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Happiness(5)
코디 누님이랑 메이크업 누님이 웬 행거 같은 걸 들고 오더니 이번 타이틀 무대 때 입었던 의상들을 주르륵 꺼내서 자기들끼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흐느적거리는 우진 형이 무언 얘기를 꺼내며 영상팀을 재촉하고 있었다.
“우리 안 잘리는 거 맞지?”
“안 잘리니까 팬 사인회 영상을 찍자고 하겠지, 멍충아.”
하준 형을 통해 들은 회사 내부 사정이 걱정스러웠던지 힘찬이 옆에 있던 경환 형에게 소곤거렸지만 이내 매정한 대답에 시무룩해졌다.
어째서인지 경환 형도 점점 성격이 세지는 것 같은데.
원래의 언래블은 하준 형과 영빈 형, 경환 형과 세빈이로 이루어진 4인조였지만, 내가 개입하면서 6인조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내가 팬이 아닌 멤버가 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다 더 노골적이고 솔직한 멤버들의 성격을 실시간으로 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데뷔 앨범 자체가 아예 달라졌고, 팬덤의 규모가 커지는 속도도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그러다 보니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툭툭 튀어나올 때마다 심장이 쫄려서 포잉을 붙잡고 하소연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환아, 그 곡이 어떤 건지 들어볼 수 있어?”
“아, 폰에 있을 거예요. 잠깐만요.”
얼떨결에 표절도 해버리고, 그러다 OST를 부르게 됐다.
거기에 덜컥 팬 송을 만들기도 했으니.
다른 멤버들에게 졸업식을 들려준 적이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확실히 영빈 형에게는 들려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귀한 메인 보컬 영빈 형을 위해 빠르게 곡을 틀어줬고, 내가 어설프게 가이드 녹음한 곡을 듣던 영빈 형은 무언가 고민하듯 중얼거리다 이어폰을 뺐다.
“진짜 딱 풋풋한 게 청춘 드라마에 어울릴만한 노래네. 잘했네, 우리 환이.”
“아니, 그냥 뭐…. 안 대리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영빈 형에게 직접적인 칭찬을 받아본 적 없던 나는 귀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최대한 아닌 척하려고 애썼다.
이제는 원래 내 나이가 얼마였는지 굳이 되새기지 않았다. 지금의 삶에 녹아들어서, 하준 형과 영빈 형을 보면 정말 형처럼 느껴지고 의지가 되곤 했다.
경환 형은 형… 보다는 좀 듬직한 친구 느낌이었고, 찬이는 말 안 듣는 동생, 세빈이는 세상 예쁜 우리 막내.
“뭔데? 지환이 왜 빨개짐? 와, 귀 봐라!”
“아, 넌 좀!”
“악! 왜 때려!”
“넌 그냥 말을 하지 마!”
모처럼 훈훈한 분위기였건만 힘찬이가 개입하자마자 또다시 분위기가 작살났다.
내 언젠가 저놈을 잡아 매달고 말리라.
‘포잉, 웃지 마….’
‘뭐래, 고양이가 어떻게 웃음?’
‘지금 너처럼요.’
그 꼴을 처음부터 쭉 지켜보던 포잉도 우리 모습을 보면서 피식거리고 있었다.
점점 더 뻔뻔해지는 것 같은 우리 냥아치 요정.
“얘들아, 준비하자.”
“니엡….”
“의상은 이거 입으면 돼!”
첫 음악 방송 무대 의상이었던 그 재킷이었다.
쇼케이스 때 의상과 이 의상을 두고 많은 얘기가 오가는 것 같았는데 결국 음방 무대 의상으로 정해진 것 같았다.
사전에 소규모 회의실에 준비를 해놔서 따로 동선을 맞추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더군다나 위에서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고 있어서 다들 행복한 표정이 저절로 나왔다.
“둘, 셋!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평소처럼 하준 형의 선창에 따라 카메라를 향해 힘차게 외치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 앞에는 간략히 정리된 대본도 준비되어 있었다.
