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괜찮아(5)
내가 잠시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옆에 있던 세빈이 걱정이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그날의 교통사고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멤버들은 모르고 나와 포잉만 알고 있는 그 순간이 떠올랐다.
“음.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인 것 같아요.”
그때의 막막함과 두려움이 아직도 생생했다.
평범한 사람이었던 내가 연습생이 되어야 했고, 데뷔해야 했다.
물론 누가 강제한 것들은 아니었다.
그대로 연습생 신분을 벗어던지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언래블과 함께 이번 생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단순한 팬심이었을까, 아니면 나 자신도 모르는 욕망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모든 것을 놓아버린 이 육신의 주인이 안타까워서였을까.
내가 했던 다짐들과, 그 다짐이 무색할 만큼 수시로 무너지는 결심들.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포기하기엔 그때 나에게 가장 간절한 것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언래블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나를 사람답게 살도록 지탱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웃으며 대답을 이어나갔다.
“질문이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냐는 거네요. 전 있었어요.”
“그만큼 많이 힘들었다는 뜻일 텐데 그 상황에 대해 잠깐 얘기해줄 수 있나요, 지환 군?”
세빈이 손을 뻗어 내 손을 꼭 잡았고 영빈은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얹었다.
이 행동이 이들의 위로라는 걸 지금의 나는 모를 수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내 새끼들이 이렇게 착하고 귀엽지.
그래, 너희가 내 자부심이었어.
“아이고, 우리 멤버들이 걱정이 많네요. 음 이거 말하고 우리 팀장님한테 혼날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말할게요.”
저 멀리 정면에서 보이는 팀장님을 향해 윙크하자 한숨을 크게 내쉰 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 보신 분들은 제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잠깐 입원했던 걸 아실 거예요.
“그러고 보니 교통사고를 당했었죠. 몸은 괜찮은 건가요?”
후유증을 조심해야 한다며 나에게 우려 섞인 눈빛을 보내는 MC의 얼굴에 이제는 볼일 없는 어떤 인간이 문득 생각났다.
이거 방송으로 보고 있으면 엄청 배 아파하겠네.
“네네, 괜찮아요. 그때 교통사고 나기 전에 제가 좀 방황하고 있었거든요. 멤버들에 비해 제가 다 못하는 것 같고 목소리가 마음대로 안 나오고.”
그 기억은 내가 아닌 이전 ‘나’의 기억이었지만 정말로 힘들어 했었으니까.
하지만 탈락 관련 얘기는 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조금 내용을 바꿨다.
“그냥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아, 내가 나아지지 않으면 탈락하겠다. 지금 상태로는 내가 탈락 멤버가 되겠구나. 그런 게 그냥 느껴졌어요.”
“심적으로 부담이 엄청 심했겠네요.”
“네, 진짜 너무 답답해서 매니저 형이나 팀장님 허락 없이 밤에 숙소 나가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잠깐 나갔어요. 멤버들 몰래.”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하얘져요, 저 사고뭉치.”
촬영에서 보이지 않았던 비하인드 이야기에 팬들이 집중하고 있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이게 시선이 꽂히는 느낌이구나.
“하하, 아무튼 그때 저는 반쯤은 포기를 생각했었어요. 안 되는구나, 나는 빛이 안 나는 사람이구나. 이 길이 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하면서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다 했죠. 그러다 사고가 난 거예요.”
“이 내용은 정말 관계자분들만 알았던 것 같은데, 그때 다른 멤버들은 어땠어요?”
그때를 떠올린 하준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전했다.
그도 팀장님이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걸 봤으니까.
“교통사고 났다고 처음 들었을 때 멤버들 얼굴 하얗게 질려서 뛰쳐나가려고 하고 난리도 아니였어요. 곧바로 크게 안 다쳤고 금방 올 거라는 말을 들어 진정되긴 했는데, 세빈이는 놀라서 울고. 어휴….”
