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리고 그 후(4)
방음 부스를 나온 우리는 냉기가 풀풀 날리는 팀장님과 마주쳤다.
아까 매니저 형이 전화로 팀장님께 보고한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오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오자마자 PD님, 작가님들, 스탭분들에게 연신 허리를 굽혀 사과한 팀장님은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만큼 나와 멤버들의 어깨는 점점 작아져 갔다.
“지환이 너는 우진이랑 응급실 들렀다 숙소로 가.”
“네….”
차마 아까처럼 괜찮다느니 하는 말은 꺼낼 수도 없는 분위기였고 치료도 받아야 했기에 얌전히 매니저 형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응급실에서는 꿰매지 않아도 되는 상처라는 말과 함께 약을 한 봉지 챙겨주었다.
“저기, 우진이 형.”
“어?”
“팀장님 많이 화나셨어요…?”
머뭇거리는 내 질문에 치료받는 내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던 매니저 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있잖아, 지환아.”
“네, 형.”
“너는 널 뭐라고 생각하냐.”
“네?”
매니저 형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형을 바라봤고, 곧 형의 손에 이끌려 병원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봐봐. 네가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치자.”
“네.”
“근데 네가 다른 애들을 챙기는 사이에 3살짜리 애기가 동전을 삼키려고 하니까, 5살짜리가 말린다고 그걸 덥석 삼켰어. 그러다 그 애기가 호흡 곤란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네? 다행히 응급처치도 잘 됐고 아이도 무사해. 그러면 그게 아무 문제 없는 일이야?”
“어…. 그래도 위험하죠.”
평소와 달리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 매니저 형의 얼굴이 조금 낯설어서 자꾸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게 됐다.
“지환아, 우리는 너희를 지키고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야. 물론 못 미더울 수도 있고 돈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그래도 회사는 너희를 최대한 안전하게 성공하도록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적어도 나나 팀장님은 그렇게 생각해.”
이야기를 얌전히 듣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아까까지는 아프지 않았던 상처가 콕콕 쑤셔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기가 파손되면 내가 가서 빌고 사과하고 피해만큼 회사가 물어주면 돼. 물론 그 일을 벌인 사람들은 그만큼 혼날 테고. 어쩌면 그 사람의 정산은 더 늦어질 수도 있겠지.”
늘 웃으면서 같이 장난치고 유한 모습을 보여주던 매니저 형이 이런 이야기를 해서일까. 어째서인지 죄책감 같은 게 들었다.
더군다나 예상과 달리 비즈니스적인 상황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뢰와 보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더더욱 이 상황이 낯설었다.
“그래도 사람이 다치는 것보다는 기계가 부서지는 게 나아. 네가 교통사고 때 크게 다치지 않아서 별거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제일 무서운 거야. 아직도 나는 그날만 떠올리면 아찔하고 식은땀이 절로 난다. 그런데 네가 이렇게 다치고 오면 네 누님께서 회사를 믿을 수 있을까?”
“아….”
그저 언래블이 잘 되기만 하면 다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어딘가 이상한 건가?
“팀을 위하는 건 좋은데, 그 팀에 너도 속해있다는 걸 잊지 말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끝난 매니저 형, 아니 우진 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네가 조금 더 이기적이었으면 좋겠다. 네 몸 아까워서 사리고, 건강하려고 몸에 좋은 거 다 챙겨 먹고. 형은 진짜 네가 그랬으면 좋겠다.”
“저 아픈 거 진짜 싫어해요, 형.”
“말이나 못 하면.”
“근데 아까는 정말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 나간 거라… 하하. 죄송해요, 형. 진짜 앞으로는 몸 잘 챙길게요.”
한숨을 푹 내쉰 우진 형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목마르지 않냐고 물으며 자판기에서 콜라를 한 캔 뽑아주었다.
피도 좀 흘렸으니 당분과 수분을 보충해 줘야 한다는 이상한 이유를 대면서.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숙소에 돌아가면 포잉에게 지금 내 상태에 관해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한텐 내가 콜라 사준 거 비밀이다. 들키면 나 진짜 혼나.”
“헤헤, 그럼요! 하…. 콜라가 이렇게 맛있는 거였네요.”
복잡해지는 머릿속과 별개로 우진 형이 뽑아준 콜라는 여태까지 내가 먹었던 어떤 콜라보다 더 맛있었다.
* * *
지환이 응급실에서 치료받고 있던 그 시간, 회사 회의실로 불려간 5명의 멤버들은 얼마 후 자신들에게 닥쳐올 상황을 떠올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네 미쳤니?”
