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그리고 그 후(1)
“크흠, 제일 큰 에피소드는 조금 있다 말씀드리고 자잘한 것부터 해볼까요?”
나의 간절한 눈빛이 통한 건지 맞은편에 앉은 하준이 다른 에피소드를 꺼내 보자고 해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명준이 피식거렸다.
“일단 제일 큰 에피소드는 환 씨 거라는 거죠? 이야, 무슨 얘기 나올지 궁금한데요.”
“아뇨, 아무것도 아닌 일이에요. 궁금해하지 말아 주세요….”
한껏 불쌍한 표정으로 명준을 바라봤지만, 꽃보다 화사하게 웃을 뿐.
“아무래도 남자애들이 모인 거다 보니까 저희도 초반에는 좀 많이 싸웠거든요.”
“아무래도 그렇죠, 저희는 지금도 싸워요.”
“저희가 그래도 형들이 중심을 잘 잡아줘서 싸워도 금방 화해하는 편이긴 했는데 형들이 싸울 때는 진짜 무섭거든요.”
“야야, 그 얘긴 하면 안 돼!”
툭하고 입을 연 힘찬의 멘트에 하준이 기겁하고 입을 막았다.
“오, 그렇죠. 큰형들이 싸우면 아무래도 밑에 동생들은 눈치 볼 수밖에 없죠. 무슨 일로 싸운 거예요?”
“그, 그게….”
차마 자기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웠는지 영빈은 입을 떼지 못했고 하준을 바라봤다.
“휴… 제 입으로 이 얘기를 꺼내는 날이 오다니 부끄러워서 숨질 거 같네요.”
하준이 자연스럽게 받아오며 목이 타는 듯 눈앞에 생수를 한 모금 마셨다.
“진짜 별거 아닌 거였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무슨 생각이었나 싶은데….”
“원래 싸움의 시작은 진짜 사소하죠. 저희는 차 타는 순서 정하다 싸우기도 했어요.”
“아, 뭔지 알 것 같아요. 그게 은근히 중요하잖아요. 그, 저희는 저랑 히스가 둘 다 고집이 좀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가끔 부딪힐 때가 있는데…. 하, 진짜 지금 말하려니까 창피하다.”
“저희 다른 얘기 하면 안 될까요?”
“네, 안 됩니다.”
명준이 단호하게 거절하며 싱글벙글 웃자 영빈은 테이블에 고개를 묻었다.
“히스가 스트레스받으면 얼음을 좀 깨물어 먹는 편이거든요. 단 건 체중 조절 때문에 못 먹으니까 얼음으로 타협 본 건데, 히스가 먹으려고 얼려둔 얼음을 제가 몇 개 먹었어요.”
“설마 얼음 때문에 싸웠다는 거예요?”
“그게…. 네…. 타이밍이 좀 그랬어요.”
“이야, 이건 또 나름 신박하네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준과 영빈을 바라본 명준이 중얼거렸다.
“그때 제가 노래가 잘 안 돼서 평가도 앞두고 좀 많이 예민했어요. 그래서 좀 가라앉히려고 냉동실을 열었는데 얼음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근데 때마침 그 앞을 제가 얼음이 든 컵을 들고 나타났죠.”
“아하,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네…. 말하다 보니 서로 감정이 격해져서 좀 크게 싸웠어요. 숙소에서 그러고 있으면 애들이 겁먹으니까 둘 다 밖으로 나갔어요.”
“그 저희 숙소 근처에 진실의 공원이 있어요.”
“진실의 공원이요?”
“네, 거기 가면 준이 형이랑 나란히 앉아서 진실을 말하게 되는….”
내가 중간에 양념을 치자 힘찬이 웃느라 바빴다.
1차 경연 때 나한테 들었던 일이 생각난 것 같았다.
“네, 그 공원에서 2차로 싸우는데 얘기하다 보니까 이상한 거예요. 제가 가져갈 때는 얼음이 있었는데…. 실제로 제가 한 5~6개 정도 챙긴 게 다였거든요.”
“오, 진범이 따로 있었다?”
“네. 알고 보니까 우빈이라고 그때 같이 있던 동생이 부기 뺀다고 그걸 챙겨간 거였는데, 하필 히스랑 그 타이밍에 마주친 게 저였고요.”
“와, 진짜 억울했겠네요?”
“뭐 그래도 덕분에 히스가 왜 힘들었는지도 알게 되고 잘 풀렸죠. ”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준이 애쓰는 가운데 틈틈이 올라오는 라디오 앱의 실시간 채팅을 힐끔거렸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이름을 언급해 주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아, 그리고 선배님도 아실 거예요. 인원이 많으면 2층 침대를 주로 쓰잖아요. 2층에서 생활하는 멤버들이 애환이 많더라고요.”
