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7)화 (27/456)

27. 잊어버리지 마(2)

언래블의 모든 멤버가 당황하던 그때에도 팀장들은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이 한껏 놀란 얼굴로 두 눈이 휘둥그레질 것을 생각하니 절로 피식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여러모로 언래블 멤버들은 소현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물론, 본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소현 팀장님,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남이사.”

같이 면접을 보고 같이 합격한 소현과 주영은 입사 동기였다.

소현은 주영이 자신과 상극의 사람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에 그녀와 얽히고 싶지 않았고, 다행히 기본 업무에 대한 교육 후 바로 팀이 갈려 마주할 일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둘 다 면접 때부터 정윤 실장의 눈에 들었던 사람들이라, 회사에서는 입사 동기끼리 친하게 지내라며 압박 아닌 압박을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아이돌 그룹을 만들겠다고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소현이 얼떨결에 그 팀을 맡아 동분서주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애들을 하나씩 끌고 데뷔 코앞까지 와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일 많이 부딪혀야 할 사람이 이쪽이었다.

주영은 가뜩이나 좀 건들건들한 성격이라 되도록 엮이지 않으려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이 그렇게 뜻대로 굴러가진 않았다.

길고 길었던 회사 생활을 떠올린 소현이 한숨을 푹 내쉬자 나란히 걷던 주영이 물었다.

“애들은 뭐래요?”

“엄청 좋아하죠. 방방 뜨고 난리도 아니에요.”

“애들이 조금만 더 적극적이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얘기하다 말고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한 중얼거리던 주영에게 소현이 아이들의 의견을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타이틀은 어떻게 돼가요?”

“쉽지 않죠. 너무 어려운 걸 잡았어. 하… 욕심이 너무 컸나.”

“우리 애들 목숨이 달린 거니까 잘 부탁해요.”

대형 기획사도 아니고 관심을 끌어줄 아이돌 선배 그룹도 없는 상태에서 타이틀부터 빵 뜨기에는 돌판이 만만치 않다는 건 알지만… 욕심이 일었다.

“최선을 다해야죠. 애들한테 곡 작업한 거 있으면 다 메일로 보내라고 해주세요.”

“네, 말해놨어요.”

* *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요!”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하준이 눈앞에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조건반사처럼 나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도 하준을 따라 꾸벅 인사를 건넸다.

이것이 주입식 교육의 장점이라면 장점일까…?

당황해서 정신을 놔도 몸은 여태까지 교육받은 대로 깎듯이 인사를 잘 해냈으니.

우리 눈앞에서 활기찬 인사를 건네는 이 사람들은 아이돌 판에서 핫한 그룹 ‘새벽’이었다.

첫 앨범부터 모든 곡을 멤버들이 작사, 작곡, 프로듀싱까지 전부 맡아서 했던 그룹이었다.

실력파 그룹이라 예능이나 다른 광고 없이 입소문만으로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어 차트를 역주행시킨 걸로도 유명했다.

친구들끼리 밴드로 시작해서 작은 기획사를 통해 성장한, 소위 말하는 대박을 친 그룹.

한참 잘나가던 시절에 돌연 멤버들이 군대에 입대해버려 갑자기 군백기가 생긴 그룹.

그들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했지만, ‘새벽’의 멤버들은 그런 상황에 크게 개의치 않을 만큼 자유분방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멤버들과 나는 우물쭈물하면서 슬금슬금 회의실 한쪽으로 모였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

“형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와 소현 팀장님 통수….”

하준을 제일 앞에 세운 우리는 그의 등 뒤에서 작게 소곤거렸다.

“정균 아저씨가 여기 회의실에 있는 친구들이랑 얘기도 좀 하고 도와주라고 해서 왔어요.”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손님이 왔는데도 정신을 못 차렸네요.”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조금은 눈치챈 하준이 그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고, 우리는 그런 리더를 또 따라 했다.