“솜뭉치들 잘 지내고 있죠? 오늘은 특별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저희가 모였는데요. 힘찬 군이 설명해볼까요?”
“솜뭉치들 안녕! 여러분의 귀염둥이 찬이에요!”
“누가 우리 찬이 입에 먹을 거 넣어줘라, 얘 또 날아가겠다.”
다만, 대략적인 흐름만 적혀있었다. 나머지는 우리 재량껏 진행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어차피 생방으로 송출하는 게 아니었기에 중간에 충분히 편집이 가능했고 그 덕분에 우리도 부담이 적었다.
가볍게 웃으며 몇 가지 농담을 주고받은 우리를 진정시킨 건 역시 하준이었다.
“자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대본대로 좀 해요. 솜뭉치들, 제가 이렇게 천방지축인 애들 때문에 늙어요….”
“와, 이렇게 언플을 하시겠다?”
“리더가 그러면 씁니까!”
“됐고, 오늘 우리 왜 모였는지부터 설명해 주세요.”
칼같이 리더 몰이를 차단하는 하준 형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데뷔 전 리더 몰이에 휘둘려 쩔쩔매던 하준 형이 지금은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여러분들, 기뻐해 주세요! 드디어 저희가 팬 사인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와아!”
“짝짝짝!”
멤버들 모두 순도 100%의 신남을 마음껏 뽐내며 박수를 쳤고, 애들을 다시 진정시킨 하준 형이 말을 이어갔다.
“평소에 여러분이 알고 있던 팬 사인회랑은 조금 다른, 팬 미팅과 팬 사인회의 중간쯤 되는 무언가가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사인은 할 거예요!”
“맞아요, 세빈이 말처럼 여러분들께 사인도 해드리고 같이 소소하게나마 대화도 조금 하려고 해요.”
“그럼 저희 몇 분이나 모실 수 있어요?”
적절한 타이밍을 보다 내가 질문을 던지자 다행히 경환 형이 잘 받아주었다.
“네, 환이가 질문을 잘해줬는데, 서울에서 100분, 부산에서 100분을 만나 뵙는 걸로 정해졌습니다.”
“엇… 너무 적은 거 아니에요?”
“장소도 장소고, 상황이 그렇게 돼버렸네요. 다음 앨범에서는 더 자주 더 많이 뵐 수 있도록 할게요.”
세빈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폭 쉬면서 솜뭉치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고 투덜거렸고 나는 그런 세빈이를 달랬다.
“저희가 열심히 해야 솜뭉치들도 자주 만날 수 있겠죠?”
“우리 리더는 늘 이렇게 정론 적인 이야기만 하는데, 이게 사실이라 또 뭐라 할 수가 없어요.”
하준 형이 멤버들에게 더 열심히 연습하고 곡 쓰고 하라고 잔소리를 시작하자 세빈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찔리는 게 많았던 나는 더 이상 이야기가 길어지지 않도록 하준 형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우리 하준 형이 요새 스트레스가 많은지 잔소리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은 게 안타깝달까, 슬프달까.
얘가 원래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어요!”
“짜잔!”
힘찬이 테이블 아래 숨겨두었던 에코백을 꺼내며 카메라 앞에서 흔들었다.
“여러분, 이거 보여요? 저희도 굿즈란 게 생겼어요!”
“솜뭉치들이 좀 자세히 보게 가만히 있어 봐!”
“여러분, 지환이가 하나뿐인 친구를 이렇게 구박해요. 혼내주세요!”
“내 친구가 너 하나라는 건 어디서 나온 헛소문이야?”
물론 친구는 없었다.
이전 공지환의 협소한 인맥은 내가 이 몸을 차지하고 살아가면서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고, 이후에도 딱히 친구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전 지환의 친구들은 모두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니고 나 역시 그들이 알던 사람이 아니게 되어버려서.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연락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부터 들었다.
거기다 하루 종일 래블이들이랑 함께한 탓인지 내 형제와 친구 역할을 멤버들이 채워주고 있어서 부족함도 느끼지 못했다.