회의실로 들어서자마자 조용히 묻는 소현 팀장의 목소리는 낯설게 느껴질 만큼 차가웠다.
“죄송합니다….”
“민하준, 넌 멤버 관리 이렇게 할 거야? 방송이 장난이야?”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입술을 꾹 깨문 하준이 고개를 푹 숙이며 잘못을 빌어보았지만, 소현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김영빈, 하준이 없으면 누가 애들 챙겨야 되는지 몰라?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하준이 부재일 땐 네가 애들 챙겨야 한다고. 맏형들이 얼마나 만만하면 어제 데뷔한 애들이 거기서 자기 집 안방처럼 굴까.”
“잘못했습니다. 더 신경 쓰겠습니다.”
“사고 치고 나서 신경 쓸 거면 뭐 하러 신경 써. 그 사고 치지 말라고 너희한테 따로 얘기한 거잖아.”
맏형들에게 쏟아지는 매서운 말에 이 사고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두 사람의 얼굴도 점점 더 창백해져 갔다.
첫 방송이라고 긴장해서 찾아간 방송국이었다.
방송국 직원들도, 한참 선배인 명준도 생각보다 잘해주니 자기들도 모르게 평소처럼 행동했고 그 결과 이 사달이 벌어졌다.
“제가 잘못했어요. 팀장님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누가 너희보고 말하라고 했어.”
겨우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짜내서 소현에게 잘못했다고 빌어봤지만 돌아온 건 더 날카로운 말뿐이었다.
“회사에서 너희한테 스케줄을 안 잡아줬니, 아니면 이미지 말아먹는 예능에 나가라고 했니? 너희 띄워보겠다고 야근하고 뛰어다니는 회사 사람들이 우스워? 쇼케이스에 사람들 좀 오니까 너네 좀 뜬 거 같아?”
소현은 소현 나름대로 더 심한 말이 나올 것 같아 이를 악물고 멤버들에게 현실을 알려주려 애쓰고 있었다.
“거기 사람들이 그냥 웃어주니까 뒤에서 아무 말 안 할 것 같지? 이 바닥에서 제일 무서운 게 스탭 사이에 도는 소문이야. 음방도 아직 못 서본 신인 애들이 라디오에서 까불거리더라. 이거 소문나면 누가 너희를 불러줄까, 응? 라디오뿐만 아니라 음방이고 예능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할 수도 있다고. 방송 못 나가면 너희 뭐 할 거니? 너네는 지방 작은 축제 행사에서도 안 불러줘. 인지도고 뭐고 지금은 쥐뿔도 없으니까.”
마음 약한 세빈은 벌써부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고 힘찬의 눈도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최힘찬, 백경환. 너희 멋대로 하고 싶고 만사가 아니꼬우면 나가. 내가 대표님한테 말해서 계약 파기해달라고 할 테니까. 민하준, 김영빈 너희도 마찬가지야. 팀원들 제대로 책임질 자신 없으면 말해.”
“팀장님!”
각오했던 것보다 더 가차 없는 말에 입술만 깨물고 있던 하준이 소현에게 비명처럼 외쳤지만, 소현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생각 없는 행동이 어떤 결과까지 가져올 수 있는지 알게 된 경환과 힘찬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앞으로 절대 멋대로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팀장님…. 팀에 폐 끼치지 않을게요.”
그런 그들 옆으로 다른 멤버들도 전부 무릎 꿇고 앉아 소현에게 잘못했다고 빌었다.
“제가 더 잘할게요. 애들 잘 챙기겠습니다.”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없도록 단속하겠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물론 이 일로 회사 차원에서 당장 계약을 해지하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소현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이 아이들의 철없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제대로 깨닫길 바랐다.
좋게 넘어가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지환도 크게 다치지 않았고, PD도 김우빈 문제로 의논하느라 부스 안을 체크 못 했다고 되려 지환을 걱정했다고 했다.
하지만 앞에서 웃고 뒤에서 욕하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고, 특히나 이 바닥은 웃으면서 칼 꽂아주면 차라리 다행인 일마저 비일비재했다.
“민하준만 남고 나머진 숙소 가서 대기해.”
“네….”
불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 멤버들이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며 하준과 소현을 바라봤지만, 끝내 인솔하러 온 다른 직원의 손에 이끌려 모두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조용해진 회의실 안에서 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현이 물었다.
“억울하니?”
“아뇨. 제가 잘 챙겼어야 하는 게 맞죠….”
“억울해도 어쩔 수 없어. 네가 리더니까.”
“네.”
