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그리고 그 후(5)
하준과 짧은 이야기를 나눈 뒤 복잡해진 머리로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 바닥에는 멤버들이 저번처럼 푹 퍼져서 늘어져 있었고, 심지어 얼굴도 다들 가관이어서,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보니까 팅팅 부어서 되게 못생겼네.”
“니가 할 말이냐?”
붕어가 와서 형님 하게 생긴 얼굴로 힘찬이가 중얼거리자, 그나마 시원한 바닥에 얼굴을 대고 있던 경환이 대꾸했다.
“내 생각엔 둘은 아마 안될 것 같아…. 저건 천성이야.”
그 와중에도 투닥거리는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평소라면 2차전이 바로 벌어졌을 상황인데 오늘은 기운이 없어서 그런 건지 혼이 나서 그런 건지 얌전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터덜터덜 영빈의 곁으로 다가가니 새끼 여우같이 귀엽고 예쁘던 우리 세빈이 얼굴도 말이 아니었다.
“내 새끼, 얼굴이 이게 뭐야.”
“혀엉….”
“에휴, 네가 모자란 형들 때문에 고생이 많다.”
꾸물거리며 옆에 와서 찰싹 달라붙어 있는 막둥이가 안쓰럽고 예뻐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세빈이 내 손을 가져다 자기 눈 위에 얹었다.
“형 손이 차서 시원해요.”
“손발 찬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네.”
내 손이 차다는 말에 옆에 있던 영빈이 남은 손을 가져가 자기 이마에 얹어서 졸지에 아이스팩이 돼버린 나는 피식거리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래…. 팀장님한테 많이 혼났어요?”
“조금?”
“형 얼굴 보니까 조금 아니구만, 뭐.”
안 그래도 하얘서 밀가루 반죽 같았던 영빈의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지만,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바닥에 뺨을 대고 있던 힘찬이 일어나 앉았다.
“지환아, 진짜 내가 미안해. 밖에서는 사고 안 치게 매일매일 조심할게.”
“나도 미안해. 그냥 한 번 참고 넘어갔으면 될 일을.”
“어허, 그만. 둘 다 됐어요. 내가 무식하게 달려들어서 머리 박은 건데 뭐. 나도 앞으로 더 몸조심할게요.”
눈물 때문에 다 튼 힘찬의 얼굴이 참…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안쓰러워 보였다.
우리가 너무 들뜨긴 했었나 보다.
처음에 명준의 얼굴을 봤을 때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는데, 그 짧은 사이에 평소 모습이 나와버리다니.
“선배님한테 아직 연락 안 했지?”
“누구? 하겸 선배님?”
“네. 제가 연락드릴게요.”
“근데 하겸 선배님이라고 해야 돼, 아니면 명준 선배님이라고 해야 돼?”
“음, 라디오에서나 따로 뵐 때는 명준 선배님이라고 하고, 음방에서는 하겸 선배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름을 어떻게 저장해야 할지 고민하는 힘찬에게 적당히 대꾸해 주며, 세빈과 영빈에게 넘겨줬던 손을 슬쩍 빼서 핸드폰을 꺼냈다.
방금 전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있었는데 찬이가 물어보니까 갑자기 나도 호칭이 고민되기 시작했다.
본명과 예명이 다른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이름 하나부터 참 쉬운 게 없다.
영빈이 내 손을 아쉽다는 듯 쳐다봤지만 애써 모른 척하면서 냥톡을 열었다.
명준의 번호를 저장해 놨으니 냥톡에도 자동으로 친구 등록되어 있을 터.
[선배님, 저 지환이예요.]
보낸 메시지의 숫자 1이 바로 사라져서 어라? 하는 사이 바로 답장이 왔다.
하겸 선배님 [지환아, 너 괜찮아? 병원에서 뭐ㄹ]
[네네. 병원에서 안 꿰매도 될만한 상처라고 소독만 잘해주면 된대요.]
하겸 선배님 [아이고… 십 년 감수했네 큰 상처 아니라서 다행이다.]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다음부터는 더 조심하겠습니다.]
하겸 선배님 [다음부터는 뛰어들지 마 이눔 자식!]
[넵 ㅠㅠ….]
하겸 선배님 [팀장님한테 엄청 깨졌지? 그거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니까 애들한테 너무 서운해 말라고 전해줘 소현 팀장님 원래 엄한 만큼 유능하기로 유명한 분이야]
[네, 저희가 잘못한 거니까….]
하겸 선배님 [그래도 크게 안 다쳤다니 다행이지 뭐 푹 쉬어!]
명준은 마침표 따위는 쿨하게 생략하는 선배님이었다.
