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0)화 (30/456)

30. 괜찮아(1)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타이틀곡을 위해 수명을 바친 느낌이었고, 그 후에 우리는 하루가 24시간이라는 사실에 뼈저리게 안도감을 느꼈다.

분명 과로사하지 말라고 신이 하루를 24시간으로 정해준 것이 틀림없었다.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우린 진작에 죽었을 거야.”

“말라죽든가 과로사로 죽든가?”

“그렇지.”

이제는 익숙해진, 바닥과 한 몸인 멤버들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멋모르는 팬심에 찬 바닥에 애들이 누워있는 게 맘 아프고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바닥에 누워서 몸에 열을 식히는 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안다.

당장 내가 죽게 생겼거든.

이래서 사람은 경험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나 보다.

타이틀곡이 정해지고, 정신을 차려보니 안무가 나와서 안무 익히느라 눈물 같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가끔 자다 깨서 같은 방의 멤버들을 보면 잠결에도 손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멤버들의 고생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가슴이 뭉클했다. 오죽하면 저럴까 싶어서.

하지만 다음 날, 영빈에게서 내가 잠꼬대로 안무를 중얼거리며 팔을 휘적거렸다는 말을 듣고 남 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눈물이 찔끔 나올뻔했다.

그리고 또 어느 날에 세빈이가 말하길, 내가 가영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려달라고 하고 있었다고.

이러다 죽지 않을까 걱정을 하는 와중에 하준의 곡과 경환의 곡이 하나씩 앨범에 들어가게 됐고, 작곡 공부를 하고 있던 게 들킨 덕에 나도 그 둘과 같이 쥐어짜 졌다.

마지막 콘서트 피켓팅 때도 이렇게까지 피가 마르진 않았던 것 같은데.

두 달이 넘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소속사와 이미 얘기가 된 상태라 최소한의 시간만 학교 수업에 참석하고, 그 외의 시간은 모두 데뷔 준비에 갈아 넣었다.

고민할 시간이 있었다면 도망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들었다.

중간중간 고비 때마다 포잉의 적절한 도움과 그 따뜻한 체온이 없었다면, 함께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이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내 꿈은 애당초 아이돌이 아니었으니까.

뮤비를 찍고, 녹음을 하고, 프로듀싱 내내 가영과 A&R 팀에게 말린 오징어가 될 때까지 탈탈 털리고, 숙소에선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멤버들 사이에서 중재하느라 바쁘고….

“그래도 우리가 했네. 드디어.”

영빈이 목덜미를 주무르며 하준과 우리들을 바라보고 웃었다.

회사에서 열심히 홍보했던 타이틀곡의 뮤비 티저가 오늘 드디어 공개된다.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시선으로 형들을 바라보던 동생 라인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진짜 애기들 같은데.

“근데 있잖아요.”

“있긴 뭐가 있어.”

“아, 이 형 또 이런다.”

“찬이, 왜?”

앨범에 곡을 넣는다는 부담 때문인지 유난히 날카로웠던 경환이었다. 그 특유의 장난기가 보이지 않아 걱정될 정도였지만, 이제는 툭 던진 말에도 날카로움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저 성질머리를 눌러주고 어르고 달래느라 진을 뺀 걸 생각하면···. 어휴.

힘든 연습 중에도 늘 자기 자리를 잘 지켜주고, 묵직하지만 장난기 있던 경환이었다. 그런 그가 그렇게 작고 약해 보였던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부담감에 짓눌려있었던 거라고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고.

“보통 나이로 갈라서 형 라인, 동생 라인 그러잖아요. 그럼 하준이 형이랑 영빈이 형, 경환이 형이 형 라인이 돼야 하는데, 우리는 아닌 거 같아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멤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힘찬을 바라보자 힘찬이 히죽 웃으며 나를 가리켰다.

“경환이 형은 우리 동생 라인으로 오고 지환이가 형 라인 가야 할 거 같지 않아요? 완전 애늙은이야.”

“와, 은혜를 이렇게 갚겠다?”

괘씸죄를 적용해 힘찬의 옆구리를 공격하고, 간지럽다고 자지러지며 발버둥 치는 힘찬을 남은 힘을 쥐어짜 깔고 누워버렸다.