“한참 혈기 왕성한 애들을 모아놓고 통제하는 게 쉽지 않은 건 알겠어. 그래도 이건 아니야.”
“팀장님, 제가 잘 타이를게요. 진짜 한 번만 봐주세요.”
혹시라도 소현의 입에서 다른 멤버들의 제명이 나올까 불안해진 하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히 말했다.
“네가 책임질 수 있어? 애들 통제할 자신 없으면 말해. 지금부터라도 회사에서 너희 관리할 테니까.”
“잘할 수 있습니다. 한 번만 더 믿어주세요.”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하준의 모습에 소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이야. 두 번은 없어.”
“네. 단단히 주의 주고 더 많이 신경 쓰겠습니다.”
“하준아, ON 엔터가 다른 곳보다 훨씬 자유롭다는 거 알지?”
“…네.”
“자유를 준다는 건 그만큼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라는 얘기야. 아티스트는 아티스트로서의 책임을, 회사는 회사로서의 책임을.”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소현과의 대화가 끝난 후 진이 다 빠진 하준은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풍경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거실 한복판에서 동생들이 영빈과 지환을 붙잡고 눈물, 콧물 다 쏟으면서 미안하다 잘못했다 하고 빌고 있었다.
그리고 하준이 숙소 안으로 들어오자, 힘찬이 달려와 하준을 끌어안고 다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힉, 혀엉… 제가, 히끅! 잘못했어요.”
얼마나 울고 있었던 건지 딸꾹질하느라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계속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하는 동생 놈의 몰골에 할 말을 잃었다.
“…우리 진짜 정신 차리자.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어야 된다.”
모든 멤버들이 안정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당장 내일 스케줄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되나….”
“우리 막내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형들 때문에 혼났네.”
“아니에요….”
퉁퉁 눈이 부어있는 세빈의 모습에 지환이 안쓰러운 듯 바라보더니 어깨를 토닥여주었고, 영빈은 조용히 일어나 얼음을 얼리고 수저를 냉동실에 넣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준이 없는 동안 영빈과 세빈에게 경환과 힘찬이 계속 사과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지환이 돌아오자 세빈이 이마에 붙은 거즈를 보고 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힘찬이 미안하다고 울고, 경환은 자기가 너무 철없이 굴었다고 울고.
지쳤는지 축 늘어진 멤버들을 바라보던 하준은 멤버들에게 잠시 쉬고 있으라고 말을 한 후 지환을 데리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지환아, 아까 형이 뭐라고 해서 서운했지?”
무슨 얘기를 들을지 몰라 눈치를 보던 지환은 하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형도 엄청 놀랬잖아요. 걱정해서 그랬다는 거 알아요. 괜찮아요.”
“응. 진짜 놀랬어. 그런데 난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다시 너한테 잔소리할 것 같다.”
씁쓸한 미소를 짓고 지환을 바라보던 하준은 자신보다 조금 작은 지환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팀을 생각하는 마음도 좋은데, 무모한 행동 안 했으면 좋겠어. 막말로 네가 크게 다치면 팀이고 나발이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하,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눈동자를 굴리는 지환의 모습에서 하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사고 이후에 적극적으로 애들이랑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뭐든지 팀 우선으로 해줘서 너무 고마운데, 그렇다고 너를 희생해서 무언가를 하려고는 않았으면 좋겠다.”
“네?”
“최종 평가 때도 그렇고 그 후로 연습할 때, 회의할 때 전부 다 다른 애들한테 양보하고 자꾸 너는 뒤로 빠지려고 했잖아.”
“어… 제가요?”
“어. 가끔 널 보면 너도 같은 팀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아. 뭐라고 해야 하지? 서포터? 널 좀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의도치 않게 짧은 시간 동안 매니저와 리더 둘에게 비슷한 얘기를 들은 지환은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보였다는 사실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힘찬을 언래블의 멤버에서 제외하고 봤던 그때처럼, 자기 자신 역시 그렇게 여기고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6명이 전부 똘똘 뭉쳐서 앞으로 더 잘하자. 그러니까 너도 너 자신을 조금 더 소중히 해줬으면 좋겠어.”
“넵….”
* * *
심각해진 지환의 표정에 달래듯 어깨를 두드려준 하준은 그를 먼저 숙소로 들여보내고 가까운 편의점을 찾았다.
미리 팀장님에게 허락을 받은 터라 혼나진 않을 테니,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겪은 동생들에게 맛있는 걸 먹여주고 싶었다.
멤버들 모두에게 어떤 의미로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다사다난 했던 하루가 겨우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