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8)화 (28/456)

28. 잊어버리지 마(3)

“우리 먼저 소개할까?”

“그럼 형부터 해.”

“이럴 때만 리더 찾지.”

우리가 먼저 인사를 하려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자, 손님이 먼저 인사를 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가영이 웃었다.

“음, 밴드 아이돌… 같은 걸 하고 있고, 그룹명은 새벽. 아, 근데 본명 말해야 되냐, 예명 말해야 되냐.”

씩 웃으며 자기소개를 시작한 가영이 이름을 말하려다 멈칫했다.

자기가 먼저 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놓고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진 가영의 모습.

그 모습에 세비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세비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저 질문을 먼저 말해줘서 고마웠다.

당장 나도 뭘 말해야 할지 고민됐었거든.

“그냥 본명 말해. 어차피 방송 아니잖아.”

세상 쿨하게 리더를 툭툭 치며 막내 온탑을 보여주는 키스의 모습에 세빈이 눈이 순간 번뜩였다.

안돼, 세빈아. 그런 거 배우는 거 아냐. 아직은 참아줘라.

슬며시 스윽 팔을 뻗어 세빈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세빈에게 살짝 고개를 저어주자, 똑똑한 우리 세빈이는 내 뜻을 이해했는지 해맑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정말 이해한 게 맞겠지?

적어도 나는 우리 세빈이만큼은 이대로 착하고 바르고 귀엽게 자라줬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좋아했던 언래블의 세빈이도 착하고 바르고 귀여웠지만… 성장기 버프로 인해 너무 무럭무럭 자라버려서 웃으며 영빈을 깔고 앉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얼굴은 귀여운데 몸은 귀엽지 않았지.

순간 떠오른 아련한 추억을 머리를 흔들어 떨궈낸 나는 다시 인사를 이어가는 가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름은 한가영이고, 우리 외할아버지가 작명소에서 비싸게 주고 사 온 이름이야. 하하, 이름 가지고 놀리면 지옥을 보여주지.”

“아, 형. 쫌….”

“새벽에서 리더를 맡고 있고 포지션은 보컬. 작사&작곡도 하고 있어.”

다른 건 모르겠지만 가영이 굉장히 유쾌한 사람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물론 그 탓에 멤버들에게 자주 잔소리를 듣는 것 같았지만.

“새벽 소속이고 베이스 치고 있어요. 본명은 이세율이에요.”

“키보드랑 일렉 둘 다 하는데 노래도 해요. 김윤혁입니다.”

세비는 친절해 보였고, 키스는 약간 낯을 가리는 타입인가 싶었다.

“안녕하세요, 언래블 리더 민하준입니다. 랩도 하고 작곡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언래블 김영빈입니다. 보컬이에요.”

“백경환입니다. 하준이 형처럼 랩이랑 곡 써요.”

“최힘찬입니다! 춤은 조금 자신 있고 노래는 살짝 자신 없어요.”

줄줄이 인사하는 내 새끼들을 보자 자기 성격처럼 소개한다 싶어서 작게 한숨이 나왔다.

최힘찬은 나중에 따로 교육 좀 시켜야겠다. 후.

“안녕하세요, 공지환입니다. 언래블에서 잔소리를 담당하고 있고요, 노래 부르고 작곡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언래블 막내 강세빈입니다. 춤이랑 노래하고 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세빈이는 또 눈이 자꾸 반짝거린다.

아무래도 키스와 붙어 있지 못하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야, 역시 아이돌 지망생들답게 다들 훤칠하네요.”

…라고 이목구비 자기주장이 매우 뚜렷한 조각상이 말했다.

세비는 미남의 정석이라고 불릴 만큼 이목구비 뚜렷한 잘생긴 얼굴을 갖고 있었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우 놀랍게도 자신의 얼굴이 평범하다고 믿고 있었다.

형제들 중에는 세비가 가장 평범하게 생겼다고 했던가?

그런 성격으로 아이돌 밴드를 하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를 꼬시기 위해 가영이 매우 고군분투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이해가 됐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저희가 회사에서 들은 얘기가 없어서 그러는데, 여러 가지 다 여쭤봐도 되나요?”

