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3)화 (33/456)

33. 괜찮아(4)

리허설을 통해 동선은 모두 맞춰봤고, 멘트를 정리한 종이는 하도 만져대서 너덜거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기자들을 대면해야 했던 그 순간의 긴장감이 아닌, 심장이 쿵쾅거려서 귀가 먹먹하고 손끝을 움찔거리게 되는 다른 긴장감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자리에 왔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며 헛웃음이 나왔다.

한껏 꾸민 잘생긴 내 새끼들을 한 명씩 바라봤다.

이 아이들 덕에 삶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내가 이들에게 보답할 순간이 됐다.

“언래블 준비해 주세요!”

“언래블들아, 모여봐.”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라는 스태프의 말에 하준이 멤버들을 불렀고, 동그랗게 모인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등 뒤로 우리를 지켜보는 팀장님, 매니저 형, 그리고 스태프분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던 대로만 하자. 하던 대로.”

“에이, 그거론 약하죠! 무대 부수고 옵시다!”

에너지 충전이 끝난 힘찬이 기운 좋게 외쳤고, 그 모습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앞에 구호 외치면 너희는 우리 팀 명 외치는 거야. 알았지?”

“와, 우리가 이렇게 구호를 외치는 날이 오네요.”

“어떡해! 너무 떨려서 혀 깨물 것 같아.”

“진짜 다치지 말고 카메라 잘 보고 많이 웃자.”

긴장이 최고치에 달한 멤버들은 손을 모으면서 온갖 헛소리를 늘어놨다.

물론 나도.

신인들이 자기를 찍는 카메라를 못 찾아서 시선처리 못하는 건 이제는 너무 흔해빠진 일이었다.

그걸 염두에 두고 그동안 멤버들을 닦달했으니 적어도 자기 카메라는 알아서 다 찾아볼 수 있으리라.

“둘, 셋! I'm OK 언래블!”

“I'm OK 언래블!”

우렁차게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 명과 팀 이름을 외친 우리는 최종 점검 후 무대로 오르는 계단 앞에 섰다.

이 계단을 오르면 무대가 있고, 그 앞에는 우리 팬들이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이 있다는 것들을 알 수 있게 해줬지만, 그 숫자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밖의 조명이 꺼졌다.

몇 번이나 외웠던 동선대로 각자의 자리에 선 우리는 서로를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리고 흘러나온 것은 앨범의 intro.

새까만 무대 위, 핀 조명 하나가 센터에 선 하준에게 떨어지고 무표정한 가면을 쓴 하준이 묵직한 드럼과 베이스의 비트에 맞춰 리듬을 탔다. 이어서 양 사이드에 서 있던 경환과 내 머리 위에도 조명이 켜졌다.

하준의 손짓에 따라 휘청이듯 무대 끝으로 뒷걸음친 우리 사이로 나머지 멤버들의 수에 맞춰 조명이 켜졌다. 울상을 짓고 있는 가면을 쓴 영빈이 하준에게 다가가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뒤를 이어 일그러진 표정의 가면을 쓴 힘찬이 하준의 한쪽 손목을 잡아당겼고, 눈을 감은 듯한 가면을 쓴 세빈이 하준의 발목을 잡듯 몸을 낮췄다.

비트는 점점 빨라졌고 그 사이에서 벗어나려는 듯 몸을 비틀던 하준의 손짓에 나와 경환이 달려들었다. 다른 멤버들도 하준을 둘러싸고 조금씩 압박하듯 가까이 다가갔고, 흐느끼는 듯한 바이올린과 피아노 소리가 조금씩 커지면서 온몸에 힘을 뺀 하준과 그 양옆에 선 멤버들이 한 걸음씩 무대 뒤쪽으로 물러섰다.

갑자기 모든 소리가 사라진 순간, 그 자리에 쓰러지듯 모든 멤버들이 바닥에 누우며 무대는 다시 암전됐다.

다시 푸른빛의 조명이 켜지고 I'm OK의 전주가 시작되면서 검은색 슬랙스에 각각 다른 위치에 검은색과 체인으로 포인트를 준 셔츠를 입은 멤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쏟아진 사람들의 환호성에 긴장하고 있던 멤버들이 움찔했지만 다행히 고개를 들진 않았다.

