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55)화 (55/456)

55. 어떻게 생각해?(1)

툭툭.

“응…?”

잠결에 누가 깨우는 것 같아서 부스스 일어나 고개를 돌려보니 포잉이 돌아와 있었다.

‘잘 다녀왔어?’

‘나보고 다녀오라고 하고 님은 잠이 옴?’

‘요새 잠이 모자라서 그래. 미안, 미안.’

‘어휴, 내 팔자야.’

불만스럽게 이불을 탁탁 내리치는 포잉을 품으로 끌어당겨 안은 나는 이제는 잠결에서도 자연스럽게 포잉을 쓰다듬었다.

더우면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나인데도, 사람보다 체온이 높은 포잉을 끌어안는 건 늘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들을 거임? 아니면 지금?’

‘지금 몇 시야?’

‘세 시 조금 넘음.’

‘그럼 조금만 더 자고 듣자.’

‘푹 자셈.’

‘포잉도 잘 자.’

동그랗고 부드러운 포잉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부터 자도 세 시간 자기 빠듯했다.

오늘 일정을 떠올려보니, 잠을 보충하는 게 더 이로울 것 같았다.

학교를 가야 했고, 다녀와서는 오늘 종일 회사에서 연습하고 곡을 써야 했다.

정말 깜박 잠든 것 같았다. 그런데도 학교 가려면 지금 눈떠서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침부터 내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포잉, 학교 같이 가. 학교에서 얘기해 줘.’

‘알았으니까 단추 다시 채우셈. 잘못 잠갔잖아.’

졸면서 셔츠 단추를 채웠더니 한 개씩 밀려있었다.

이대로 거실에 나갔으면 찬이가 엄청 비웃었겠네.

“차 조심하고. 잘 다녀와.”

“다녀오겠습니다….”

“좀 이따 봐요….”

영빈 형의 배웅 인사를 받으며 꾸벅꾸벅 조는 경환 형이, 찬이, 세빈이를 챙겨 오늘도 무사히 학교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가는 차에서는 내내 하준 형이랑 내 욕을 했다는 거지?’

‘거의 70%? 나머지 30%는 여자 얘기였음.’

‘그냥 욕만 한 거면 더 일찍 왔을 텐데.’

웬일로 포잉이 바로 얘기를 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책상에 엎어진 상태로 창가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는 포잉을 바라봤다.

창가 뒷자리라니. 완전 꿀.

햇빛을 받은 포잉의 털이 반짝거려서 정말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 같아 보였다.

‘대부분 역겨운 이야기들이었지만… 해산물 파티를 끌고 가던 놈이 그랬어. 한 번만 더 드나들다가 걸리면 너희는 끝이야라고.’

‘또?’

‘머리가 초록색이었던 놈이 망둥이한테 그러더라. 이사님한테 말 좀 잘해달라고? 망둥이가 너희를 엮어서 묻는다고 했지.’

졸음으로 가물가물했지만 그래도 대충은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데미갓의 이름을 들었을 때 왜 그렇게 익숙하고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내가 언래블 팬이 되기 전 온갖 추잡한 일을 다 하다가 걸려서 그대로 공중분해된 아이돌 그룹이 하나 있었다.

연예인들 사는 데 관심 없는 내가 알 정도로, 한동안 그 그룹에 관한 온갖 기사들을 검색 사이트에서 볼 수 있었다.

‘쟤네도 얼마 안 갈 애들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몇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어차피 데미갓에서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다른 거라 그냥 생각만 해두었다.

‘고마워, 포잉. 덕분에 큰 도움이 됐어.’

‘…넌 좀 자야겠다. 계약자야.’

원래 학교 다닐 때는 제법 성실한 학생으로 살았는데 이번 생은 그른 것 같아.

라고 포잉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졸음이 더 무거웠다.

* * *

“어떻게 하루 종일 자냐.”

“다 잔 건 아니라니까.”

“둘 다 하준 형한테 이를 거예요.”

툴툴대는 세빈의 머리를 헝클어주고 겨우 회사에 도착했더니 몸에 조금 활력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으, 삭신이야. 몸부터 풀어야겠다.”

“가끔 넌 진짜 노인네 같아.”

“그런가 보지.”

두 육체의 나이를 합치면 50이 좀 안될 테니까 어쩌면 틀린 말이 아닐지도.

내심 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축 처져있던 몸을 움직였다.

이런 게 직업병 같은 건가?

최근에 아무리 피곤해도 회사에 도착하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게 되는 내 몸뚱이를 보고 있자니 늘 일에 찌들어 있던 누나가 떠올랐다.

확실히 학교에서 잠만 잔 건 아니었다.

