지도 않았을 테고.
어떤 연예인이 했던 말이 있다.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라고.
앨범 작업을 위한 녹음 부스와 달리 연습실은 비교적 좁은 공간이었다.
방음 처리가 되어 있어서 소리가 새어 나갈 일은 없었지만 오래 머물면 감옥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창이 문에 있어서 우리는 그 안에서 헤드폰을 끼고 연습 중인 영빈 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빈아, 이번엔 네가 들어가서 히스 형을 불러볼래? 여러분, 이번엔 세빈이한테 기회를 주는 게 좋겠죠?”
“이렇게 날 제물로 바치려는 건 아니죠?”
“어허, 제물이라니. 무서운 소리를 하고 있어.”
세빈이는 솜뭉치들의 응원에 힘입어 문을 톡톡 두드렸지만, 헤드폰을 끼고 있는 영빈 형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 세빈이 혼날까 봐 겁먹었어요?”
“아니거든요?”
툴툴거리던 세빈이가 결국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고 인기척을 느낀 영빈 형이 뒤를 돌아 놀래주는 건 실패해버렸다.
“왜?”
“방송 중이에요! 솜뭉치들한테 저희 연습하는 모습 보여주려고요.”
“아아…. 근데 세빈이는 왜 이렇게 살금살금 들어와.”
“…형 정말 안 들린 거 맞아요?”
영빈 형에게는 우진 형의 연락이 잘 전달되었는지 우리가 올 타이밍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 형들 나만 놀리려고 짰죠?”
“그럴 리가.”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데요, 히스 형?”
“자, 여러분 저희는 다른 스케줄이 없을 때는 이렇게 회사에서 연습하거나 곡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요.”
딱히 세빈이를 놀리려 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고, 이건 이거 나름대로 즐거우니 괜찮지 않을까?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영빈 형과 세빈이를 데리고 연습실로 돌아갔다.
“저번엔 숙소 보여드렸고 이번엔 회사를 보여드렸네요. 마음에 들어요?”
“저희 앨범 활동은 끝났어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솜뭉치들이 직접 리얼리티를 언급해 주면 말을 꺼내기 더 좋을 터라 반응을 유도하는 멘트들을 살짝 섞어가며 대화를 진행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건지 솜뭉치들이 리얼리티는 안 찍냐는 질문들을 보내왔다.
역시, 내 솜뭉치들. 척하면 척이었다.
“히스 형, 솜뭉치들이 리얼리티를 원하네요.”
“솜뭉치들한테는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어허, 형은 막 엄청 예쁘게 꾸민 솜뭉치들만 좋아해 줄 거예요?”
“그럴 리가. 우리 좋아해 주는 것만 해도 너무 고마운데.”
“솜뭉치들도 그렇지 않겠어요? 우리가 뭐 먹는지, 뭐하고 일상을 보내는지. 나라면 궁금할 것 같은데. 우리도 늘 솜뭉치들이 뭐 하는지 궁금하잖아요.”
어쩌다 마주친 한 번의 눈길.
덕질의 시작은 정말 사소한 한 가지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방송에서 스치듯 본 귀엽거나 멋진 모습, 재밌는 모습.
거기에서 호감을 갖고 그렇게 한번 눈길을 주게 되면, 그때부터는 점점 그들의 더 많은 모습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궁금했다.
그런 이유로, 정말 날것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현실의 모습이 어느 정도 반영되는 리얼리티를 좋아하는 팬들이 많았다.
그런 영상을 보면서 ‘아, 우리 애들은 이런 걸 먹고 이런 하루를 보내는구나.’하고 알아가기도 하고.
내 아이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아가면서 조금씩 저 멀리에 있던 내 별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도 같았다.
나도 그랬고, 나에게 언래블을 알려준 우리 누나도, 같이 덕질을 하던 덕메들도 그랬다. 리얼리티도 결국은 방송이라는 걸 알지만, 즐거워했다.
“아마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몰래 들은 소식들이 있거든요.”
“우리 세빈이 어디서 들은 게 있어요? 형아들한테 말 안 해주고 혼자 알고 있었던 거야?”
“아니, 확실하지 않아서 얘길 안 했죠!”
다행히 내 장난을 세빈이가 잘 받아줬고 앵글 안을 벗어나지 않고 자리를 잘 지키던 영빈 형이 세빈이를 포박해 주면서 즐거운 분위기가 잘 만들어졌다.
”형, 팬분들이 팬 사인회 물어본다! 대답해드려야죠!”
영빈 형한테 붙잡혀서 버둥거리던 세빈이가 용케 솜뭉치들이 올린 메시지를 확인하고 탈출을 감행했지만, 아직은 덩치도 팔다리 길이도 영빈 형을 이길 수 없는 몸부림이었다.
“팬 사인회 응모 다들 잘했어요?”
혹시 회사 사람들이 우리 대화 보면서 분위기를 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타이밍 좋게 질문과 분위기가 맞아떨어졌다.
다만 회사에서 여태 그렇게 참여한 적은 없었기에 그저 타이밍이 좋았던 거려니 하고 슬며시 웃어넘겼다.
이쯤에서 안쓰러운 막내를 구해줘 볼까?
“우리 솜뭉치들 만나려고 준비하고 있잖아. 세빈이가 조금만 설명해 줄까?”
“네! 제가 할게요!”
위에서 꾹 누르던 영빈 형이 내 말에 슬며시 웃으며 세빈이를 놔줬고, 후다닥 빠져나온 세빈이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더니 단정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세빈이는 자세가 곧았다.
땅바닥에 앉을 때여도 의자에 앉는 것처럼 허리를 곧게 펴고, 마치 교본에서 볼 법한 그런 자세를 늘 유지했다.