물음표는 생략 안 했으면 좋겠다….
진동으로 해둔 핸드폰이 연신 진동으로 웅웅거리자 다른 멤버들이 죄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내 손만 보고 있었다.
“선배님이 소현 팀장님 말 잘 들으래요.”
“끄응…. 그래야지.”
“근데 우리 팀장님이 유명한 분이었어? 하겸 선배님이 우리 팀장님을 어떻게 알지.”
두런두런 이어지던 대화는 도어락 소리와 함께 하준이 들어오면서 잠시 멈췄다.
“형 왔다. 사고뭉치들아.”
“와! 형, 먹을 거야?”
우리의 최힘찬은 아까까진 하준 옷에 눈물, 콧물 다 묻혀가면서 엉엉 울더니 지금은 또 살아나서 편의점 봉투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어이없었던 건 나뿐만이 아닌지 하준도 영빈도 심지어 세빈이도 그런 힘찬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회복이 참 빨라, 우리 힘찬이.”
“헤헤, 그게 제 유일한 장점이잖아요.”
넉살 좋고 회복 빠르고 춤도 잘 추는데 눈치는 조금 부족한 우리 힘찬이.
쟤를 어쩌면 좋지 싶어서 한숨을 푹 내쉬는 하준의 모습에 절로 리더의 애환이 느껴졌다.
“일단 먹자. 팀장님한테 허락받았어. 우리 저녁도 못 먹었잖아.”
“우와….”
“이거 형이 산 거예요?”
“어. 우리가 오늘 무슨 염치로 밥 사달라고 하냐.”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뱉으면서 간편 조리 식품을 꺼내는 하준의 옆에 힘찬이 달라붙어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넣고 있었다.
“형이 무슨 돈이 있다고.”
“너보단 많으니까 먹기나 해. 피도 그만큼 흘렸으면 보충을 해줘야지.”
거실 한가운데 상을 펼치고 도시락과 컵밥, 소시지를 올려놓자 상이 꽉 찼다.
“아, 여기에 라면 국물까지 있으면 딱인데….”
“내일 아침에 얼굴 띵띵 부어서 또 혼나려고?”
“그냥 먹고 싶다~! 그거죠.”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세빈에게 영빈이 한마디 하고, 경환은 젓가락을 챙겨서 들고 왔다.
이제는 알아서 각자 할 일을 찾아 움직이고 준비하는 멤버들 모습이 기특하기까지 했다.
“오늘 우리 참리더 하준 씨가 주머니 털었으니까 다들 박수 쳐줍시다!”
“와아!”
“짝짝짝!”
하루 종일 이리저리 치이느라 제일 고생한 하준에게 멤버들이 박수 치면서 호들갑 떨었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얼굴과 달리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먹자.”
“네!”
신나게 먹기 바쁜 멤버들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음식 앞에서 평등한 내 새끼들 같으니라고.
순식간에 폭풍 같은 식사가 끝나고 주섬주섬 상을 치우는 내 옆으로 힘찬이 슬쩍 다가왔다.
“지환아.”
“어?”
“혹시라도 흉터 생기면 내가 꼭 돈 벌어서 흉터 제거 수술 받게 해줄게.”
“병원서 흉터 안 남는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슬금슬금 오길래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러나 했더니 다친 게 계속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다가도 한 번씩 보여주는 이런 모습이 기특해서 얄미워할 수가 없었다.
“가서 빨리 씻고 잠이나 자. 우리 학교 가야 되잖아.”
“아, 맞네. 아, 학교 가기 싫다….”
“학교 얘기하지 않기!”
“겨우 잊고 있었는데.”
이미 자정은 훌쩍 넘긴 시간이어서 아직 미성년자인 3명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하나둘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빈이부터 씻어. 아침에 제일 못 일어나잖아.”
“잘 일어날 수 있는데….”
“됐고, 얼른 안 씻어?”
평소에 제일 못 일어나는 순서로 씻는 순서까지 정해준 하준은 방에서 노트북을 꺼내와 상에 올렸다.
“형은 안 자요?”
“응. 가사 쓰던 거 조금만 만지고 자려고.”
“형도 너무 늦지 않게 자요.”
“오냐.”
하준과 영빈이 팀의 중심을 잡아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오늘 다시 한번 들었다.
자신들도 많이 지쳤을 텐데 그 와중에 멤버들 먹을 걸 챙기고 정신적으로 지쳤을 애들을 다독여주고.
맏형들이 없었다면 이 사고뭉치들이 데뷔할 수는 있었을까 싶었다.