포잉을 통해 전해 들은 데미갓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처음에 주어졌던 스킬들과 스탯을 다시 살폈다.

무사이(Muses) 미팅 날 겪었던 일을 다시 겪지 않으려면 필요한 일이었다.

그동안 데뷔한다고 혹사당한 덕인지 다행히도 레벨도 오르고 스탯도 찔끔찔끔 올라있었다.

시스템에 대한 설명은 언제나 너무 제 맘대로라 하나씩 테스트해보면서 익힐 수밖에 없었지만.

1. 너의 목소리가 들려 스킬은 상대방의 본명을 인지하고 있어야 사용 가능하다.

따라서 내가 앞으로 방송에 출연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전에 출연진과 제작진의 이름을 최대한 외워야 실시간으로 쓸 수 있었다.

현재 한 번에 속마음을 볼 수 있는 상대방은 10명이었다.

하지만 3명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내가 헷갈리기 시작해서, 그 이상은 힘들 듯했다. 처음부터 느낀 거지만 억양이나 느낌이 들어가지 않다 보니 호불호의 판단이 불분명했다.

2. 내적 친분 스킬의 효과가 좋아지려면 내가 그 사람을 최대한 자주 보고 자주 말을 나눠야 한다.

스킬이 걸려있다고 해도 전폭적인 신뢰 관계 구축은 어려웠다.

당장 푸른 음악 노트의 PD에게도 걸어봤었지만 큰 효과를 내지는 못했다.

차라리 고정 프로가 생기거나 자주 볼 수 있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쓰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그리고 그놈의 신뢰도라는 게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상대방에게서만 확인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한 번이라도 상대방에게 스킬을 적용했었다면 꾸준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유동적인 지표였다.

세빈이를 대상으로 스킬을 적용했다가 해제하고 신뢰도를 몇 번 확인해봤는데, 아침에는 62였다가 저녁에 숙소에서는 78이라는 숫자를 보였었다.

3. 죽기 살기 특성은 정신적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

조금 더 멘탈이 단단해지고 모든 상황을 더 잘 버티게 해준다고 할까.

무슨 전설의 용사처럼 차를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힘이 강해지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끈질겨지는 그런 스킬이었는데… 그렇게 한계치를 오래 넘기다 보면 나중엔 내가 재가 되는 느낌이었다.

다 타고 불씨도 사라진, 아무것도 아닌, 바람이 불면 흩어질 재.

4. 반면에 독종 스킬은 버티는 느낌보다는 강화되는 느낌이었다.

이 스킬은 도통 감이 잘 잡히지 않아서 앞으로 더 데이터를 쌓아야 했다.

다만, 죽기 살기 스킬이랑 비슷한 느낌이라 포잉이랑 대화를 나누면서 약간 현타 아닌 현타가 오기도 했었다.

나에게 주어진 특성이라는 것들이 내 원래 성향을 기반으로 생긴 거고, 스킬은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들로 주어진 거라 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내 덕질에 기반한 건가 싶다. 하지만, 죽기 살기는 악착같이 무언가에 매달리거나 덤비는 느낌인데.

무기력과 게으름의 대명사였던 내가?

역시 요정족의 생각 범위는 인간의 이해 범위와 다른 것 같다며 둘 다 혀를 차고 끝냈었다.

이제 더 많은 활동들을 할 수 있을 테니 무사이(Muses) 미팅 때처럼 필요한 순간에 못 쓰고 넘어가지 않도록 이 능력들을 잘 활용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던 중 사실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조력은 포잉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자기 털이나 고르고 있지만!

“다시 시작하자.”

“네!”

포잉은 팔자 좋게 누워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고, 나와 멤버들은 하연수 선배님의 지휘 아래 이번 주 주말에 있을 콘서트의 막바지 연습 중이었다.

“허엌…!”

“이상한 소리 좀 내지 마….”

연습실 바닥에 철퍼덕 엎어진 힘찬의 괴상한 소리에 멤버들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죽… 여 줘.”

“얘 요새 뭐 이상한 거 봐?”

“최근에 무슨 좀비물 보는데 빠졌다고 들었어요.”

“아…. 가영 형이랑 잘 어울리겠구나, 힘찬아.”

혼자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리며 죽여달라는 힘찬을 영빈 형이 깔고 앉아버렸다.

“그래, 죽어라. 죽어.”

“악! 형! 무거워!”

영빈 형도 점점 많은 걸 내려놓는 것 같아서 이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괜찮아, 영빈아. 나는 다 이해한다….

나 같아도 듀엣 파트 틀려서 같은 파트만 30번 하면 열 받지, 암.

“팀장님이 저녁 먹고 모이래.”

