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2)화 (42/456)

42. 그리고 그 후(3)

“하하, 왜 그거 있잖아. 할머니들이 손주 오면 왜 이렇게 말랐냐고,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끊임없이 먹을 걸 주시잖아. 먹는 거 보면 되게 흐뭇한 표정 지으시고.”

“맞아요!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놀러 가면 살이 쪄서 오는 그런….”

“언래블은 아직 팬 미팅 안 해봤을 테니까 모를 수도 있는데, 팬 미팅이나 팬싸 때 짧게 토크 하거나 게임 같은 거 하면 팬분들이 저렇게 흐뭇한 표정으로 웃고 계시거든.”

빙고.

역시 경력자라 팬 마음을 이렇게 잘 알아차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사고 난 후 이런 저런 생각 많이 했다고 했잖아요? 사실 그전까진 멤버들에게 잘 못 다가가고 내외를 오래 했어요. 같이 연습하던 연습생은 자꾸 바뀌지, 데뷔는 기약이 없지. 그러다 보니까 정을 안 주는 게 맘 편해졌다고 해야 하나?”

이건 내가 아닌 어린 공지환이 생각했던 내용이기도 했다.

부푼 꿈을 안고 연습생 계약을 했는데, 막상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걸 깨달은 그가.

“그 와중에 데뷔는 날아가게 생겼지, 나 말고 다른 멤버들은 전부 더 높이 올라가는 것 같지, 감정이 매일매일 롤러코스터였어요. 그러다 사고 나니까 죽으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가족이랑 멤버들한테 제일 미안해지더라고요. 그때부터 제가 우리 멤버들을 챙겨야겠다! 이 생각을 했죠.”

하준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던 또 다른 마음까지 꺼내 보이자 영빈과 하준의 시선이 일렁이는 게 보였다.

딱 봐도 우리 지환이가 저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나? 하는 눈빛이었다.

으이구, 이렇게 착해빠져가지고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고.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푹 빠진 것도 있지만.

“하준이는 환이 저러는 거 알았어?”

“아뇨, 저한테도 저렇게까지 얘기는 안 해줬어요. 처음 듣는 얘기에요.”

“그럼 우리 방송에서 최초 공개인 셈이네. 하하.”

“넵! 선배님 방송이라서 제가 공개했습니다. 얘기하다 보니까 말이 길어졌는데, 확실한 건 제가 언래블 0호 팬이라는 거죠!”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하준을 향해 활짝 웃으며 당당히 말했다.

모든 솜뭉치들아, 내가 바로 성덕이다!

부러워해도 괜찮아!

“자,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걸로 마무리할게요. 우리 세 번째 질문을 뽑기 전에 잠깐 노래 한 곡 듣고 갈까요!”

보통 코너 진행 중엔 이렇게 어중간한 간격으로 방송을 끊지 않기에,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명준을 바라봤다.

명준이 PD에게 눈짓하자 카메라가 모두 돌아갔고, 마이크가 모두 꺼진 걸 확인한 명준이 우리를 불렀다.

“그, 방출된 애 있잖아. 김우빈이라고.”

“아… 네.”

이놈의 김우빈은 잊을 만하면 자꾸 이름이 튀어나온다.

무의식 중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작게 한숨 쉬며 표정을 관리했지만, 다른 멤버들은 그게 영 쉽지 않은 것 같았다.

쇼케이스 기자들 질문에도 나왔던 질문이기에 어디 가든 초반에는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걔가 개인 SNS에 뭐라고 올렸나 봐. 개인 팬들이 자꾸 홈페이지에 도배하고 있대. 지금 실시간 채팅에서도 계속 어그로 끌고 있고.”

“하아…. 도대체 뭐라고 올렸는데요?”

“일단, 정당한 사유로 나간 거 확실하지? 상대한테 빌미 줄 거 없고?”

“네. 제가 자세히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대표님이 직접 우빈이가 계약 사항을 위반해서 방출하게 됐다고 하셨어요.”

잠시 고민하듯 말을 아끼던 명준이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그럼 계속 블락 처리하고 게시글 삭제할게. 어차피 엄청 많은 양은 아니라서 상관없긴 한데, 시청자들이 오해하지 않게 못 박아둘 필요는 있어. 마지막 질문을 그 관련으로 뽑을 테니까 대답 잘하고.”