하나씩 다들 자기 자리를 찾아가 눕고 나도 내 자리에 눕자 어디 있다가 온 건지 포잉이 폴짝 올라와 익숙하게 내 팔을 베고 누웠다.
‘오늘도 그 스킬인가 뭔가 배우고 온 거야?’
‘오냐.’
‘난 오늘 하루 아주 난리였어.’
‘그 난리 때문에 이마 깨 먹음?’
‘깨 먹은 게 아니라 살짝 까진 거야.’
‘퍽이나.’
내 요정님은 내 말에 대한 신뢰도가 아무래도 저 바닥끝에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임? 말해봐. 들어주겠음.’
아무래도 상처가 신경 쓰였는지 이불 위로 포잉의 꼬리가 휙휙 움직였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님은 봐줄 만한 게 얼굴밖에 없는데 그 얼굴 간수도 못 하고 잘하는 짓이다.’
‘헐. 얼굴밖에 봐줄 만한 게 없다니, 너무하네.’
늘 나에게만 매정한 포잉은 오늘 라디오 촬영하러 갔다가 있었던 일을 잠자고 듣더니 기어코 솜방망이로 내 팔뚝을 때렸다.
‘운동 신경도! 쥐뿔도 없으면서! 님 미침?’
‘아야, 그만 때려!’
‘정신 차릴 때까지 맞아야지!’
사실 솜방망이 같은 앞발이라 때리는 건 하나도 안 아팠지만, 화가 많이 난 것 같아 분이 풀릴 때까지 실컷 내 팔뚝을 치게 놔뒀다.
‘앞으로 조심할게. 화 풀어, 응?’
‘아주! 내가 눈만 떼면!’
노여워하는 작은 요정님의 화를 달래기 위해 열심히 쓰다듬고 궁둥이도 토닥거렸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진짜 츄르라도 사다 놔야 하나.
‘그 교육은 언제까지 받으러 가야 해?’
‘곧 끝남. 님이 그때 랜덤만 안 골랐어도 우리가 이 고생을 안 할 텐데!’
꿈인 줄 알고 그 중요한 순간에 랜덤을 고른 이전의 나를 나도 매우 치고 싶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인 걸 어떻게 할 수 없지 않은가.
2차 분노까지 잘 달랜 나는 꾸물거리는 포잉의 살짝 굽은 등에 뺨을 기댔다.
‘있잖아, 포잉.’
‘말하셈.’
‘우진이 형, 그러니까 매니저 형이랑 준이 형이 나한테 왜 자꾸 서포터처럼 구냐고 했어.’
‘서포터?’
‘응. 나는 언래블의 멤버가 아닌 것처럼 내 몫을 챙기려고 들지 않는다고. 근데 난 그냥 언래블이 잘되면 내가 못 가져도 된다고 생각했거든. 이게 잘못된 걸까?’
그때까지 등을 돌리고 있던 포잉이 휙 몸을 돌려 나와 눈을 마주하고 누웠다.
‘님이 아직 지금 삶을 자기 삶으로 여기지 못해서 그럴 수 있음.’
‘난 내 삶이라고 여기는데?’
‘그냥 살아지니까 사는 거 말고여, 님아.’
‘응?’
‘님, 나중에 언래블이 진짜 엄청 떠서 성공했다 치자. 그럼 님은 뭐 할 거임?’
‘어… 글쎄? 잘 모르겠어.’
‘지금 님 하는 꼴을 봐서는 언래블을 성공시킨다는 목표가 달성되면 그냥 죽어도 그만인 인간 같음.’
‘엑? 그 정도는 아냐.’
늘 불퉁한 얼굴이던 포잉이 오늘은 말간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언래블의 성공과 님의 삶을 너무 동일시하지 말라는 말임. 행복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라고 기회가 주어진 거지, 어떤 미션을 달성해놓으라고 이 삶이 주어진 게 아님.’
포잉의 말을 듣다 보니 무언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삶에서 하고 싶은 건 언래블의 성공을 돕는 거라 생각했는데, 포잉의 말을 듣고 나니 그걸로는 부족한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포잉이 보기에는 내가 지금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것 같다는 거지?’
‘아주 바보는 아니라 다행이네.’
그제야 말갛기만 하던 포잉의 눈동자 안에 푸른 밤하늘이 떠올랐다.
‘빨리 교육 끝내고 나랑 계속 같이 있자, 요정님아.’
‘귀찮게 들러붙지 마셈!’
‘내가 사고 안 치게 감시해야지.’
‘안 보고 있어도 사고는 안 쳐야지!’
어째서인지 이제 겨우 첫 번째 계단을 단단히 밟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 포잉이 같이 있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