지금 우리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걱정과 함께 쭈구리 같은 모습의 우리 애들을 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짠 내가 나는 것 같아 조금 슬퍼졌다.

부디 가요계 대선배님들께 첫인상부터 말아먹은 게 아니길.

정신없는 와중에 그나마 우리가 믿을 만한 사람은 리더 밖에 없었나보다.

눈앞에 보이는 하준의 등이 오늘따라 듬직해 보였다. 역시 이 시대의 참 리더.

대표님을 옆집 아저씨 이름처럼 부르며 웃는 ‘새벽’의 리더 가영을 보며 애써 정신을 수습하고 있던 그때, 머릿속에 무언가 번쩍하고 한줄기 번개가 내리쳤다.

어…?

이전의 언래블이 모 방송사에서 처음으로 1위 했던 곡을 ‘Dawn’이라는 작곡가가 만들었다는 것과 Dawn의 뜻이 새벽이라는 게 연달아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인생 2회차의 감이 격렬하게 알림을 울리고 있었다.

이 사람을 잡아야 한다고. 이 사람에게 곡을 받아야 언래블이 성공적인 데뷔를 할 수 있다고.

“여기 앉으세요!”

하준의 등 뒤에서 빼꼼 얼굴만 내밀고 있던 나는 재빨리 앞으로 나와, 아직 서 있는 새벽의 멤버들에게 의자를 권했다.

등 뒤로 우리 애들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졌지만 깔끔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얘들아, 이게 다 너희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어떤 곡으로 어떤 무대를 만들고 어떤 뮤비를 찍느냐에 따라 우리 애들의 앞길이 갈릴 텐데 이 정도 시선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회의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우리의 반대쪽 자리에 새벽 팀을 안내하고, 아직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우리 애들을 한 명씩 자리에 앉혔다.

“저희가 워낙 경황이 없어서 귀한 손님들이 오셨는데 자리 안내도 안 했네요.”

“괜찮아요. 와, 동생 성격 엄청 좋은가 보다.”

“너무 놀라서 바로 못 알아뵀는데 새벽 선배님들 맞으시죠?”

“어? 우리 알아요?”

“어떻게 모르겠어요. 저 선배님들 노래 ‘회색 나무’ 되게 좋아해요.”

실수하지 않도록 이번에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이 시기 이전에 있었던 곡, 그것도 리더인 가영이 가장 아끼는 곡의 제목을 떠올려냈다.

“저희 보컬 트레이닝 받을 때 선배님들 노래로도 많이 연습했어요.”

“맞아요, 쌤이 저희한테 밸런스 되게 잘 잡힌 곡이라고 엄청 칭찬했거든요.”

“진짜요? 아, 되게 부끄러운데….”

멍하니 나를 지켜보던 멤버들도 그제야 정신 차렸고, 흡사 좋아하는 연예인을 면접 자리에서 만난 사람처럼 맞은편의 선배님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대한 의아함과 동경, 선망 등 두근거리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멤버들의 눈빛을 읽은 새벽 멤버들도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행히 평소에는 그렇게 낯을 가리던 세빈이도 눈을 빛내며 팬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황해서인지 갈피를 못 잡던 하준도 평소의 페이스를 찾아 세빈의 말을 거들어주고 있었다.

“대표님 덕에 저희가 이렇게 계를 타네요.”

“에이, 너무 띄워주신다. 그냥 편하게 해요, 편하게. 진짜 여러분들이랑 얘기도 좀 하고 잘 지내라고 초대해 주신 거예요.”

인생 30년 차의 처세술이 이런 데서 빛을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쉬운 것은 내 쪽이었다.

다행히도 새벽 멤버들은 인성이 좋기로 유명했고, 멤버들이 숫기가 없는 편이라 서글서글하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인터뷰를 기억해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과거 세빈이도 이 그룹에 대한 애정을 담아 커버 곡을 올렸던 게 인연이 되어 이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우리 애가 추천해 주는 곡이니까, 라며 그들에 대한 정보도 찾아보고 제법 많은 노래를 듣고 인터뷰도 찾아봤었다.