“회사에 물어봐도 돼요?”

“응.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 확인해. 나도 PD님한테 말하고 올게.”

이제 하다 하다 별짓 거리를 다하는 모양이네.

김우빈 하나 때문에 우리 첫 생방까지 말아 먹을 뻔했다.

이 상황에 화가 난 건 나나 하준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김우빈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힘찬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고, 영빈이나 경환, 세빈이도 모두 표정이 좋지 못했다.

“표정 관리하자. 방송 중이야.”

나지막하게 주의를 주자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든 듯, 힘찬이 자기 뺨을 두드렸다.

“맞아, 그런 놈 때문에 화내면 내 에너지가 아깝지.”

“가뜩이나 못 먹어서 예민한데 별게 다.”

앞으로 이 정도 신경전은 웃으면서 넘어가야 할 만큼 별별 다양한 미친놈들을 만나게 될 텐데…. 멤버들의 멘탈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머지 얘기는 돌아가서 하자. …그리고 우리 이제 흑역사는 좀 묻자.”

멤버들을 빠르게 다독인 영빈이 얼음에 대한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지우려는 듯 기운이 쪽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근데, 그 흑역사라는 게 우리가 안 만들려 한다고 안 만들어지는 게….”

“웬일로 힘찬이가 옳은 말을 했네.”

“경환이 형까지 나한테 왜 그래요!”

“찬이 형, 경환이 형 말이 틀리진 않잖아요.”

멤버들이 투닥거리며 평소의 컨디션을 찾던 차에 하준과 명준이 함께 돌아왔다.

“하준아, 너희 애들 멘탈 튼튼한가 보다.”

“그럼요. 우리 애들이 보통 애들은 아니죠.”

명준은 언래블의 멤버들이 자기 방송에서 상처받을까 걱정한 모양이지만, 생각보다 언래블의 멘탈은 튼튼했다.

잠깐 내가 걱정했던 게 우스울 만큼.

“아, 형 치사하게!”

“그러게 왜 까불어, 이놈아.”

“어…?”

그새를 못 참고 경환을 건드렸는지 헤드락에 걸린 힘찬이 발버둥을 쳤고 그 결과 세빈 앞에 있던 커피를 건드렸다.

여기 장비들이 얼만데!

커피 잘못 쏟았다가 혹시라도 장비 망가트리면 우린 완전히 망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건 절대 안 돼!

당황한 세빈이 대신 옆에 있던 내가 몸을 날려 커피 컵을 잡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깡!

하는 맑고 고운 소리와 함께 내 눈앞이 순간 캄캄해졌다.

“지환아!”

“야! 쟤 피! 휴지!”

시야가 흔들리고, 사방이 새까맣게 변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데는 다행히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필이면 라이브 용 스탠딩 마이크 쪽으로 엎어지면서 거기에 이마를 찍은 모양이었다.

“형, 괜찮아? 이거 보여?”

“…어. 나 괜찮아.”

순간 앞이 까맣게 변하고 핑 도는 느낌이 들었지만 괜찮은 척 멤버들에게 손짓했다.

“환아, 너 인마!”

“미쳤어? 뭐해!”

명준과 멤버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고 뭔가 눈 옆으로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만져보니 피였다.

그 와중에도 커피 컵을 꼭 잡고 있던 내가 웃겼다. 무사히 구출한 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창백해진 세빈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급히 달려온 스탭들이 휴지 뭉치를 명준에게 내밀었다.

머리를 부딪친 탓인지 눈앞이 어지러워서 미묘하게 현실감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화난 듯 고함을 지른 하준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있었다.

“커피 쏟아서 장비 고장 나면 안 되잖아요.”

명준이 이마를 꾹 누르며 얼굴을 닦아주고, 다른 작가님이 물티슈를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열린 문틈으로 보니 얼굴이 까맣게 죽어버린 매니저 형이 날 바라보며 팀장님께 전화하고 있었다.

“지환아, 지환아. 이 미련한 놈아. 아이돌이 얼굴에 스크래치 내면 어떡하냐.”

한결 진정된 듯 한숨을 푹 내쉰 명준이 물티슈로 이미 굳기 시작한 피를 닦아내며 상처를 살폈다.

“너 빨리 나가서 치료받고 와.”

“괜찮은데….”

“말 들어.”