신비감을 주는 푸른빛에 휩싸인 하준과 경환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 한마디씩 읊조리는 느낌의 랩을 주고받으며 무대 앞쪽으로 나갔다.

헤매는 것도, 조금 주저하는 것도 모두 괜찮을 줄 알았어.

다들 말했잖아, 어차피 모두가 겪는 일이라고.

이게 뭐가 대수롭냐고.

은은하게 흘러나오던 반주가 점점 소리를 키우고, 그 뒤를 이어 세빈을 둘러싼 멤버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는 듯한 안무와 함께 뒤로 물러났다. 홀로 중앙에 남은 세빈이 맑은 목소리로 이곳에 찾아온 이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얼마큼의 노력을 해야 되는 건지 묻는 가사는 연습생 기간 내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과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진 조금 무거운 비트의 멜로디에 멤버들의 목소리가 하나씩 쌓이고 중간중간 이어진 랩은 감정의 무게가 지나치게 기울어지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었다.

서로를 마주 보는 대형에서 교차되는 단체 안무도 모두 문제없이 흘러갔다.

그렇게 점점 노래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갔다.

I'm OK. Are you all right?

이 말을 믿는 사람이 있었네.

I'm OK. Are you all right?

그래, 괜찮아. 아무것도 아닌 거니까.

멤버들이 묻고 허스키한 힘찬의 목소리가 대답하고 내 파트가 되어 가운데로 돌아 나오며, 무대에서 그제서야 제대로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괜찮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해볼게.

두려워서 눈물이 맺히겠지만 그래도 믿을게.

적어도 우리는 같이 있을 테니까.

영빈의 애드리브와 세빈과 힘찬이 얹는 화음에 그제서야 심장이 쿵 하고 무겁게 뛰는 게 느껴졌다.

넓은 무대를 뛰어다니느라 고개를 돌릴 때마다 멤버들의 땀이 후드득 떨어졌지만, 한 명도 빠짐없이 멤버 모두가 카메라와 무대 아래서 눈을 빛내는 우리 편들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스킬을 켜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보인 것 같았다.

내가 저런 표정으로 무대 위의 언래블을 바라보고 있었을 테니까.

노래가 끝나고 무대 앞으로 바짝 붙어선 멤버들은 서로 손을 꼭 잡고 하준을 바라봤다.

“둘, 셋!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 입니다!”

어느 때보다 더 힘찬 목소리로 하준이 구호를 맞췄고, 다 같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이 자리에 와준 소중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쏟아지는 함성과 언래블이라는 외침이 갑자기 너무 낯설어서 그 기분을 무어라 정의할 수 없었다.

울컥하는 감정 탓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던 그때, MC를 맡은 선배님이 멘트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MC를 맡게 된 장기준입니다. 우리 후배님들이 너무 감격했는지 고개를 못 드네요, 하하.”

능숙한 진행 덕에 감정을 빠르게 추스르고 고개를 들었다.

무대 아래서 더 찬란하게 빛나는 그 감정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가, 이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게 너무 생소했다.

이 모든 것들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심장이 뻐근해질 만큼 벅찬 기분을 안겨주었다.

“이야, 데뷔 쇼케이스인데 엄청 많이 와주셨네요. 다들 언래블 팬인 거죠?”

- 네!

- 언래블 오래가자! 사랑해!

- 기다렸어!

여러 외침들이 뒤섞여있었지만 하나같이 눈이 반짝거리는 게 꼭 밤하늘 가득한 별들을 보는 것 같았다.

“조명 감독님, 죄송한데 스테이지에 조명 조금만 더 켜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 팬분들 얼굴이 보고 싶어요.”

원래 준비된 멘트에는 없는 이야기였지만, 지금 이 광경을 꼭 두 눈에 담고 싶었기에 요청했다.

다행히도 조명 감독님은 흔쾌히 팬석 위로 환한 빛을 뿌려주었다.

“정말 전부 저희 보러 와주신 분들이에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와주실 줄은 몰랐어요. 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무대 아래를 두리번거리며 어쩔 줄 모르는 멤버들의 모습에 팬들은 귀여워! 여기 봐줘! 등을 외치며 즐거워했다.

그제서야 약간 정신을 차린 나는 그대로 두면 무대 아래로 내려갈 것 같은 힘찬의 뒷덜미를 잡아 다시 제자리로 끌고 왔다.