감성적인 가사와 쓸쓸함을 자아내는 멜로디의 곡들도 있었고, 심장을 울리는 베이스와 일렉의 현란한 연주를 즐길 수 있는 곡들도 있었다.

우리 애들이 친하게 지내고 좋아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 없다는, 순 팬심에 근거한 믿음이랄까.

마음을 굳힌 나는 그들의 거리감 해제를 위해 해사하게 웃으며 먼저 말을 걸었고, 괜히 조금 더 긴장돼서 무릎 위에 얹어놓은 손가락이 자꾸만 꼼지락거렸다.

“좋아하던 선배님들을 뵙게 되니까 막 떨리네요.”

“선배 하니까 너무 딱딱하다. 선배 말고 형이라고 해요. 가영이 형, 이렇게.”

“가영이 형…?”

솔직히 불안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와 실제 성격이 전혀 다른 사람도 태반인 연예계였다. 내 단편적인 기억만 끼워 맞춘 것이 맞을지 어떨지도 몰랐고.

게다가 이전 삶의 내 나이보다 어린 사람에게 형이라 부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그가 부탁한 대로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아직까지 멤버들에게도 부를 때는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던 나에게는 나름대로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친근하게 대하려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가영은 생각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곧장 새벽 팀의 막내인 키스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봤어? 저게 바로 바람직한 동생의 모습이라고. 얼마나 사근사근하고 착해.”

“아, 좀! 쪽팔리니까 밖에서까지 주접떨지 마요, 형.”

“내가 오죽하면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이러냐!”

“내 이미지가 형 때문에 작살나고 있다는 건 알고?”

질색팔색하며 리더를 타박하는 막내와 허허하고 웃으며 모른척하는 세비의 모습이 어째서인지 낯설지 않았다.

순간 선배님들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 멤버들의 모습과 평소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빠르게 수긍할 수 있었다.

어디나 다 비슷비슷하구나. 하하….

“저희가 친해지려고 온 거긴 한데, 친구들한테 도움이 될만한 게 있으면 나누기도 하고 그러려고 온 거예요. 아무래도 저희가 먼저 겪었으니까.”

그 뒤로 한참 동안 리더와 막내의 투닥거림이 끝나지 않자, 세비는 결국 둘을 무시하기로 한 건지 우리를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저희가 인디 활동할 때 박정균 대표님과 우연히 인연이 닿아서 여러 번 신세 졌었거든요.”

당시에는 아이돌 그룹을 기획할 생각이 없었던 박정균 대표는 자신이 알고 있던 믿을 만한 소속사와 이들을 연결해 주었고, 그 후로 쭉 친분을 나누고 있다고 했다.

“자, 뭐든 물어봐요. 저희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말해줄게요.”

어느새 막내 키스를 떨쳐낸 가영이 우리를 향해 싱그럽게 웃었다.

하지만 모두가 잠시 잊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저기, 죄송한데요….”

“응?”

“저희 소개를 안 드려서… 저희 애들 인사부터 드리고 얘기 시작해도 될까요?”

“아…. 저희도….”

뻘쭘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던 하준이 어색한 웃음을 머금은 채 조심스레 물었다.

‘…!’

우리는 인사만 주고받았을 뿐, 통성명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에게 칭찬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민망함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마치 길을 가다 친구 뒷모습을 발견하고 신나게 등짝을 내리치며 인사를 했는데, 모르는 사람일 때의 기분이랄까…. 그 비슷한 마음이 뭉클 샘솟았다.

이 창피함이 회의실 모두가 한 명도 빠짐없이 나눠가질 만큼 넉넉해서 참 다행이었다.

세상에 허당도 이런 허당들이 없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