곧 음악과 광고로 번 시간이 끝나는 상황이라 멤버들과 명준이 급하게 상황을 수습하고, 나는 강제로 방음 부스 밖으로 끌려나갔다.

“환아, 너 진짜 이 형이 쓰러지는 꼴이 보고 싶냐?”

“아니, 형 그게 아니라….”

“사고 난지 얼마나 됐다고 또 피를 봐!”

“잘못했어요….”

다행히 흘린 피에 비해 상처가 깊지 않아 지혈제를 뿌리고 상처를 수습해 주는 매니저 형에게 연신 잘못했다고 빌어야 했다.

이 형은 다 좋은데 감정이 너무 풍부했다.

퇴원 날에 왔을 때도 애잔하게 쳐다보더니 오늘은 금방이라고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 제발 울지 마, 형….

진짜 나 창피해서 수치사할 것 같으니까.

“지금 병원 안 가봐도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앞머리도 길어서 가리기 딱 좋네요.”

“허…. 어린 친구가 용감하기도 하지. 아니 그 커피 그게 뭐라고.”

“혹시라도 장비 망가트리면 저희가 민폐 끼치게 되잖아요. 어떻게든 커피를 잡아야 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내적 친분 스킬을 걸어둔 PD가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다 결국 양손을 들었다.

“아이고, 이 정도로 열정적인 친구는 또 오랜만이네. 내가 졌어요. 조만간 우리 언래블 친구들 한 번 더 보죠.”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명진 PD에요. 앞으로 지환 씨랑 언래블 자주 봅시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까 단체로 이미 인사를 했는데도 악수까지 청하면서 자기 이름을 다시 밝힌다는 건 지금 상황을 서로 피곤하지 않게 잘 마무리하자는 얘기였다.

이깟 피 좀 본 걸로 이런 상황을 얻어내다니, 굉장히 이득이었다.

이후 얘기를 매니저 형에게 맡기고 난 상처를 수습했다.

헤어와 메이크업을 대충 손봐서 상처를 가린 후 아무렇지 않게 복귀했고, 이후 방송은 다행히 즐겁게 마칠 수 있었다.

이미 김우빈 관련 질문이 나올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회사에서 가이드 라인을 정해준 상황이었다.

덕분에 명준과 얘기한 대로 김우빈 관련 질문을 막힘없이, 그리고 단호하게 잘 답했다.

그 후로 이어진 몇 가지 질문을 마지막으로 타이틀곡도 멋들어지게 잘 끝냈고, 우리의 첫 라디오 출연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다만, 그 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명준과 하준의 엄청난 잔소리였다.

“또 그렇게 무모하게 몸 쓸 거야?”

“아뇨… 잘못했어요….”

일부러 잔뜩 기죽은 것처럼 어깨까지 축 늘어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넌 교통사고까지 났던 애가 왜 이렇게 위기감이 없냐. 진짜 아이돌은 몸이 재산이고 얼굴이 그 절반이야.”

“앞으로 더 조심할게요….”

“상처가 이만하길 다행이지 더 크게 다쳤으면 어쩔 뻔 했어.”

내 딴에는 팀을 위해서 한 행동이긴 하지만, 피까지 흘린 탓에 다들 너무 놀란 것 같아서 얌전히 있기로 했다.

다만 하준에게 잔소리를 듣는 건 이해가 됐는데, 어째서인지 명준도 하준과 똑같은 포즈로 서서 잔소리를 퍼붓고 있었다.

“리더는 훈계라는 스킬이 패시브로 있어야 가능한 거였어….”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내가 둘에게 혼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힘찬이 내게 겨우 들릴 듯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둘의 모습이 너무 비슷해서 사실은 형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더불어 사고 친 멤버들에게 무어라 말하기엔 장소가 좋지 않아서 이 악물고 참는 하준의 모습도 이해했다.

조명이 꺼진 부스 안의 멤버들 얼굴은 희게 질려있어서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기도 했으니까.

“하준아, 이만하면 환이도 조심할 것 같으니까 그만하자. 여기서 더 하면 애 기죽어.”

“하, 진짜 너 명준이 형 아니었으면 가만 안 뒀어. 그리고 경환이랑 힘찬이, 너희는 숙소에서 보자.”

……?

저 이미 기죽을 대로 죽어서 완전 지구 맨틀까지 파고들 것 같은데요.

나는 조금 억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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