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잊어버리지 마(4)
나와 멤버들은 카메라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이유로 소속사 선배님들이나 다른 선생님들을 통해 시선 처리 방법과 조심해야 할 것들을 추가로 배우고 있었다.
거기다 곧 봄방학도 끝나서 학교까지 가야 했다.
왜 배워야 할 건 끝이 없고 할 일은 점점 늘어만 가는지….
피곤에 절어서 겨우겨우 씻고 나니 로그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다만,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탓에 이미 다른 멤버들처럼 거실 바닥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었지만.
“아니, 왜 자꾸 방 놔두고 여기 다 이러고 있는 거야.”
제일 먼저 씻고 나온 하준은 어느샌가 자기 다리를 베고 누워있는 영빈과 그런 영빈의 배 위에 엎어진 힘찬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얘들아, 들어가서 쉬어라….”
“쫌만여….”
“지금 딱 좋게 편한데.”
“맞아, 이렇게 좀 있다가 드갈래요.”
“이놈시키들아, 제발 말좀 들어라!”
리더가 뭐라고 하든 간에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던 우리였지만, 타이틀곡 소식에는 전부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타이틀곡이라니!
사건은 이러했다.
그날 우리와 신나게 놀고 돌아간 가영이 팀장님을 통해 넘겨받은 컨셉 설정 자료를 계속 읽어보다 갑자기 곡이 나왔다고.
곡이라는 게 그렇게 막 응? 그렇게 나오는 게 가능한 거였어…?
이게 범인과 천재의 차이점인가 싶어서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우리는 이게 진짜 현실이냐며 다 같이 벌떡 일어나 엉겨 붙어 방방 뛰었다.
‘타이틀곡이 생성되었습니다.’
김치통 속 다 쉬어가던 파김치 같던 애들이 팀장님의 전화 한 통으로 생생한 겉절이가 되는 마법.
“와, 미친 거 같아.”
“그게 말이 되는 거야?”
“그 형님은 아니, 무슨 곡이 막 뚝딱 나와?”
대충 가이드만 땄으니 멤버들이 부르는 걸 들어보고 싶다며, 가영이 내일 회사로 찾아온다는 얘기와 함께 통화는 종료되었다.
“진짜 가영이 형은 천잰가 봐!”
신난 힘찬이 영빈을 쥐고 흔들었고, 우리 불쌍한 영빈이는 힘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런 멤버들이 귀여워 피식거리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다 우연히 하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순간의 감정을 봐버렸다.
실망인지, 걱정인지, 그도 아니면 안도인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지만, 모른 척 섣불리 스킬은 사용하지 않았다.
멤버들의 속마음을 읽는 건 되도록 하지 말자고, 그렇게 나 자신과 타협했던 참이었다.
순수하게 언래블을 응원하고 동경하던 내 마음이 알량한 호기심 때문에 그 색을 잃는 게 꺼려졌기 때문이었다.
“어우, 정신이 확 깨네. 로그 찍고 올게요.”
타이틀곡이 어떤 곡일지 기대된다며 거실 바닥을 구르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경환과 힘찬을 피해, 곡예를 하듯 발을 옮겨 방으로 향했다.
짧은 시간 동안 제법 익숙해진 이 작고 투명한 화면과 그 너머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잠시 멍하니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게 되었다.
“음, 오늘은 그냥… 제가 최근에 느꼈던 감정들?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해볼까 해요.”
몇 번이나 단어를 고르느라 입술을 달싹이고 괜히 머리카락도 만지작거리고.
무릎에 손을 얹었다가 괜히 꼼지락거리면서 전할 말을 열심히 골랐다.
“여러분들이랑 저는 아직 이 작은 카메라 렌즈 너머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거잖아요? 저도 원래는 여러분들이 있는 그곳에 있던 사람이고요. 물리적인 거리는 이렇게나 멀고 먼데, 이상하게 되게 가깝게 여겨져요. 제가 좀 이상한 소리 하죠?”