“아, 맞잖아! 누가 너 하는 거 보고 고등학생인 줄 알겠냐!”

“그건 약간 인정.”

“지환이 허리 두들기는 게 약간 연륜이 묻어나긴 하더라.”

“헐, 내가 그간 님들 챙겨 먹이고 뒤치다꺼리한 게 얼만데!”

아, 포잉이랑 맨날 투덜거리다 보니 말투 옮은 것 같네.

억울함 가득 담은 눈으로 멤버들을 바라보자 다들 내 시선을 피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정말로 하나도 없었다.

내가 해준 밥 먹고 싶다고 흐느적대서 1시간 더 잘 수 있는 거 뭐라도 먹인다고 꾸역꾸역 일어나서 밥 먹이고, 제 몸 못 가누는 거 주워다 침대 던져주고 한 게 누군데!

“그만들 해. 그래도 지환이가 잘 챙겨준 건 맞잖아.”

어느새 득도한 고승처럼 자비로운 표정을 짓게 된 하준이 우리를 말리고, 그걸 들으며 우리는 다시 바닥에 찰싹 달라붙고.

이 무성의하고 영양가 없는 대화가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예전에, 그러니까 이전 생에서 멤버들은 숙소에서 어떻게 지낼까? 하는 주제로 솜뭉치들이랑 수많은 대화를 나눴었는데, 이 나이 때 남자애들과 다를 게 없었다.

게임하고 싶어 하고 치킨 뜯고 싶어 하고 시답잖은 장난치면서 우리끼리 웃기다고 웃고 있고.

이런 시간들이 긴장을 푸는 우리만의 방법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딱히 말리지 않았다.

지금도 말이 끊기는 한 텀 한 텀 사이에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풀려가는 눈이 보이니까.

앞으로 30분 후면 언래블의 데뷔 앨범 타이틀 뮤직비디오가 세상에 처음 그 모습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괜찮겠죠?”

세빈이 넋을 놓은 형들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 깔린 미약한 불안감은 아무리 열심히 했다고 스스로를 다잡아봐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당연하지. 우리가 봐도 쩔었잖아. 우린 잘했다.”

그래서 난 웃으면서 호기롭게 외쳤다.

그게 중심을 잡아줘야 할 내 역할이니까.

* * *

같은 시간, 한 커뮤니티의 아창 게시판은 곧 공개될 뮤비 티저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 두근두근 두근두근

- 위에 뷰어야 효과음 넣지 마 진짜 떨렼ㅋㅋㅋㅋ

- 조막만 한 것들이 이제 다 커서 데뷔를 하네 ㅠㅠㅠㅠ

- 조막이라기에는 너무 큰 우리 애들…. ㅋㅋ

인지도 있는 그룹들처럼 게시판 페이지가 새로 고침 할 때마다 넘어가는 수준의 화력은 아니었지만, 아창 방송 날이 아닌 오늘도 이렇게 팬들이 글을 남기는 건 순전히 뮤비 티저 때문이었다.

우빈의 제명으로 인해 루머와 여러 카더라가 돌았다.

그리고 팬들의 의혹이 최고조로 증폭됐던 시점, 회사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계약 위반 사항이 발생하여 급하게 계약을 해지했다는 내용과, 남은 멤버들까지 피해 입는 것이 우려되니 추측성 발언을 자제해달라는 발표였다.

예정되어 있던 최종 멤버 투표가 사라지고, 데뷔 앨범의 센터 자리 투표가 진행되었지만, 한동안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빈의 팬들은 지속적으로 회사에 항의했고 여러 게시판과 소셜 커뮤니티에서 의혹을 제기했다.

그럼에도 회사는 다른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고, 당사자인 김우빈도 어떠한 입장문을 발표하지 않아 사건은 그대로 묻혀버렸다.

당사자조차 별다른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공개 못 할 정도의 커다란 사고를 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 후 아이돌 창조에서 김우빈의 흔적이 빠르게 사라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멤버들이 보여준 케미와 중간중간 발생한 에피소드들로 전보다 더욱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 저번에 애들 바닷가에 있지 않았어? 컨셉 포토 촬영일까, 뮤비일까?

- ON 엔터는 무슨 생각으로 뮤비 티저부터 푸는 거지? 큰 그림인가?

