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Happiness(6)
“곡은 거의 완성된 단계라 내가 어설프게 손대면 오히려 망칠 것 같아. 그런데 가사는 조금 바꿔보는 게 어떨까 싶은데, 지환 군 생각은 어때요?”
“제가 아직 공부가 깊지 않아서 말씀해 주시면 열심히 듣겠습니다.”
지은 죄가 있는 나는 최대한 얌전을 떨며 공손하게 에단을 대했다. 뒤에서 힘찬이 치를 떨 게 안 봐도 비디오였다.
멤버들은 드라마와 곡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고, 나를 제외한 우리 애들은 우진 형의 지도 아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나만.
나만 한쪽에서 에단과 단둘이 앉아 가사를 논하고 있는데 부담감에 어깨가 짜부라질 것 같아서 솔직히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인지 아니면 정말 순수하게 부담감인지도 알 길은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과정을 거친 졸업식은 더 이상 에단의 졸업식이라 보기 힘들 거라는 사실이다.
머리 한 쪽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여기, 이 부분이 드라마 느낌이랑 조금 다른 것 같죠?”
상념에 빠질 틈도 없이 에단이 지적한 부분은 싸비, 그러니까 후렴구 부분이었다.
“음… 이렇게?”
“이제 막 졸업하는 어린 청춘들이니까 너무 무겁지 않게.”
“어, 그러면….”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그 간질간질한 느낌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간절한 마음을 담는다면 이런 문구가 더 나을 것 같아 종이에 슥슥 적어 보였다.
[Good Morning & Good Night 네게 속삭일 수 있도록
하루의 낮과 밤을 내게 줄 수는 없니?]
“이건 어때요?”
“기존의 후렴구보다는 이게 더 풋풋하니 좋을 것 같네요.”
문장을 추리고 드라마의 느낌을 살릴 수 있도록 가사를 손보는 내내, 에단은 직접적으로 문장을 읊어주지 않았다.
내가 직접 분위기가 녹아나는 가사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써보도록 훈련을 시켜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여기, 이 부분을 조금 손보면 가사는 끝이겠네요.”
그 말을 듣고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다시 가사를 쭉 읽어보았다.
기존의 가사를 그대로 사용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단어나 표현들을 바꾸면서 정말로 기존 졸업식과는 다른 곡이 되었다.
그리고 가사를 다 읽고 나니, 에단이 짚어준 부분의 허전함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시작은 사소했겠지, 사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아.
그저 북쪽에서 시린 바람이 불어오면 한 계절이 끝나가듯이
그렇게 나도 모르게 좋아해 버린걸.]
“조금만 더 연습하면 제법 괜찮은 가사를 뽑아낼 수 있을 것 같네요. 고생했어요, 지환 군.”
“선생님이 알려주신 덕분에 가능했죠, 앞으로도 많이 알려주세요.”
“어휴, 요새 어린 친구들 같지 않게 예의도 바르지.”
사실 이렇게 말하며 상냥하게 웃고 있는 에단도 30대였고, 원래 내 나이를 생각하면 큰 차이 나지 않았지만… 내 몸에 적응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저 착하게 웃었다.
그리고 에단의 칭찬을 들은 순간 갑자기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알림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제 가사 봐도 돼요?”
“아, 여기.”
에단과 내가 한참 종이를 붙들고 씨름하는 동안 대략적인 드라마 내용을 숙지한 멤버들이 내 손에 든 종이만 보고 있었다.
“음, 이런 말 실례일지 모르겠지만 미어캣 무리 같네요.”
“괜찮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손안의 종이를 가뜩이나 큰 눈으로 응시하는 멤버들 모습에 나도 같은 동물을 떠올렸기에 웃고 말았다.
“이거 파트는 어떻게 할 거야?”
“아, 생각해봤는데요.”
처음에는 기존 곡의 파트 배분을 떠올렸지만, 지금은 바뀐 부분이 너무 많아서 처음부터 다시 짜야 했다.
그렇게 대충 파트를 분배하고 나니 다들 수긍한 기색이어서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한 곡의 길이는 고작 4분가량인데 이걸 6명이 나눠서 부르려니 빠듯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최애 멤버가 차별받는다고, 팬덤에서 간혹 분량으로 싸움이 나기도 했기에 최대한 분배에 신경을 썼다.
