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So What(2)
“갑자기 연락하길래 집에 오려나 했지.”
“미쳤어? 어휴, 진짜. 됐고, 어제 무대 어땠어?”
“봐줄 만은 하더라.”
늘 그랬던 것처럼 누나와의 짧은 통화는 약간의 비속어와 투덜거림으로 가볍게 끝났다. 다른 멤버들은 가족들과 통화하느라 신나 보였다.
지환이는 꽤 오랜 시간 누나와 연락하지 않았었다.
그나마 내가 이곳에서 눈을 뜬 후부터는 어색함을 줄여보려고 가끔 연락을 했었다. 나도, 누나에게도 서로에게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반면 다른 멤버들은 중간중간 가족들과 연락을 했을 텐데도 얼굴들이 환했다.
어쩐지 문득 가슴이 시큰거렸다. 아주 조금 외로운 것 같았다.
대충 연락이 마무리되자 소현 팀장님이 하준의 앞으로 밀어준 파일을 가리켰다.
“공영 방송 음방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일단 케이블 쪽엔 음방 하나 얘기 중이야.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확정될 거 같아.”
쇼케이스를 통해 공식적으로 언래블이라는 그룹이 있음을 알렸지만, 음악 방송의 출연은 또 다르다.
아무리 개개인의 인터넷 방송들이 많이 흥하고 있다 해도 영향력에 있어서는 아직 공영 방송을 이길 수 없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시장도 염두에 둬야 했다.
멤버들이 괜히 머리카락 빠질 만큼 쥐어뜯으면서 외국어를 공부하는 게 아니니까.
“일단 아이돌 창조는 데뷔 쇼케이스 방송이랑 오늘 촬영으로 끝낼 거야. 좀 있다가 마무리 인사할 거니까 까먹지 말고.”
하준이 넘기는 프린트물을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나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이름에 기시감을 느꼈다.
“어?”
“지환이, 왜?”
“어… 팀장님, 이거 저희 확정이에요?”
“이거?”
“푸른 음악 노트… 이거 라디오죠?”
푸른 음악 노트.
굳건한 팬덤이 있는 심야 시간대의 라디오였다.
지금 DJ를 맡은 사람이 2세대 탑티어 아이돌이자, 지금은 프로듀서로 더 유명한 이명준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전 생의 언래블이 1집을 말아먹고 전전긍긍할 때 불러준 고마운 프로였다.
명준과 하준이 저 라디오에서 개인적으로 친해져서, 나중에 하준이 일일 DJ를 해주기도 했다. 그게 언래블의 인지도 상승에 꽤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 거기는 거의 확정이라고 보면 돼. 명준 씨가 얼마 전부터 신인 그룹들만 불러서 곡 소개하고 인터뷰해주는 그런 코너를 만들었더라고.”
“오, 진짜 저희한테 딱이네요?”
“저희 꼭 여기 나가고 싶어요!”
“나가고 싶습니다!”
모든 연예계 종사자들이 그렇겠지만, 막 데뷔한 가수들을 프로그램에서 알아서 불러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형 기획사 소속이라 처음부터 든든한 백이 있거나, 큰 화젯거리가 있다면 모를까.
아이돌이야 한 해에도 무수히 많이 생겼다 없어지지만, 출연할 수 있는 자리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괜히 아이돌 그룹이 뜨기 전까지는 예능에 목매고, 어쩌다 잘 된 멤버 한 명이 팀을 먹여 살리며 소녀, 소년 가장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아이돌 창조가 끝난 후에 회사에서 자체 리얼리티를 기획하려고 해. NTV랑 합작이 될 수도 있고.”
“일상물이에요?”
“그렇게 되겠지? 너희도 뭔가 좋은 의견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대표님도 실장님도 이번 앨범 컨셉 회의 덕에 너희 모습을 좋게 생각하고 계시니까.”
세비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그룹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멤버들 당사자일 테니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자 그동안 열심히 총대 매고 몇 번 나서봤더니, 멤버들도 이제는 자기 의견을 말하는 걸 크게 어려워하지 않았다.
“아, 저녁에 GIVE 앱으로 팬들이랑 소통하는 게 어떻냐고 홍보팀에서 얘기하더라. 어차피 팬 친화적으로 갈 거니까 자주 소통하는 게 좋을 거 같다고.”
옆에서 조용히 메모에 열중하던 매니저 형이 웬 종이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언래블 팬카페 주소야. 아래 적어준 이름으로 가입하고 형한테 말해줘. 등업해 줄게.”
그와 함께 글을 남길 때 조심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며, 어그로 끄는 댓글은 바로 신고하거나 자신에게 말할 것 등 몇 가지 당부를 늘어놓았다.