약간의 진실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진 내 스스로를 향한 기만.
어쩌면 이전의 나와 아이돌 연습생 사이의 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바라보는 순수한 팬들에 대한 기만일지도 모르겠다.
“하루빨리 만나고 싶어요.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것들도 보여주고 싶고. 서로 보지 않고도 이렇게 가깝게 느껴지는데 만나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해요.”
이전의 공지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공지환이 이런 말을 하는 게 괜찮은 일일까?
“앨범 준비를 위해 모두가 애쓰고 있고 저도 열심히 구르고 있어요. 그러다 갑자기 어젯밤엔가?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곧바로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제가 비난하고 있더라고요.”
손을 들어 만져본 입술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낮에 영빈이 형한테 이 얘기를 했어요. 무슨 얘기를 하다가 말한 건지 기억이 안 나는데, 형이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형이 그러더라고요. 너라도 네 편이 되어주라고.”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하는 목소리가 무심하게 툭 던진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영빈은 모를 것이다.
생전 안 하던 것들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느라 지쳐있었던 나는 죽다 살아난 주제에 이런 걸로 힘들어하면 어떡하냐고, 배부른 소리라고 나를 몰아붙였는데.
“영빈이 형이 말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닌데. 음…. 가끔씩 핵심을 쿡 찌를 때가 있거든요? 그 얘기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더라고요. 그 말이 전 되게 좀 어… 그러니까, 여기가 간질간질했어요.”
심장께를 꾹 누르며 웃었다.
사실 가슴뿐만 아니라 손끝도, 목구멍 안도 전부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서 영빈을 끌어안을 뻔했었다.
부끄러워서 그만뒀지만.
“그래서 우리 팬분들에게도 말해주고 싶었어요. 우리 모두 스스로의 편이 되어주자고. 그리고 우리가 여러분들의 편이 되겠다고.”
예전에 경환이 어떤 리얼리티에서 비슷한 말을 했었던 게 기억났었다.
가뜩이나 각박한 세상인데 내가 나를 지지하지 않으면 너무 슬프다면서, 언래블과 솜뭉치는 적어도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자는 얘기였다.
순하디순한, 커다란 멍뭉이 같던 애가 유순하게 웃으면서 저 말을 하는데, 그게 나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되는 대로 무기력하게 살던 나 같은 사람도, 내 피붙이가 아닌데도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아 오늘 말 되게 두서없다. 그쵸? 맨날 자기 전에 여러분들한테 두런두런 얘기하다 보니까 여러분들이 편하고 익숙해졌나 봐요, 하하. 아, 그런데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아요. 말해도 되나? 안 되겠지? 제가 워낙 스포를 해서 형한테 혼났거든요. 내일 매니저 형한테 물어보고 말해줄게요!”
그룹의 이름이 정해진 것을 말해도 될지 안 될지 몰라서 잠시 갸웃거리다 마음을 접었다. 혼나는 건 싫으니까.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실제로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카메라 위를 쓰다듬는 시늉을 하다 피식 웃어버렸다.
“다른 사람이 머리 만지는 걸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으니까 이렇게 우리 영상으로만 해요. 이건 괜찮죠? 그럼 전 이만 잘 준비하러 가볼게요. 안녕!”
카메라를 끄고 거실로 나와보니 아직도 거실 바닥을 점령하고 있는 한 덩어리들이 보였다.
“아니, 도대체 왜 여태 이러고 있는 건데….”
“너도 여기 누워봐. 이거 왠지 되게 마음이 편해져.”
체념한 듯한 하준의 표정에 과연 정말로 마음이 편해질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경환이 귀여워서 못 이기는 척 힘찬의 배 위에 엎드렸다.
“엌! 야, 힘 빼고 누워!”
“아, 죄송. 너무 사심 섞였네.”
툭 하고 누워버렸더니 이상한 소리와 함께 힘찬이 꿈틀거려서 그 모습을 본 경환과 세빈이 좋다고 웃었다.