“다 알면 재미없으니까, 음…. 일단 여러분들에게 선물이 있어요. 어떤 선물인지는 그날 직접 아는 게 더 즐거울 테니까 비밀로 할게요. 그리고 여러분들이랑 대화도 나눌 거고, 이벤트도 할 건데… 아, 이거 다 말하면 안 되는 거라….”
대략적인 스케줄은 만들어져 있고, 준비 중인 것들도 있어서 떠오르는 것들은 많았지만 실제로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세빈이는 안타까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이 되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만날 수 있으니까 다들 기대 많이 해줬으면 좋겠어요.”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카메라 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가까이 다가간 세빈이가 화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팬 사인회 뿐만 아니라 최대한 여러분들과 자주 만나려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잊어버리지 말고 기다려 줬으면 좋겠어요.”
조금 뒤에서 카메라 렌즈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영빈 형이 조곤조곤한 말투로 천천히 말을 하자 여태까지 수많은 질문이 쏟아져 나오던 채팅창이 얌전해졌다.
다 같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네, 기다릴게요라고 예쁘게 대답을 해주는 모습에 나도 결국 웃어버렸다.
솜뭉치들은 형 라인 멤버들이 차분하게 말할 때 유난히 차분하고 얌전해지곤 했다.
이래서 팬덤 성격은 내 연예인 따라간다고들 하는 걸까?
“자,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더 놀고 싶은데 그러다 보면 스포할 것 같으니까.”
“맞아. 스포하면 저희 매니저 형이랑 팀장님한테 혼나요.”
“나중에 또 앱 켤게요. 또 봐요, 우리.”
아쉬운 마음을 담아 솜뭉치들에게 인사를 전한 우리는 이전에 힘찬이처럼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앱이 잘 꺼졌는지 확인을 마치고 나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아, 뭔가 역시 늘 오디오를 채워주던 멤버들이 없으니까 허전하다.”
“힘찬이 형이 그리울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고생했다, 얘들아.”
다 같이 있을 때보다 어설프긴 했지만 처음으로 세 명이서 방송을 끝낸 우리를 우진 형이 다독여주더니 잠시 쉬라는 말과 함께 연습실을 나갔다.
“다른 애들은 잘하고 있겠지?”
“팀장님이랑 같이 갔으니까 잘하고 오겠죠.”
기획안을 떠올린 나는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길 바라면서 팔을 쭉 뻗고 몸을 풀었다.
내내 셀카봉을 들고 있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방송을 할 때는 몸이 자연스럽게 긴장 상태를 유지하다 보니 짧은 방송에도 상당히 뻐근했다.
“OST는 언제 발표한다고 했지?”
“다음 주 수요일인가 목요일에 발표한다고 한 것 같은데.”
“커버 사진 찍는 건 오늘 저녁이랬지?”
“네. 다 같이 찍어야 되니까.”
오늘은 커버 사진을 찍고, 내일은 리얼리티 홍보 영상을 찍어야 하고.
팬 사인회 홍보 영상은 몇 시에 올린다고 했더라.
“뭔가 우리 계속하고 있기는 하네.”
“어, 나도 방금 그 생각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우리 일정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나는 영빈 형과 세빈이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움찔했다.
“뭐야, 환이 너도 같은 생각 하고 있었어?”
“네, 뭐…. 영상 공개 몇 시더라, 뭐 해야 하더라 하는 그런 생각?”
“생각하는 게 다 비슷비슷하네.”
잠드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멤버들과 붙어서 지내고 있으니 어쩌면 생각하는 패턴까지 닮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준이 형 라디오 있는 날이죠?”
“아, 그러네. 형 혼자 스케줄 가면 쓸쓸하겠다….”
“우리 리더님이 부지런히 인지도 높여야 우리가 더 바빠지지.”
착한 세빈이가 하준 형의 쓸쓸함을 논하고 영빈 형은 리더를 굴릴 궁리를 하는 등 세세한 생각은 조금씩 달랐지만.
“얘들아, 팀장님이랑 애들도 곧 돌아온대.”
“얘기는 잘 됐대요?”
“응. 잘 돼서 우리가 부탁한 것도 들어주신다고 했대.”
“오, 다행이다….”
무겁고 어두운 주제라 다들 머리를 쥐어뜯고 고민했는데도 우리 힘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내내 그 생각으로 머리가 아팠는데, 나뿐만 아니라 멤버들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스타트를 잘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진짜 이제 우리만 잘하면 되네요.”
“언제나 그랬지, 뭐.”
우진 형이 전해준 기쁜 소식을 들은 우리는 더 이상 연습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가 없어졌고, 각자 연습실로 흩어졌다.
‘그래도 방송이 처음보단 늘었네.’
‘고마워. 이제 좀 덜 떨지?’
‘처음엔 경기 일으키는 줄 알았음.’
‘너무해….’
카메라 앞에서 떨지 않기 위해 피가 날 만큼 입안의 살을 물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찌르던 내가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대하고 있으니… 장족의 발전까지는 못돼도 약간의 발전은 한 것 같아 뿌듯해졌다.
‘더 많이 칭찬해 줘, 포잉.’
‘나 말고 다른 인간들한테 받을 생각을 해야지.’
‘아직은 없으니까 포잉이라도 해줘야지!’
티격태격하며 작업실 의자에 앉자 내 머리 위에서 무릎으로 내려온 포잉은 대꾸 없이 눈을 감았다.
습관처럼 포잉의 몸을 가만히 쓰다듬자 따끈따끈한 포잉의 체온이 느껴졌다.
나에게만 느껴지는 이 온도에 다시 한번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