“그쵸, 그거 올라가고 내려오는 거 엄청 귀찮잖아요.”
“맞아요. 특히 연습 힘들었던 날이나 얼마 못 자고 나가야 하는 날은 더 힘들죠.”
하준이 말을 꺼내고 명준이 받아준 멘트에 내가 옆에 있는 세빈이 손을 톡톡 쳤다.
사전에 멤버들끼리 멘트를 상의할 때 내가 제일 고민했던 부분이 이거였다.
하준에게 모든 멘트를 다 맡기고 다른 멤버들이 병풍처럼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면 PD들도 멤버들을 다 부르기보다 다음 방송 때는 방송에 적응 잘하는 하준만 부르겠지.
그래서 적당히 끼어들 수 있을 만큼 뻔뻔한 나나 힘찬은 알아서 하고 그 외에 영빈이나 경환, 세빈이는 적당히 끼어들 수 있을 것 같은 타이밍에 나나 하준이 손을 톡톡 쳐서 알려주자고.
대신 언제 누가 끼어들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명준과 멘트하는 멤버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어야 했다.
이 얘기를 꺼냈을 때 하준과 매니저 형이 무척이나 기뻐했다.
모든 멤버들이 골고루 질문을 받고 관심받으면 자연스럽게 언래블의 인지도가 올라갈 거라고.
“세빈 씨가 2층에서 지내요? 혹시 형들 등쌀에 밀려서…?”
“엣, 아니에요! 제가 2층 침대는 한 번도 안 써봐서 신기해서 써보겠다고 했거든요….”
“저희가 그렇게 못된 사람들은 아닙니다! 우리 막내 세빈이 소중해요!”
“맞아요! 우리 막내는 소중해서 지켜줘야 합니다!”
“…하, 진짜 그만해요.”
막내가 소중하다고 외치는 팔불출 형들 사이에서 깊은 탄식을 내뱉은 세빈의 어깨만 자꾸 작아졌다.
우리가 부끄러운 건지 관심이 부끄러운 건지 멘트조차 웅얼거림으로 들렸다.
명준과 우리 사이에서 얼굴이 빨개진 세빈이 나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내기에 해사하게 웃어줬다.
굳건하게 자라야지, 우리 세빈이.
“그러고 보니 2층 침대 쓰면 꼭 한 번씩은 누가 떨어진다던데?”
“저는 아니에요!”
“사실 저희 중에 그럴 사람이 한 명밖에 없어요.”
“근데 왠지 말하지 않았는데 나 누군지 알 것 같아요.”
“그쵸? 선배님이 생각하시는 그 멤버가 맞을 거예요.”
“힘찬 씨, 많이 안 다쳤어요?”
“잠결이라 많이 안 아팠… 아니, 근데 왜 저라고 확신하세요!”
모두의 시선이 힘찬을 향하자 평소에 그렇게나 뻔뻔하게 굴던 힘찬도 목덜미에 빨간 물이 들었다.
“네, 언래블 팬 여러분. 다행히도 힘찬 씨는 많이 안 아팠다고 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하하.”
“저 아니에요! 아니, 저도 이미지란 게 있는데!”
“2층 쓰는 게 세빈이랑 힘찬인데 여러분들이 생각했을 때는 누가 떨어졌을 것 같나요?”
“저도 팬분들의 판단에 맡기고 이름은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또 다른 일은 없었나요?”
“아, 저희 쇼케 다음 날이니까 오늘 아침이죠?”
경환이 입을 떼자 나는 불현듯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경환아, 너 설마 혹시…?
“아침에 회사 가려고 멤버들이 준비하고 있는데 환이가 안 보이는 거예요.”
“아, 맞아. 그랬지.”
“형! 이러기야?!”
설마 공중파에서 내 흑역사가 이렇게 팔릴 거라고 생각지 못했기에 필사적으로 경환을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다른 멤버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즐거움이 떠올랐다.
이 악마들…!
“이야, 뭐길래 환 씨가 저렇게 숨기려고 할까요?”
“원래 환이가 늘 제일 먼저 일어나서 저희 챙겨주고 밥도 해주거든요.”
“오, 요리도 해요? 잘해요?”
“네. 김치볶음밥 진짜 잘해요. 아무튼 갑자기 애가 안 보여서 숙소를 뒤지다가….”
“뒤지다가?”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는 명준이 더 미워져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화장실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평소에 말이 별로 없던 영빈이 오늘 아침을 떠올리며 즐거운 듯 일화를 풀고 있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는데 환이가 수건을 꼭 쥐고 벽에 기대서 잠들어 있는 거예요. 바닥 때문에 옷도 다 젖었는데도.”
“풉, 변기에 앉아서 잠들었다는 건 들어봤는데 씻으려다 잠들었다구요?”