표절 아니면 편곡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하나의 곡을 만들어낸 기분이 들어서, 솜뭉치들을 위한 곡을 만들었을 때랑은 또 다른 기분이 들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멤버들에게 파트까지 배분해 준 나는 포잉에게 눈짓을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동안 간혹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는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구조인지는 아직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보인 알림창은 기존의 것과 달리 처음 스킬이 주어질 때와 비슷해 보여서 포잉과 확인하기 위해 화장실로 숨었다.
허공에 있는 알림창을 누르자 설명이 주르륵 나타났다.
[한 분야의 전문가에게 인정받았습니다. 해당 분야에 해당하는 스텟이 올라갑니다.]
평소에는 레벨이 오르면 포인트가 주어지고 내가 원하는 분야에 투자할 수 있는 방식이었지만,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그 분야의 스탯이 올라갔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라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일단은 수치부터 확인했다.
여전히 연기 능력은 바닥이었지만 작사가 10, 작곡이 5 올라있었다.
‘포잉,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들은 적 없어?’
‘시스템에 대해서는 장로 요정들만 알고 있긴 한데, 들은 적이 있음. 시스템을 통해 혜택을 받으면 특전처럼 숨겨진 내용이 많다고 했음. 그중에 스승의 인정 같은 것들이 있다고 했는데 비슷한 기능인 듯?’
한동안 바쁘게 자리를 비우고 시들시들해져서 들어오던 포잉은 내 서포트를 위해 여러 가지를 배운 만큼 이전보다는 설명이 자세해졌다.
기특한 내 요정님.
‘스승의 인정은 또 뭐야?’
‘요정들은 자기가 가르침을 받는 스승님께 인정받으면 새로운 능력을 쓸 수 있게 되거나, 기존의 능력을 더 잘 쓰게 되거든. 님이 방금 잘나가는 작곡가한테 칭찬받았잖으니 비슷한 거 아니겠음?’
우리 포잉은 내가 매번 말투로 투덜거렸더니 요새는 꽤 정상적인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포잉은 오히려 그편을 더 어색해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이쪽이 마음 편해졌다.
‘그럼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있을 수 있는 거네?’
‘그렇겠지? 혹시라도 이상 현상이 있으면 꼭 말하셈’
‘알았어, 걱정하지 마.’
얼마 전에 무언가 시스템 에러로 요정족에 문제가 있었다면서 혹시라도 이상한 일이 있으면 꼭 말하라며 나를 붙들고 한참을 잔소리했던 게 생각났다.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지만 표정이 드물게 진지하고 심각했기에 꼭 안고 쓰다듬어 주면서 진정시켰었다.
‘어쨌든 좋은 거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자연스럽게 내 손에 머리를 부비는 포잉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가가 허물어졌다.
반년도 되지 못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에게 많이 익숙해진 탓에 쓰다듬는 나도, 받는 포잉도 이제는 어색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로 돌아가니 녹음 부스에 들어간 영빈 형이 보였다.
이제는 이 풍경도 익숙해졌다.
연습실에서 땀을 흘리는 것도, 녹음하거나 연습에 매진하는 멤버들의 모습도.
가사 수정하고 멜로디 다시 손보는 데 2시간이 걸렸고, 녹음하는데 3시간이 더 걸렸다.
그렇게 우리는 밥 먹는 것도 잊고 이 곡의 녹음에 매달렸다.
어째서인지 이 곡이 앞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포인트가 되어 줄 거라는 근거 없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새벽부터 방송 갔다가, 회의하고 영상 찍고 곡 녹음까지 끝내니 벌써 다음 날이 되어버렸다.
* * *
우리 때랑은 달리 새벽 무대는 빠르게 끝냈다.
스케줄이 많고 방송국에서도 대충 대할 수 없는 그룹들은 우리처럼 무한정 대기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인지도의 차이였다.
녹음할 때는 쌩쌩하던 애들이 회사 밖으로 나오자마자 시들시들해지더니 숙소에 도착해서는 파김치가 되었다.
“아, 조금만 있다가 씻을래….”
“팀장님이 보내준 사진도 확인해야 하는데….”
다들 진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까 회사에서는 멀쩡했잖아. 왜들 이렇게 맛이 갔어.”
“퇴근했잖아….”
“맞아, 집에 오면 원래 다 놓고 싶은 거랬어.”
시답지 않은 소리를 주장하며 바닥에 퍼진 애들을 내버려 두고 먼저 씻고 나온 나는 반쯤 졸고 있던 세빈이부터 욕실로 밀어 넣었다.