- 아 이제 10분 남았어!!!!

- 첫 앨범인데 잘하자 정균찡···.

누구는 그동안의 방송을 토대로 컨셉이나 뮤비 내용을 추측했고, 또 어떤 누구는 박정균 대표를 소환하며 잘하자고 이를 악물었다.

팀명이 발표되고 여러 반응이 오가는 가운데, 방송 촬영을 통해 공개된 이름 후보였던 것들의 상태를 지적하며 박정균 대표의 이름 짓는 수준에 대한 열띤 토의가 오가기도 했었다.

아이돌 그룹 이름에 초월수가 웬 말이냐며, 인간의 센스가 아니라 도저히 인간계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그 와중에 언래블이라는 이름을 사수한 멤버들을 칭찬하기도 했고 거론된 다른 이름들이 아쉽다는 의견도 소수 있었다.

언래블의 모든 멤버들이 긴장을 떨치기 위해 시답잖은 장난을 주고받았던 것처럼, 내내 그들을 지켜보며 드디어 데뷔를 눈앞에 둔 팬들도 같은 마음의 사람들과 커뮤니티에 옹기종기 모여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는 순간, 언래블의 공식 사이트와 SNS에 짧은 영상이 하나 올라왔다.

환하다 못해 눈이 부신 백사장.

시원시원한 옷을 입고 그 위를 뛰어다니며 청량미를 마음껏 뽐내며 웃는 언래블의 멤버들은 누가 봐도 신나 보였다.

화면은 온통 총 천연의 찬란한 색으로 물들어 빛났고, 장면은 어느새 환히 웃는 멤버들이 캠프파이어 중인 모닥불 근처로 바뀌었다.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웃고 바닥을 치는 행복하고 따뜻한 장면이었건만, 영상을 보는 사람들은 내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배경으로 깔린 무거운 멜로디 탓이었다.

그리고 화면이 아이들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더니, 마지막 장면은 결국 새까만 어둠 속에 홀로 빛을 내는 작은 모닥불 하나였다.

그 위로 떠 오른 단어, ‘I'm OK’.

영상을 본 팬들이 득달같이 게시판과 SNS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이 느낌 감정을 함께 얘기해 줄 사람들을 찾아서.

- 님들 이거 봄? 나 왜 이거 보고 소름 돋았지···?

- 뭐야 왜 귀염 뽀짝한 애들이 뛰어노는데 무섭지 ㄷㄷㄷ

- 마지막 앵글 왤케 불길함 ㅠㅠㅠㅠㅠㅠ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영상미가 괜찮은 걸 보니 ON 엔터가 작정하고 돈을 좀 쓴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 근데… 그래서 타이틀곡이 어떤 노래인 거야?

- 배경으로 깔린 멜로디는 너무 무겁지 않아? 그게 타이틀이야??

- 아 그럼 망인 거 같은데···.

여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이 반응을 체크하는 홍보팀 직원들은 씩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어차피 아이돌 창조 자체가 인지도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돌 팬덤은 자기들끼리 원하든 원치 않든 수많은 소문들을 주고받게 되어 있으니, 호기심을 자극했다면 적어도 일차적인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물론 덮어놓고 까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당한 선은 모두 흐린 눈으로 볼 수 있는 멘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심한 것들은 다 챙겨놔. 나중에 법무팀에 가져다줘야 하니까.”

ON 엔터는 악플러들과의 전쟁에서 언제나 자비 없는 행보를 보여왔다.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느니 그 돈과 시간과 정성을 팬에게 쓰는 게 회사에도 훨씬 이득이라는 게 대표의 지론이었다.

“애들은 어쩌고 있대요?”

“우리가 있어봤자 더 눈치 볼 거 같아서 오늘 밤은 그냥 푹 자라고 보내놨어요.”

홍보팀 팀장과 함께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피던 소현 팀장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옆에서 완전히 퍼져버린 정우진 매니저의 모습에 안쓰러움이 스쳤지만 잠시뿐이었다.

“잘 됐으면 좋겠네요.”

“잘 되겠죠. 우리 애들 잘 될 거예요.”

평소 표정 관리를 유독 잘 하던 소현 팀장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묘하게, 생각보다 많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저, 멤버들을 믿는다는 말 외에는 지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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