힐끔 바라본 실시간 채팅창이 온통 ‘ㅋㅋㅋㅋㅋㅋ’로 도배되어 있었고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야,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그렇게 잠들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 저희 다른 얘기 해요. 하하, 그런 얘기는 재미없잖아요.”
“아닌데요? 저희 작가 누님들이랑 PD님 얼굴이 완전 활짝 폈는데요?”
우리 토크가 마음에 들었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와, 방송국에도 내 편이 없구나…?
“이 친구들 이제 보니까 예능 나가도 아주 잘하겠어요. 입담들이 좋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에피소드 하나만 더 듣고 다음 코너로 넘어가죠. 환 씨 얘기죠?”
“아….”
오늘 아무래도 우리는 흑역사를 퍼 나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 같았다.
“이건 본인이 직접 말하나요? 아니면 다른 멤버가?”
멤버들의 시선이 꽂히다 못해 따갑다.
내가 말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내가 멤버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날 이렇게….”
“오, 멤버들을 잘 챙기는 편인가요?”
“전에는 안 그랬어요. 갑자기 사람이 바뀌더니 엄마 같아졌달까…?”
“전에는 하준이 형이 그랬는데 지금은 환이 형이 더 잔소리 심해요.”
경환이 말을 물꼬를 트고 세빈이 거들었다.
“그게…. 하아, 매니저 형, 팀장님, 회사 분들 죄송합니다!”
“하하, 꽤 큰일이 있었나 보네요.”
“제가 숙소를 무단이탈했다가 교통사고가 좀 났었어요.”
“어, 맞아요. 쇼케이스 때 언뜻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잠시 물을 마시며 목을 축인 내가 멋쩍은 표정으로 멤버들을 바라보다 명준에게 시선을 두었다.
“제가 그때 가장 유력한 탈락 멤버였거든요. 그러면 안 됐는데 숙소를 뛰쳐나와서 걷고 있었어요. 도망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머리가 복잡했거든요.”
“아이돌 창조 프로그램 중이었죠?”
“네. 하나뿐인 누나 얼굴을 볼 염치도 없고. 처음에 많이 반대했었거든요. 지금은 응원해주고 있지만. 그러다 사고가 나서 제가 하루? 정도 정신을 잃었대요. 그래도 다행히 몸은 크게 안 다쳤고요.”
이 얘기를 언급할 때마다 이전의 나와 그때의 내가 겪은 두 사고가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맺힌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는데 명준의 시선에 우려가 섞여 있었다.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다행히 정신 차리고 눈을 뜨니까 매니저 형이랑 팀장님 얼굴이 보이더라구요. 병원이라는 것도 나중에 깨달았어요.”
“깨어나서 진짜 다행이네요.”
“그렇죠? 그래서 이렇게 우리 멤버들이랑 같이 선배님 라디오에도 나오고요. 그 후로 많이 생각했어요. 내가 여태 무언가 잘못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에 대해서요.”
“그래서 결론을 잘 찾았어요?”
“네. 준이 형이 도와줬어요. 그 아까 말씀드린 진실의 공원 있죠?”
“아하, 거기가 언래블한테 되게 중요한 공간이네요?”
“하하, 선배님 말씀 듣고 보니까 그러네요. 거기서 준이 형한테 좀 혼나기도 하고 속 얘기도 하고 하면서 마음을 바꿔 먹었어요. 그 덕에 무사히 멤버들이랑 이렇게 데뷔도 했고요.”
명준이 고개를 언래블의 멤버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환 씨한테는 그 교통사고가 인생의 전환점이 됐겠네요.”
“네, 진짜 큰 전환점이 됐어요.”
각 각의 내가 겪은 두 번의 교통사고.
그게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로든 가장 큰 전환점이 된 건 맞으니까.
“멤버들은 어땠어요? 엄청 걱정했을 것 같은데.”
“난리도 아니었죠. 애가 없어져서 엄청 화가 났었는데 갑자기 교통사고라더니 의식이 없다고 하고….”
“화나는데 걱정되고 되게 복잡한 마음이었는데 쟤가 연습실을 멀쩡히 들어오는 거예요. 다행이다 싶기도 한데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제일 민감한 시기에 그런 사고가 터졌으니 다들 힘들었겠네.”
멤버들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웃던 명준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큰 액땜을 하고 데뷔했으니까 이제 꽃길만 걸으면 되겠네요?”
“그러고 싶어요. 저희가 많은 분들을 사랑하고 많은 분들한테 사랑받고.”
“제가 사람을 좀 볼 줄 아는데 언래블은 아주 잘 될 것 같거든요. 자, 여기까지 여러분들이 궁금할 것 같은 에피소드를 몇 가지 들어봤는데요. 노래 한 곡 듣고 더 많은 이야기 나눠볼게요.”
그렇게 무사히 1부가 마무리되었고, 우리 마이크도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