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잊어버리지 마(1)
결국 데뷔 앨범의 컨셉은 ‘두려움’으로 정해졌다.
대표와 이사회까지 함께한 회의에서는 우려 섞인 이야기도 나왔지만, A&R 팀의 김주영 팀장님이 강력하게 어필했다는 이야기도 살짝 들었다.
“덕분에 후보로 갖고 있던 곡들을 죄다 못 쓰게 됐어, 이 녀석들아.”
다음 날 아침 소현 팀장님이 회의실에 모인 멤버들 앞에서 한숨을 내쉬며 일이 자꾸만 쌓인다고 투덜거렸지만, 그녀의 얼굴은 말과 달리 어둡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룹의 목표가 뚜렷한 게 오래 살아남기 좋다고는 하더라. 스토리텔링이 대중에게 먹힐 거라는 예상도 있었고.”
오랜 투덜거림 끝에 한마디 툭 던진 말이 진심에 가까웠던 것 같았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나와 멤버들은 마지막에 가서야 흘러나온 그 한마디에 저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바빴다.
“웃겨? 아주 그냥 이것들이!”
“에이, 웃기다뇨. 좋아서 그러죠.”
그나마 입을 놀릴만한 게 나뿐이라 감사의 마음을 듬뿍 담아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진심이 모두 전해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진실이 묻히는 슬픈 현실에 안타깝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자 소현 팀장님은 코웃음을 쳤다.
“에휴, 내가 말을 말지. 이것부터 봐봐. 이게 컨셉이야.”
깊은 한숨과 함께 내밀어진 두툼한 종이뭉치에 멤버들은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지만, 금세 모두가 기쁜 얼굴로 종이뭉치를 각자 앞으로 끌어안다시피 가져가 표지를 매만졌다.
[Project Unravel]
그 이름 아래 그토록 바라고 고대하던 우리 여섯 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사람 - 하준(민하준)
감정 - Hiss(김영빈)
가족 - C.I(백경환)
편견 - 찬(최힘찬)
세상 - 환(공지환)
미래 - 세빈(강세빈)
우리가 표현해야 할 각자의 두려움과 그걸 담당해야 할 멤버들의 이름이 거창하게도 제일 앞장에 적혀있었다.
지난번 매니저 형이 예명으로 쓸 이름에 대해 묻기도 했고, 대표님과 얘기할 때도 예명 얘기를 하기에 다들 적어내긴 했었다.
다른 예명을 짓기 멋쩍었던 나는 이름 한 글자를 따서 적은 게 전부였고, 나와 힘찬의 것을 제외한 모든 이름이 내가 알던 예명 그대로였다.
그게 또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A&R 팀에서 너희들이랑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주제랑 엮었다고 했어. 혹시 다른 의견 있으면 지금 말하고.”
“…엄청 고생하셨겠네요.”
의견을 내는 것은 쉽지만 그걸 구체화하고 만들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저 추상적인 머릿속의 내용들을 말했을 뿐이고, 실제로 그걸 유형화한 건 A&R 팀이어서 새삼 그들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사이 다른 멤버들은 무언가 먹먹한 기분이 드는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저희네요.”
“진짜 데뷔하는구나, 우리….”
프로필 사진을 찍고 인터뷰 영상을 찍어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가슴 한편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제대로 된 팀명과 예명, 컨셉이 상세히 적힌 종이 뭉치가 각자의 품에 주어지자 그제야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럼 가짜로 데뷔하니? 얘들아, 정신 차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오늘도 할 게 태산이야.”
괜히 툴툴거리는 팀장님도 왠지 눈가가 촉촉한 것 같아서 우리는 마주 보고 웃어버렸다.
“왠지 각자 맡은 컨셉이 멤버들이랑 찰떡인 것 같아요!”
“크, 이거 대박 날 거 같은데요?”
“주접떨지 말고!”
다들 주섬주섬 한마디씩 꺼내더니 이내 손에 쥔 종이 뭉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보면서 들어. 일단 곡을 다시 모집하고 있어. 하준이나 경환이, 지환이 너희가 만들던 곡 중에 쓸만한 게 있으면 A&R 팀으로 가져오래. 안시영 대리님한테 가면 될 거야.”
“네?”
“전 아직 제대로….”
“참고만 하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뭐, 분위기가 맞으면 수록곡으로도 넣을 수도 있다고는 하셨어.”
그렇게 말을 하면서 부담 갖지 말라는 게 말이 되나요, 팀장님…?
당황해서 터져 나오는 말들을 막은 소현 팀장님은 콕 집어서 이름을 거론한 멤버들을 한 명씩 쳐다보며 말했다.
“이건 기회이기도 하니까 너희를 어필하란 말이야. 몸값은 알아서 올려야지. 그리고 너희가 얼마나 준비가 된 건지 회사도 알아야 서포트를 해줄 거 아냐.”
팀장님 말처럼 이건 기회였다.
하준이나 경환이 써둔 곡이든 멜로디든 회사에서 알아야 언제든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었다.
지금 앨범이 아니더라도 다음 앨범, 혹은 앞으로 있을 솔로 활동에라도.
“그리고 영빈이, 찬이, 세빈이도 혹시 곡이든 안무든 괜찮은 거 생기면 무조건 말해. 그래야 나도 회사에 얘기를 하지.”
멤버들의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요새는 사람들도 아이돌이 직접 무언가 해내는 것들에 대해선 무조건 까고 보진 않아. 물론 장벽은 훨씬 높을 거야. 그건 너희와 내가 감당할 몫이고.”
원래도 이렇게까지 멤버들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려고 했을까?