약간의 우려를 담아 하준이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지자 키스가 씩 웃었다.

“진짜 다 물어보셔도 돼요. 저희도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말해드릴게요.”

“맞아, 그 누구지? 환영 소녀들? 거기 리더랑 WWW 보컬이랑 사귀는 건 리얼이에요.”

“네…?”

갑자기 가영이 회의실 안으로 폭탄을 떨어트렸고, 우리는 모두 멍청한 얼굴이 되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가영아, 잠깐만 따라 나와볼래?”

“어?”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세비는 그대로 가영의 뒷목을 잡아 회의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곧 무언가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잘못했어!’라는 외침이 들려온 것 같았다.

“신경 쓰지 마세요. 자주 있는 일이에요.”

“하, 하하…. 네….”

“근데 저 말 진짜예요?”

“찬아…?”

분위기 파악 못 한 힘찬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가여운 비명소리보다 폭탄 발언의 진위 여부가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세비가 지었던 미소와 비슷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준의 표정에 입을 틀어막았다.

“후, 죄송해요. 저희 애가 철이 좀 없어서.”

“괜찮아요. 궁금하기도 하겠죠. 맨날 누가 사귀네 아니네 말 많은 게 이 바닥이잖아요. 언래블 분들도 조심해요. 잘못 엮여서 괜히 소문나면 매장은 순식간이더라고요.”

키스는 손을 휘휘 저으며 자신이 봤던 여러 소문들의 비하인드를 들려주고 멤버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기 전에는 절대 연애해도 들키지 말 것, 공개 연애는 되도록 정말 연차 차도 하지 말 것 등등.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들이었다.

솔직히 멤버들이 30대가 넘어가면 팬들도 어느 정도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연애를 모른척해 주는 분위기가 생긴다.

좋은 사람을 좋게 만나는 것을 지지해 주기도 하고.

하지만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한참 열심히 일해야 할 때에 열애설에 휩싸이면… 그 순간의 배신감은 차마 말로 다 표현 못 할 것들일 게 뻔했다. 자기가 속한 그룹을 박살 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연애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다.

어차피 내 기억 속의 언래블은 아이돌 중에서도 유명한 철벽들이라 열애설이 한 번도 났던 적은 없었다.

아이돌이 정말로 팬들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적어도 내 팬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곧이어 들어온 가영과 세비가 모른 척 자리에 앉았지만, 가영의 얼굴이 그사이 수척해진 것은 왜일까.

아냐, 알려고 하지 말아야지. 세상엔 모르고 지나가는 게 더 나은 일들이 수두룩했다.

“작곡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네요. 그건 좋은 거 같아요. 당사자가 제일 잘 알잖아요, 자기 그룹에 대해서는.”

세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긋 웃으며 우리에게 칭찬을 했다.

언제나처럼 칭찬에 약한 우리 멤버들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조금씩 내적 친근감을 키웠는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시퀀서는 어떤 거 쓰세요? 저는 큐베이스 쓰는데 로직이 좋다고 하더라구요.”

“녹음할 때 마이크는 어떤 게 괜찮아요?”

“마스터 키보드랑 신디랑 차이 많이 나요?”

그리고 순식간에 쏟아진 질문의 홍수에 새벽 멤버들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한바탕 웃더니 성심성의껏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그 질의응답에 끼지 못한 다른 멤버들은 무대에 올라설 때 많이 긴장되는지, 정말 대기실에서 기 싸움이 심한지 등등 자신들의 미래에 연관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당황과 놀람이었지만, 성격 좋은 우리 멤버들은 이내 새벽 선배님들과 유익하고 알찬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와, 이 친구들 되게 적극적이네. 좋구만?”

“다음에 형 작업실 놀러 가도 돼요?”

“언제든지 와! 환영할게. 아, 앨범 준비는 잘 돼가?”

가영에게 형, 형 하며 열심히 질문하고 사근사근하게 대한 덕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 괜찮은 인상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아뇨…. 컨셉은 잡았는데 곡 선택이 어려울 것 같다고 팀장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어떤 컨셉이길래 그래?”