등업이라는 말에 이전 언래블 팬카페에서 등업 문제 푸느라 머리를 쥐어짜던 내가 떠올라 잠깐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매니저 형의 걱정 어린 당부는 몇 놈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우와! 팬카페!”
“우리 진짜 아이돌인가 봐!”
“그럼 가짜 아이돌도 있냐?”
“얘들아….”
팬카페라는 마법의 단어에 잔뜩 흥분한 세빈과 힘찬, 경환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로 핸드폰에 앱을 다운 받아 가입하고 있었다.
마냥 신난 어린 중생들의 모습에 오늘도 리더인 하준의 속만 타들어 갔다.
“어? 얘들아, 잠시만 통화하고 올게.”
팀장님이 핸드폰을 들고 잠깐 회의실 밖으로 나간 사이 영빈이 매니저 형에게 물었다.
“우진 형, 저희 음원 업로드된 거 봐도 돼요?”
“궁금해?”
“네!”
질문은 영빈이 했지만 다들 그게 궁금했었는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대답했다.
이런 것들 보면 정말 단합은 잘 되는 것 같아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평소에도 단합 좀 잘해보자, 얘들아….
그런 우리들을 바라보며 씩 웃던 매니저 형이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어?”
“팀장님이 말해주지 말랬는데 어차피 폰 있으니까 다 볼 수 있을 거 아냐. 어제 새벽 추이만 보여줄게.”
내밀어진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건 분명히 인기곡 100위 화면이었고 거기에는 우리 타이틀곡이 떡하니 찍혀있었다.
“헐, 이거 실화?”
“대박! 진짜예요?”
“새벽에 잠깐이긴 하지만 타이틀곡이 48위 찍었었어. 지금 뮤비 조회 수도 장난 아니야. 기특한 것들.”
매니저 형의 얼굴에 우리에 대한 대견함이 듬뿍 담겨있었지만 정작 우리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대보다 너무 큰 숫자를 봐서 되려 현실감이 없어졌다고 해야 할까.
보통 아이돌 팬덤에서는 음원이 나오면 전투태세를 갖춘다.
순위를 올릴 음원으로 플레이리스트를 짜서 핸드폰과 태블릿, PC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기기에서 팬들이 동시에 재생하는 것이었다.
숨스밍이라고, 숨 쉬듯 스트리밍을 돌리는 것인데 이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걸 최대한 모든 음원 사이트에서 해야 했다.
음원 파일 다운로드와 선물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심지어 어떤 음원 사이트는 너무 장시간 노래를 틀어놓으면 동작을 멈추기도 했기 때문에 중간중간 확인까지 해줘야 했다.
음원 사이트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뮤비의 조회 수도 신경 써야 했다.
그 노력들이 모두 모여야 내 새끼에게 음방 1위라는 타이틀을 쥐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새벽 시간대라 팬덤이 큰 대형 아이돌 그룹이나 음원 깡패들을 피해 순위 올리기는 좋다고 하지만, 언래블에게 벌써 그렇게 두터운 팬층이 있나 싶었다.
모두가 얼떨떨해하던 순간. 팀장님이 환한 얼굴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얘들아! 너희 음방 잡혔다!”
“우와!!!”
“팀장님 싸랑해요!!”
팀장님의 사자후 같은 외침에 회의실 전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현실감이 확 몰려왔는지 멤버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연수 씨 콘서트에 게스트로 나가는 거 생각해보래. 연수 씨가 너희 평가 때 괜찮게 봤나 봐.”
이어진 팀장님의 말에 방방 뛰던 멤버들이 다 같이 얼어붙었다.
게스트라니, 게스트라니!
“선배님 콘서트에요?”
“저희는 엄청 영광인데 괜찮을까요?”
하연수는 인기 있는 발라드 가수였고, 제법 두터운 골수 팬층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팬들의 기준이 굉장히 높을 게 뻔해서 이제 막 데뷔한 아이돌이 나오면 욕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 건은 연수 씨 매니저가 조금 있다가 와서 얘기해 준다고 하니까, 일단 너희 연습실 가서 연습하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우진 씨한테 말하고!”
잔뜩 신이 난 팀장님은 대답만큼 빠른 속도로 회의실을 나가버렸고, 우리와 매니저 형만 덩그러니 남았다.
왠지 이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프로필 사진 찍으러 갔었던 그 날에도….
깊은 한숨을 쉬며 마른 세수를 한 매니저 형은 왠지 그사이 폭삭 늙어 보였다.
“그, 너희 데뷔일 정하고 팀장님이 계속 방송국 돌았거든. 근데 이놈의 PD 놈들이 팀장님 뺑뺑이 돌렸어.”
정확한 속 사정들을 알 리 없는 우리는 뺑뺑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 음방 무대 좀 크게 잡아주고 싶었는데 다 발 빼고 서로 떠미니까 팀장님이 많이 짜증 났었거든. 예전부터 팀장님이 그쪽에 줄기차게 공을 들여놓았는데 그런 태도를 보였으니…. 근데 또 우리가 뭐라 할 입장이 아니잖냐.”