무대에서 돌발 행동을 하는 멤버들을 보고 귀여워서 웃던 과거의 나를 갑자기 반성하게 됐다. 당사자가 되니 돌발행동하는 힘찬의 뒤통수를 평소처럼 때릴 뻔했다.

“우리 언래블 친구들이 너무 좋은가 봐요. 어쩔 줄을 모르네. 자, 이쯤에서 각자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질까요?”

먼저 마이크를 든 하준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며 말을 하려다 후 하고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다정한 웃음을 보였다.

“안녕하세요, 언래블의 리더와 랩을 맡고 있는 하준입니다. 여러분, 많이 보고 싶었어요.”

“안녕하세요. 언래블의 메인 보컬 히스입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랩을 하는 C.I입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형 라인의 인사가 끝나자 동생 라인들이 서로 눈치를 보길래 내가 먼저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언래블에서 리드 보컬과 중재를 맡고 있는 환입니다.”

싱긋 웃으며 사방에서 울리는 카메라 셔터음을 최대한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바라보려 노력했다.

잘 뽑힌 사진 한 장, 움짤 하나, 직캠 하나가 얼마나 영업에 도움이 되는지 모를 수 없는 나였다. 내가 그걸 했었는데 이제는 찍히는 입장이 되다니.

“안녕하세요! 춤에 최적화된 언래블 찬입니다!”

“안녕하세요…. 막내 세빈입니다.”

어쩜 이렇게 인사도 자기 성격대로 하는지 멤버들을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저기 환군은 관계자 아니죠? 되게 흐뭇하게 멤버들을 보고 있는데요.”

“아, 저도 모르게 우리 멤버들이 기특해서….”

“환이는 자주 저렇게 웃어요, 여러분. 괜찮아요.”

“거기서 괜찮다고 할 건 또 뭡니까….”

내 표정이 좀 웃겼는지 바로 이야기가 나왔고 나와 힘찬의 투닥거림이 재밌었는지 팬들이 웃고 있었다.

이렇게 허당 캐릭터로 이미지를 굳히고 싶진 않은데….

“자, 그럼 지금부터 사전에 미리 적어주신 질문들을 멤버들이 답하는 시간을 가져볼게요.”

어느새 준비된 의자에 멤버들이 앉았다.

이윽고 작은 상자가 하준의 앞에 놓이면서 상자에 담긴 질문지를 뽑아 대답해 주는 시간이 되었다.

“자, 하준 씨, 질문지를 뽑아주고 솔직하게 대답해 주셔야 합니다.”

“어…. 이걸 어떻게 대답해드려야 하지.”

뽑아 든 질문지를 본 하준이 질문지를 확인하고 몇 번이나 멤버들을 쳐다보자, 내용이 궁금해진 우리는 미어캣처럼 하준이 들고 있는 종이를 향해 기웃거렸다.

“질문은 멤버들 중 가장 리더 말을 안 듣는 멤버와 잘 듣는 멤버를 골라달라는 건데요. 정말 공교롭게도 리더인 제가 이 질문을 뽑았네요.”

“이건 진짜 솔직하게 말해야 해요. 팬들 앞에서 인증하는 거니까 진실만! 그렇죠, 여러분?”

질문을 듣자마자 나는 팬들에게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말을 걸었고, 착한 우리 팬분들은 한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해 주었다.

“네, 음…. 사실 이건 당사자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준이 멤버들을 한 명씩 지그시 바라보자, 양심 없는 모두는 자기는 아니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제일 안 듣는… 까지는 아니고, 허허, 아니 찬아, 왜 내 시선을 피하니. 일단 제일 착한 건 우리 막내 세빈이죠. 잠만 좀 잘 깨주면 제가 바랄 게 없어요.”

그 뒤로 몇 가지 질문이 더 지나갔고 마지막 질문은 내가 뽑게 됐다.

“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환 군, 어떤 질문인지 공개해 주세요.”

질문지를 뽑아들고 확인한 나는 잠시 주저했다.

나도 모르게 멈칫한 것을 확인한 경환이 내가 든 질문지를 가져가 확인하고 다른 멤버들에게도 보여주었다.

질문지에 적인 내용은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있냐는 내용이었다.

하필이면 뽑아도 이런 걸 뽑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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