드디어 기다리던 대상이 미끼를 물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쓱 하고 옆자리로 다가가 우리 컨셉에 대해 설명하며 여러 가지 양념을 치기 시작했다.

“A&R 팀에서 저희 곡들을 들어보고 싶다고 하는데 전 이제 기어 다니는 수준이라….”

“첫 앨범 컨셉으로는 좀 빡센 걸 잡았네. 근데 재밌겠는데?”

“그쵸? 그거 지환이 형이 얘기한 거예요.”

키스와 신나게 얘기를 하던 세빈이 나와 가영의 얘기에 귀를 쫑긋하더니 한마디 거들었다.

“회사에서 꽤 작정하고 준비해 주는 것 같네.”

“이거 봐봐, 재밌겠지?”

외부인에게 우리 컨셉을 알려주는 건 원래대로라면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이지만, 나는 그 부분에 대한 위험성을 감수하기로 했다.

대표님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인데다가 이들의 흥미를 끌어 곡을 받게 되면 우리로서는 더욱 이득일 게 뻔해서 놓칠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형이 만들었던 곡 같은 그런 느낌이면 좋을 거 같아요. 왜, 그 어스름과 황혼 사이라는 곡 있잖아요.”

“너 그 곡도 알아? 야 진짜 찐팬이었네. 이거 내가 만들어볼까?”

그리고 드디어 가영의 입에서 내가 가장 기다리고 원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어? 정말요?”

“회사에서 내 곡을 받을지는 모르겠는데, 컨셉이 되게 마음에 들어.”

“우와, 그래 주시면 저희는 진짜 감사하죠!”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나는 가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리 애들은 환한 미소를 숨김없이 드러냈고, 덜컥 일을 받아버린 리더를 바라보는 새벽 멤버들은 해탈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있어 봐, 아저씨한테 전화해보자.”

그리고 그 후는 일사천리였다.

가영이 언래블 멤버들이 마음에 들어 곡을 하나 써보고 싶다고 말하자 박정균 대표는 바로 하준을 바꿔 달라고 하고는 가영에게 컨셉에 대해 설명해 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표와의 통화가 끝난 가영은 나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네가 먼저 말했다고 하면 너 나중에 끌려가서 엄청 깨질 거 같아서.”

“형… 고마워요!”

“별말씀을. 잘되면 나도 너희 덕에 저작권료 좀 땡기는 거지, 뭐.”

이렇게 오늘도 무사히 아이들의 앞날에 꽃길을 깔기 위한 내 노력은 빛을 발했고, 나는 속으로 외쳤다.

얘들아, 내가 해냈어! 대어야!

그 이후로도 여러 조언과 이야기가 오고 갔고, 휴대폰 번호를 묻는 가영의 질문에 우리는 길 잃은 강아지 같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아…. 너희도 폰 압수야?”

“네. 회사 연락용으로 하준이 형한테 폰 있긴 한데….”

“쯧, 그거 뭐 폰 갖고 있다고 딴짓할 애들도 아니구만.”

못마땅한 듯 중얼거리던 가영은 컨셉 설명이 있던 종이를 찢어 거기에 자신의 번호를 적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세비와 키스도 가영의 펜을 뺏어 들더니 자기들의 번호를 적었다.

“혹시라도 못난 우리 리더가 괴롭히거든 우리한테 말해.”

“맞아. 저 인간은 너무 받아주면 끝없이 구니까 잘 쳐내고.”

아무래도 리더는 몰아야 제맛인 게 아이돌계의 법인 것 같았다.

얼마 후 들어온 팀장님은 우리와 새벽 멤버들이 어느새 말까지 놓은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친해졌으면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는 가영의 주장에 따라 사내 식당까지 함께 했다.

비록 먹을 수 있는 메뉴는 아주 많이 달랐지만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새벽의 멤버들은 돌아가고 우리는 보통의 날과 같은 시간을 보내며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틀 뒤 저녁, 숙소에 널브러져 있던 우리는 팀장님을 통해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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