씁쓸하게 웃는 매니저 형의 얼굴이 왠지 짠했다.
“팀장님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우리가 더 잘해야죠, 뭐….”
“얘들아, 가자.”
우리가 연습에 허우적대는 동안 회사 분들도 우리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게 새삼 실감 났다.
뭐 하나 쉬운 것도 편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이것들을 다 하나씩 밟아가면서 결국 데뷔까지 했다.
이제 숙소 침대만큼 익숙한 연습실에서 몸을 풀고 있자 제영 쌤이 들어왔다.
“병아리들이랑 계란 왔냐.”
“아 진짜! 계란이 뭐예요!”
울상이 된 힘찬이 투덜거렸지만 제영 쌤은 웃기만 했다.
그러게 덤빌 사람에게 덤볐어야지.
“쌤, 근데 저희 무대 어땠어요?”
“무대 보셨죠?”
“봤지.”
여태까지 멤버들의 춤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끌어준 게 김제영 선생님이었다.
춤에 뜻을 두고 그거 하나만 죽어라 판 사람.
앞으로 내가 아는 미래에도 제영 쌤은 늘 멤버들의 안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환이, 경환이는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어. 각 맞추라고 했지 담 걸리게 추라고 안 했다. 지나치면 보는 사람도 부담스러워.”
칭찬이 듣고 싶었던 힘찬의 눈이 한껏 커졌다.
“세빈이랑 힘찬이 너희가 포인트 줘야 할 파트는 잘하면서, 왜 단체 군무에서 하체가 자꾸 흔들려? 바닥 잘 짚어주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영빈이는 브릿지에서 반 박자 빨랐어. 알지? 하준아 넌 체력 분배 좀 잘해라. 타이틀곡 잘 넘어가고 뒤에서 지친 거 눈에 보이더라.”
여태 좋은 얘기만 듣다가 오자마자 한바탕 혼이 난 멤버들은 기가 팍 죽어 시무룩해졌다.
나도 그렇지만, 입꼬리가 한껏 내려간 세빈의 옆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잘못한 거 말고 잘한 것도 말해주세요…. 기운 좀 나게.”
한껏 기죽은 내 새끼들이 안쓰러워 제영 쌤에게 투덜거리자 피식 웃은 제영 쌤이 한마디 했다.
“그 무대가 끝이야? 너희 앞으로 무대 안 서냐? 더 잘할 수 있는 애들이 긴장해서 자기 실력만큼 못했는데 칭찬은 무슨 칭찬.”
매섭게 쏟아지는 질타가 아파서 아무도 아무 말 못 하고 연습실 바닥만 바라봐야 했다.
“데뷔했어. 그래. 근데 그게 뭐? 데뷔했다가 그대로 묻힌 아이돌이 몇인 줄 알고 그런 소리 해? 다른 사람들은 다 희망적인 얘기만 하지? 그러니까 너희가 엄청 뜬 거 같냐.”
“아닙니다.”
“잘하겠습니다….”
한없이 붕붕 떴던 마음들이 전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 고작 데뷔 쇼케이스 무대 하나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뭐라도 이룬 것 같아서, 마음이 바람 가득 찬 풍선처럼 허공을 떠다녔다. 제영 쌤의 염려를 알아서 더더욱 뼈아팠다.
단호하고 엄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언래블에 대한 걱정이 숨길 수 없을 만큼 가득했다.
“쌤!”
“어우, 징그러, 임마! 떨어져!”
내가 달려들어 허리에 매달리자 눈치를 보던 힘찬도 같이 매달렸다.
결국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제영 쌤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와 힘찬을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할게요!”
“그래도 가끔은 칭찬 좀 해주세요!”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오던 다른 멤버들도 제영 쌤을 둘러싸고 투덜거리며 쫑알대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들이! 정신 차리라고 혼냈더니 뭐 하냐!”
“좋아서 그러죠!”
“어휴, 이 화상들!”
매달린 우리들을 보며 기가 막혀하던 제영 쌤도 결국 허탈하다는 듯 웃어버렸다.
“사람이 모처럼 무게 잡고 한 소리 했는데.”
“한 소리 끝나셨으니까 이제 칭찬도 좀 해주셔야죠.”
“맞아! 오고 가는 게 있어야죠!”
“뭘 오고 가, 오고 가긴.”
제영 쌤은 짧게 혀를 차더니 결국 가까이 있던 힘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도 첫 무대치고는 많이 안 떨고 잘했다. 처음이니까 봐주는 거야.”
기어코 칭찬 한마디를 얻어낸 힘찬이는 세상을 다 가진 양 활짝 웃었다.
그 한마디가 너무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