이런 철없는 우리의 모습에 하준과 영빈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부처님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라?
힘을 쭉 빼고 늘어져 있는데 이게 정말 생각보다 마음이 편해서 이대로 잠들어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의 체온이 안정 효과가 있다는 게 이렇게 사실로 드러났네.”
“그래서 원숭이들도 서로 그렇게 맨날 붙어 있나 보다.”
“우리가 원숭이 수준이라는 건 아니지?”
“찔렸다면 죄송요.”
“얘들아, 그래도 잠은 침대에 누워서 자자….”
우리 모두 하루하루 해야 할 것과 배울 게 너무 많아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회사에서 살아야 했지만, 하준이 늘 강조한 대로 잠은 숙소로 돌아와서 잤다.
하준이 숙소에서 자라고 했던 건 자기 침대에서 자라는 말이었겠지만, 오늘은 그냥 이대로 시답잖은 헛소리들을 나누다 잠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백경환. 눈떠. 야! 영빈아, 세빈이 좀 침대로 끌고 가봐. 쟤 잔다.”
말 안 듣는 동생 놈들을 키우느라 고생하는 형 라인에게 애도를. 허허.
* * *
다시 그 회의실에 모인 우리는 이제 연습실만큼 회의실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회의실이 익숙해지는 게 왠지 무섭지 않냐?”
“어, 쫌. 음… 이건 아닌 것 같아.”
“나는 연습실이나 작업실이 더 좋은 것 같아….”
회의실 테이블 위에 늘어진 우리는 아직도 잠에 취해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경환과 세빈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이 둘은 워낙 잠이 많아서 늘 끌고 나오는 게 힘든 멤버들이었는데, 어젯밤에는 우리끼리 좁아터진 거실에서 엉겨 붙어 장난치느라 더 늦게 잤으니 졸릴 만도 했다.
“그러게 내가 침대 가서 자랬잖아, 이 웬수들아.”
꾸벅꾸벅 조는 세빈을 하준이 깨우던 그때, 팀장님과 가영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 얘들아!”
“안녕하세요!”
활기차게 문을 열고 들어온 것과 달리 가영의 얼굴엔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와 있었다.
이 사람은 그 사이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활기찬 목소리와 달리 음울해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에 흠짓 몸을 떨었다.
뭐야, 저 사람 무서워….
“샘플 파일을 먼저 받아서 우리끼리 들어봤는데, 회사에서는 이 곡이 너희 타이틀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판단했어.”
우리는 회사에서는 거의 확정한 거나 다름없다는 말에 귀를 쫑긋거렸다.
방금 전까지 거의 수면 상태였던 경환과 세빈도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아, 일단 가사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라인만 잡은 거라. 근데 이게 너희 목소리랑 맞을지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어젯밤에 바로 전화한 거야. 일단 허밍으로 대강 느낌이라도 봐야 할 것 같아서. 자, 얘들아, 이동하자.”
“네!”
그리고 가영의 성향을 몰랐던 우리는 그 뒤로 긴 시간 동안 작업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멤버들의 목소리를 몇 번이나 들어보고 어울리는 악기를 확인하면서 즉석에서 가사를 써 내려가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헐….”
“되게 좋은데 이게 나쁘지 않은 정도예요?”
“더 손대면 지금 느낌이 죽을 거 같아서.”
그렇게 나온 타이틀곡을 들은 각 팀의 팀장님들과 실장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파일을 가져갔고, 나는 이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내 목숨이 줄어들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무서워, 넉살 좋은 유쾌한 형아 어디 갔어….
그래도 가영의 곡을 받기 위해 애썼던 내 노력이 가치가 있었던 것 같아서, 뿌듯한 얼굴로 소파에 퍼져있는 다른 멤버들의 몸 위로 철퍼덕 널브러졌다.
”지환아? 너 지금 표정이 어… 그러니까 성불할 것 같은 표정이야.”
간신히 눈에서 광기가 사라진 유쾌한 형님이 내 얼굴을 보며 남긴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