내 타박에 찬이가 우는 시늉을 하며 솜뭉치들에게 고자질했다. 물론 나는 그런 모습을 한껏 비웃어주며 에코백을 가지런히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에코팩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솜뭉치들이 어머, 이건 사야 해! 할 수 있도록 최대한 영업을 해야 했다.
회사에서도 어느 정도 돈이 돌아줘야 더 우리를 팍팍 밀어줄 테니까.
“여기에는 멤버들 모두의 사인이 적혀있네요. 그리고 이번 활동 때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질문해 준 가면이 배지로 달려있어요,”
에코백 한쪽 면에는 멤버들의 사인이 적혀있었고, 그 아래에는 애들이 그린 작은 그림들이 같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반대로 뒤집으면 ‘I'm OK’라는 문구만 단정한 폰트로 깔끔하게 적혀져 있었다.
“이렇게 반대로 보이게 매면 일코도 가능합니다!”
“일코가 뭐야?”
“그런 게 있어. 가서 용어 공부 더 하고 와.”
일반인 코스프레, 소위 일코라고 줄여서 말하는 단어를 모르는 힘찬에게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더니, 영빈 형이 웬일로 힘찬이에게 한마디 했다.
“형은 알아요? 나만 동네북이야, 아주.”
콩깍지가 씌인 건지 뚱한 표정으로 틱틱거리는 힘찬이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찬이 어깨를 토닥거려주며 에코백에서 잘 포장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등 뒤로 무어라 얘기하는 게 들렸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에코백에 붙어있는 배지는 솜뭉치를 위한 가면이고, 개별적으로 판매하는 이 세트가 저희 무대에서 쓴 가면을 배지로 만든 거래요.”
“어우, 근데 너무 이렇게 막 파는….”
“어허, 조용히 해. 매니저 형이 지켜보고 있어.”
물론 우진 형은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음껏 자기를 팔아먹으라는 무언의 허락이었다.
“열심히 홍보를 해야 솜뭉치들이 한번 보기라도 해줄 것 아냐.”
“안쓰럽다, 지환아….”
딱히 회사에서 우리에게 굿즈를 홍보하란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이 한 명 정도 있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자자, 여기서 다 보여드릴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굿즈도 있단 얘기죠?”
“저, 저 질문이 있어요!”
“네, 세빈 군. 말해보세요.”
“신청은 어떻게 하죠?”
힘차게 손까지 들고 말한 거에 비해서 너무 준비한 질문인 티가 났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귀여운 맛이 있어서 만족할 수 있었다.
“좋은 질문이네요. 저희 앨범을 한 장이라도 구매하셨고, 그걸 인증 가능한 분이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습니다!”
“단, 서울에서 참석하신 분이 부산에도 참석하시는 건 안 돼요! 신청은 한 사람당 한 번만 가능합니다.”
“저희 엄청 열심히 준비할 거니까 많이 많이 와주세요!”
어차피 글자로 된 자세한 공지가 이 영상이 올라가면서 공식 팬카페와 SNS에 등록될 거라 대략적인 구조만 설명을 해두었다.
홍보 영상이라고 했지만 사실 팬들에게 주는 서비스 영상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영상을 찍느라 고생해 준 회사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모두 전하고 나니 이렇게 또 하나를 해결했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왠지 우리 점점 카메라가 익숙해지는 것 같지 않아요?”
“맞아. 말실수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게 많이 없어졌어요.”
한결 보기 좋아진 얼굴. 이제는 촬영했던 영상이나 인터뷰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나눌 수 있을 정도까지 적응력이 생긴 건 좋은 일이었다.
멤버들이 원래도 실전에 더 강한 타입이긴 했지만 적어도 그 기준 선이라는 건 있어야 했으니까.
“자, 촬영 끝났으니까 이제 쉬었다가 OST 얘기하자.”
“벌써요?”
“계약은 거의 마무리 단계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오오….”
“에단 씨가 많이 도와주셨지.”
방금까지는 다 죽어가던 우진 형이 싱글벙글 웃는 모습에 잘 돼서 좋은가 보다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작업실에 그대로 잡혀서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쩔쩔맬 미래의 내 모습을 이때는 떠올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