“왜요? 뭐 좋은 소식 있나?”

“그건 모르겠고, 오늘 숙소에서 GIVE 앱 촬영하기로 한 거 기억하지?”

“부디 우리 인간 같은 모습들을 솜뭉치들에게 보여주자. 얘들아.”

하준 형의 전달사항을 들은 경환 형이 의아한 눈을 했고, 이어진 발언에 몇 명의 멤버들 몸이 굳었다.

한숨 섞인 내 발언에 영빈 형 밑에서 버둥거리던 힘찬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나는 잘 쌓아놨는데… 세빈이가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갔어.”

“그냥 쌓아서 탑을 만들어놨으니까 그러죠. 옷도 많으면서 정리를 안 하니까 맨날 그 방이 지옥 같잖아요. 솜뭉치들이 보면 형 더럽다고 실망할 거야.”

점점 세빈이가 팩트 폭력기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서글픈 마음이 일었지만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나도 정리 정돈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힘찬이는 특히 심했다.

물건을 정리하라고 주면 그냥 하나의 탑 무더기를 만들어버려서 비어있는 침대 위에는 언제나 힘찬이 만든 탑들이 쌓여있었다.

“우리 나중에 잘 돼서 이사 가면 꼭 수납공간 많았으면 좋겠다….”

“나는 수납공간 많이 없어도 2인 1실이라도 썼으면 좋겠어.”

적당히 몸을 식힌 우리는 터덜터덜 식당을 향해 걸었고, 맛없는 것들로 허기만 가시게 하고 다시 회의실로 올라왔다.

“어서 와, 얘들아.”

다행히 오늘 팀장님은 공양미를 내놓으라는 얼굴은 아니었다.

“늦었지만 팬 사인회를 하기로 했어.”

“네?”

“활동 끝나는데요?”

하준 형과 영빈 형이 의아한 얼굴로 소현 팀장님을 바라보자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회사 기대보다 더 많은 팬들이 모여서, 다음 앨범 시작 전에는 정식 팬클럽 창단도 진행할 거야. 다만 이번 활동이 이대로 마무리되면 결속력이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했어. 그래서 앨범을 한 장이라도 구매했고 인증 가능하다면 응모할 수 있는 팬 사인회를 열 거야. 총 100좌석이고 서울이랑 부산에서 진행할 예정이야. 중복 응모는 불가능하고, 추첨제로.”

“와…. 솜뭉치들은 좋아하겠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손해 아니에요?”

나도, 언래블도 꿈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아직 많이 힘들었다.

절대적인 애정을 보이며 환호하는 그 무대를 한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 애정을 받는 우리는 좋지만 회사는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앨범을 여러 버전으로 팔고 포토 카드를 멤버별로 나눠서 넣고, 굿즈를 팔고 행사를 뛰는 거지.

이번 팬 사인회로 회사가 이득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관하고 행사를 준비하고 스탭들이 움직일 테니 인건비가 든다.

그런데 왜?

“미래를 위한 투자이기도 하고, 간단하게 몇 가지 테스트를 겸해서 굿즈를 팔 거야. 뭐, 여러 안건을 회의 중이긴 한데 너희도 대비해야 하니 미리 말해두는 거야. 하고 싶어 했잖아, 팬 사인회.”

“감사합니다….”

기분이 많이 이상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기뻐 날뛰기 보다는 어색해하고 있었다.

심지어 힘찬이마저 좋은데 마냥 좋다고 말하지 못하고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세빈이만 이런 형들의 모습이 낯선지 고개를 기울이고 우리를 하나하나 보고 있었다.

ON 엔터가 괜찮은 회사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회사다.

회사의 목적은 이윤추구.

당연히 모든 것들이 그것을 위해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은연중에 소현 팀장님도, 정윤 실장님도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경계하면서 지냈었다.

하지만 이들이 생각보다 단순히 팬이었던 내 생각보다 더 멀리 더 많은 것들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말뿐일지도 모르지만, 앨범 작업이 아닌 팬 관련 행사에도 우리 의견을 고려해 주고 있다는 거니까.

그리고 이제는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예전에 내가 앨범을 38장 사고도 못 간 팬 사인회를 덕질 메이트가 4장 사고 당첨됐다는 사실에 배가 아파서 죽을뻔했었다.

심지어 남아도는 앨범은 주변 지인들에게 다 주지도 못하고 내 굿즈 박스 중 하나에 고이 잠들었다.

그랬던 내가 이젠 가수의 입장에서 팬 사인회를 하고 싶어하고, 솜뭉치들을 더 많이 보고 싶어 하다니.

아무래도 아이돌이라는 이 직업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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