완전히 잠들면 깨우는 데 또 한참 걸릴 게 뻔해서 그 전에 빠르게 씻겨야 했다.
“나 좀 보모 된 기분이야.”
“베이비 시터, 괜찮네. 그럼 애가 애를 보는 거야?”
“여기에 애는 세빈이랑 너 이렇게 둘 뿐인 것 같다.”
푸념 아닌 푸념에 바로 대꾸하는 힘찬이를 보고 있자니 허허로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쟤는 물에 빠트려도 입은 뜨지 않을까?
언제 한번 꼭 실험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바닥에 주저앉아 아직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꾹꾹 눌렀다.
그 와중에도 영빈 형은 귀에 이어폰을 빼지 않고 있었고, 경환 형은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형, 뭐해요?”
“아, 메모. 생각났을 때 적어야 안 잊어버려.”
메모가 끝난 건지 수첩을 닫고 편안한 자세로 늘어지는 모습이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하나의 풍경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면 지환이가 은근히 재주가 많아.”
“응? 나?”
젖은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지는 내 뒤로 경환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도 조리 있게 잘하는 편이고, 목소리도 좋고. 곡도 쓰고 밥도 잘하고.”
“어우, 뭐야 갑자기 왜 칭찬하고 그래요. 마지막 말이 제일 중요한 거죠?”
누군가에게 칭찬을 듣는 건 언제나 어색하고 낯선 기분이었다.
경환 형은 보이는 것과 실제 모습이 조금 다른 편이었다.
포지션도 래퍼고, 프로그램에 출연해도 말을 잘 하지 않아서, 경환 형을 처음 겪는 팬들은 그가 과묵한 성격이라 오해를 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꽤 장난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말하는 걸 귀찮아하는 데다 스스로가 말재간이 없다고 생각해서 잘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힘찬이가 없던 전생의 언래블에서는 세빈이가 장난을 치면 경환 형이 받아주는 쪽이었고, 지금 언래블에서는 찬이가 주로 장난을 치고 간혹 경환 형과 찬, 세빈이 셋이 장난을 치다 하준 형에게 혼나기도 했다.
내가 만든 이 변화가 기껍기도 했지만 아직은 멤버들의 애정 어린 말이나 행동을 받을 때면 어쩔 줄 몰라 어색해하곤 했다.
“나 다 씻었으니까 다음 사람 들어가요.”
“찬아, 너 씻고 와.”
“예이~.”
세빈이가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나와 내 앞에 털썩 앉았다.
“어휴, 이거 내가 버릇을 잘못 들여놔가지고.”
“내가 말리면 꼭 아침에 머리가 번개 맞은 것처럼 된단 말이죠. 왜 그럴까요?”
“그러게, 왜 그럴까. 우리 막내는 똥손인 것인가.”
하준 형이 세빈에게 장난치는 동안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었다.
그때, 이어폰을 뺀 영빈 형이 중얼거렸다.
“뜬금없기는 한데, 우리 좀 행운아인 것 같아.”
“갑자기?”
“다행히 너희들이 모두 성격 모난 데 없이 착하고, 열정도 있고. 우리가 성공했다고 말할만한 처지는 못 되지만 난 지금 성적도 대단하다고 생각해.”
거기까지 말한 영빈 형이 무언가 고민하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새벽 형들이 지나치게 걱정한다고 하긴 했지만 우리가 그만큼 진심인 거고. 그건 앞으로 조심하면 되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래, 너희랑 같은 팀이 돼서 내가 행운아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정리하는 중인지 말은 느릿느릿했고 평소에도 큰 소리를 잘 안 내는 터라 목소리가 좀 작은 편이었지만, 유난히도 그 내용이 선명하게 귓가에 꽂혔다.
“어…. 이쯤에서 하준 형이나 환이 형이 한마디 해야 하지 않아요?”
“어? 어….”
마침 꽤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이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라 속이 읽힌 것 같기도 하고 눈꺼풀이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기분이 싱숭생숭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말려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세빈이가 뭐라 중얼거렸지만, 하준 형도 나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경환 형이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웃었다.
“그냥 우리 모두 운이 좋았다고 하자. 이런 멤버들이 만나기도 쉽지 않으니까.”
“확실한 건 힘찬이가 들었으면 또 닭살이라고 바닥을 굴렀겠네요.”
경환 형의 말에 하준 형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고 어느새 멤버들 모두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힘찬이 욕실에서 나왔다.
“뭐야, 뭔데? 왜 웃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