“깨어나서 들은 건데 제가 하루 동안이었나? 의식이 없었대요. 전 그냥 잠깐 쓰러졌다 일어난 줄 알았거든요.”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팬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었던 팬들 입장에서는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들일 테니까.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본 나는 저 웅성거림 뒤에 있을 걱정과 여러 감정들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 질문을 마무리 하는게 더 중요하니까.
“깨어나서 누나한테 혼나고, 팀장님이랑 매니저형이 걱정하는 거 보고, 멤버들한테 미안하고…. 그 와중에도 멤버들이 저 걱정 돼서 눈을 못 떼는데… 엄청 가슴이 벅차더라고요.”
경환이 피식 웃으며 나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그땐 멤버들도 적잖이 당황했겠지.
“오죽하면 저희는 얘가 입원하고 퇴원하더니 사람이 철들어서 왔다고 했어요. 그전이랑 너무 달라져서.”
“하하, 바뀌긴 했죠. 마음가짐이 아예 달라졌으니까요. 그 이후에 준이 형이랑 얘기하면서 제가 잘못했던 부분이 뭐였는지 깨달았고, 지금 여기에 우리 멤버들이랑 있네요.”
사실은 이런 얘기들을 굳이 하고 싶진 않았다.
누가 묻지도 않은 일을 꺼내서 억지로 동정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데뷔 쇼케이스 무대였고, 이런 작은 이야기 하나 정도가 더 붙으면 그래도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더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련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지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이런 생각들이 앞으로 활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며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아주 잠시였지만, 이런 스스로가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자, 우리 고생한 언래블 멤버들과 환 군에게 박수쳐줄까요?”
그 후 우리는 이어진 수록곡의 무대들도 모두 실수 없이 마쳤고, 언래블의 데뷔 쇼케이스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 * *
무대는 끝났지만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처음 겪는 무대가 너무 강렬해서, 연예인들이 왜 무대를 떠날 수 없다고 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마음은 멤버들도 다르지 않은지 모두가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대기실에서 땀을 닦아내고 의상을 갈아입던 멤버들에게 대표님과, 실장님, 팀장님이 다가왔다.
“얘들아, 고생했다. 잘했어.”
평소처럼 푸근한 얼굴이 아닌 싱글벙글한 얼굴로 하준의 어깨를 두드리는 대표님을 보아하니 제법 기사들이 괜찮게 나온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노쇼도 없었고 기자들도 긍정적인 내용이 많더라. 고생 많았다.”
평소보다 훨씬 풀어진 얼굴의 정윤 실장도 따뜻한 시선으로 멤버들을 하나씩 쳐다보았다.
“지환이 너는 아무튼 사고 치는 건 알아줘야 해.”
“하하, 저희한테 나쁜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팀장님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메이크업을 지우고 나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대표님, 저희 배고파요….”
“맞아요. 너무 배고파요.”
“고기 먹어야 더 힘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긴장해서 물도 제대로 못 마시던 애들이 이제는 배고프다고 대표님에게 칭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와 하준은 어이가 없었지만, 배는 우리도 고팠다.
“오늘 고생했으니까 회식해야지! 안 그래도 고깃집 예약해놨으니까 가서 실컷 먹어. 이런 날은 고기지.”
가뜩이나 그동안 닭가슴살이랑 풀만 먹어서 죽을 것 같았던 나와 멤버들의 눈이 번뜩였다.
드디어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겠구나!
그 뒤에 이어진 스태프들과의 회식은 행복 그 자체였다.
크게 실수하지 않고 잘 치러낸 우리를 회사 식구들도 칭찬해줬고, 눈치껏 우리 관련해서 올라온 좋은 기사가 있으면 슬쩍 보여주기도 했다.
[새로운 신인돌 등장? 소년, 두려움을 노래하다!]
[청춘이 가진 두려움을 노래로 풀어낸 언래블, 누구?]
[美친 비주얼을 가진 신인그룹 언래블, 심상치 않다!]
[교통사고도 꺾지 못한 데뷔에 대한 갈망, 언래블의 쇼케이스]
다행히 제목만 봐서는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았지만 제목에 낚인 적이 한두번이여야지.
“애들한테 기사 보여주지 말라니까!”
은근슬쩍 기사를 보려던 내 손은 매의 눈을 가진 팀장님의 제지로 실패로 돌아갔다.
“으이구, 너는 또 그새를 못 참고!”
“아, 아파요! 팀장님 손 엄청 맵다니까요!”
잠시간의 일탈을 꿈꾼 대가로 등짝을 맞은 나는 죽는다고 끙끙댔고 맥주를 들고 있던 하준과 눈이 마주쳤다.
‘저거 한잔만 마셨으면 소원이 없겠다, 진짜….’
내가, 어? 이래 봬도 주량이!
하고 외쳐봤자 미성년자 몸뚱이에 있는 이상은 글렀다.
나처럼 입맛만 다신 게 아니라 시도를 한 힘찬이 매니저 형에게 붙잡혀 등짝을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본 후에는 얌전히 마음을 접었지만… 아쉽긴 아쉬웠다.
이렇게 힘들게 땀을 빼고 난 후, 좋은 일 있을 때 마시는 맥주 한 캔이 얼마나 시원한데.
“얘들아,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 오늘은 밥 먹고 푹 쉬고 내일 일찍 와야 한다.”
“네!”
오늘도 깻잎이 어쩌고 상추가 어쩌고 하면서 투닥거리는 멤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 장면을 중간 중간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준이 형, 이제 한마디 해야지?”
어느 정도 배도 채웠겠다 마음이 풍족해진 내가 하준을 향해 말했다. 지금 제일 들뜬 사람은 하준과 영빈이 아닐까?
“그래, 하준이 형, 영빈이 형 한마디 해야지!”
“와아!”
우리끼리 한 테이블을 쓰도록 해준 덕분에 동생 라인은 조금 더 편한 자세로 맏형들에게 박수 쳐줄 수 있었다.
“…고생 많았다. 정말로. 너희가 따라와 줘서 나랑 영빈이도 버틸 수 있었어.”
“고마워, 얘들아.”
진하게 묻어나는 감정의 여운이 낯설어 어쩔줄 몰라하는 힘찬, 벌써부터 눈가가 촉촉한 세빈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경환이.
“앞으로 더 많이 힘들어도 오늘 느꼈던 감정들 잊지 말자. 우리가 오래오래 같이 있을 수 있게 힘들 때는 꼭 말하고.”
“우리 맏형들이 아주 든든해서 진짜 다행이야. 그치?”
심장이 일렁이며 춤을 추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고생한 모든 언래블 멤버들을 위해 꾹 참고 박수를 쳤다.
“그래, 너희들 고생 많았어, 진짜!”
“잘했어, 앞으로 대박날 일만 남았지?”
이미 한잔씩 걸친 스태프분들도 와서 우리 어깨를 두들겨주고 같이 박수를 쳐주었다.
화기애애하고 기분 좋은 언래블의 첫 공식 회식이 끝났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우리만의 2차 회식을 가졌다.
무려 하준과 영빈이 사비를 털어서!
오늘만큼은 회사 눈치 보지 말고 우리끼리 먹고 마시자며 편의점을 털고 들어온 우리는 즉석 떡볶이부터 다양한 과자에 음료수까지 바닥에 다 펼쳐놓고 둥글게 앉았다.
“근데 진짜 우리 이렇게 먹어도 되요?”
“괜찮아, 팀장님한테 우리끼리 2차로 뭐 좀 더 먹어도 되냐고 물어봤어.”
“팀장님은 우리가 고깃집에서 그렇게 먹고 이만큼을 또 먹을 줄 몰랐겠죠.”
공기밥과 냉면, 고기를 마음껏 먹은 우리는 이제 입가심을 위해 준비한 음식들을 보며 씩 웃었다.
다이어트는 사람을 극도로 예민하고 지치게 만든다면, 높은 칼로리의 음식은 마음을 넉넉하게 해준다.
누가 말했다. 칼로리는 맛을 수치화한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