적어도 내가 아는 언래블은 개인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무던히도 회사 욕을 많이 했는데, 지금 팀장님이 말하는 내용은 내가 아는 그것들과 너무나 달랐다.
“너희는 너희 몫을, 회사는 회사 몫을 하자.”
이것도 내가 한 여러 행동이 가져온 나비효과일까?
문득 덜컥 겁이 났다.
나 때문에 언래블의 미래에 악영향이 생긴 건 아닐지.
첫 앨범이 지지부진했지만, 그 후로는 다들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잘 됐던 언래블이… 내 입방정 때문에 계속 망하면 어떡하지?
불안감과 초조함이 스멀스멀 발끝부터 타고 올라와 손가락 끝이 뻣뻣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팀장님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더했다.
“지환이가 작곡 공부 중이라며? 실장님한테 들었어. 그 곡이 대표님이나 다른 이사님들 마음을 돌리는 데 한몫했어.”
“네?”
하준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멤버들의 시선이 나한테 꽂혔다.
“안전하게 가는 게 제일 좋긴 한데, 더 적극적으로 투자해볼 만하다는 판단이 섰대. 아창 시청률도, 게시판 반응도 생각보다 호의적으로 변했어. 거기다 혼자 공부해서 만든 곡 치고는 작업 퀄리티도 좋았고.”
“이야, 지환이가 한 건 했네?”
“아니, 그게….”
“동생한테 발리기 싫으면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거 내가 만든 곡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 내 맘대로 바꿔버린 건데 하는 생각에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 내 모습을 부끄러워한다고 착각한 힘찬은 놀리기 바빴고, 영빈과 하준은 나를 새삼 기특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아, 그거 아닌데! 야! 아오!
이래서 사람이 죄짓고 살면 안 된다는 건가.
지은 죄가 막심한 나는 옛 선인들의 오래된 격언을 되새기며 심란해졌다.
“야, 우냐? 울어?”
“안 울어! 내가 왜 울어!”
나 때문에 발생한 소란으로 잠시 동안 시끄럽던 회의실은 팀장님의 정리로 간신히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 후로는 다행히 분위기도 풀리고 멤버들의 마음도 진정되었기 때문에 회의가 더욱 적극적으로 변했다.
회사에서 제시한 대략적인 방향과 앞으로의 아이돌 창조 방송 내용 등, 여러 내용을 전해 듣고 의견을 말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전에 솜뭉치들도 다들 얘기했던 내용이었지만, 리얼리티라고 해도 대본이 없는 건 아니었다.
대본이라기보단 찍어야 하는 스토리의 방향성을 참고할 수 있는 정도였지만. 100% 모든 반응이 진실일 리 없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물론 상황은 언제나 돌발적으로 발생했고, 그에 따른 멤버들의 반응은 날 것인 경우가 더 많았지만, 회사와 PD가 의도한 사건이나 분위기에는 아직도 면역이 부족했다.
정리된 내용을 확인한 팀장님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회의 끝나고 나가지 말고 여기 있어.”
“네? 저희 연습은요?”
“팀장님, 저희 배고파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있었다. 빨리 밥 먹고 연습실로 가려고 했던 우리는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장 제일 중요한 타이틀곡이 정해지지 않은 터라 우리 앨범을 위한 준비는 할 수 없었지만, 그걸 제외해도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시끄러, 이것들아. 내가 언제는 너희 밥 안 먹이든? 얌전히 있어.”
으름장을 놓은 팀장님은 멤버들의 투덜거림을 한쪽 귀로 듣고 흘려보내는 시늉을 하며 회의실을 나섰다.
“근데 지환아, 너 언제 작곡 공부했어?”
우리끼리 남아 한결 풀어진 분위기에서 각자 맡은 컨셉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던 나에게 하준이 물었다.
“어…. 그냥 예전부터 조금씩 했어요.”
“맨날 연습실에만 들어가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야.”
“그럼 계속 먼저 회사 간 게 그거 때문이었어?”
“우리한테도 말도 안 해주고!”
하준이 물꼬를 트자 여기저기서 질문과 투덜거림이 터져 나왔다.
아니, 얘들아. 너희 나한테 크게 관심 없었잖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아도, 멤버들이 먼저 다가와서 말을 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물건의 위치를 묻거나 잠들기 전 잘 자라는 인사나 식사 메뉴를 묻는 등 사소하지만 친밀함이 묻어날 법한 그런 이야기 들이었다.
당장 현실에 적응하느라 우리 애들이 나한테 친해지자는 호감을 표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동갑인 힘찬인 그나마 이전부터 말을 많이 섞었던 멤버였지만, 다른 멤버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두가 호감 어린 눈으로 먼저 말을 걸고, 장난을 걸어왔다.
이것도 스킬의 효과인가 싶었지만, 그것만으로 치부하기엔 스킬을 적용하지 않았던 멤버와 적용하지 않은 멤버의 차이가 없었다.
“우리 한 팀인데 너무하네!”
“맞아! 이제 숨기는 거 없기!”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부대끼다 보니 나조차도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변화였다.
그저 내가 더 노력하고 애쓰다 보면 거리감을 좁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너무 빨라서 알아채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전의 나는 보이는 모습만 보고 들리는 이야기로 짐작만 하며 애태우고 응원하던 입장이었다.
하지만 직접 대화하고 부딪히는 입장으로 변하며 겪은 시간들이 어느새 멀기만 했던 나와 멤버들 사이의 거리를 이만큼이나 좁혀주었다.
그런 스스로가 기특하고, 언래블이 새삼스럽게 너무 애틋해서 웃었다.
“아니, 다들 날 너무 좋아하네.”
“아, 뭐래. 미침?”
“전 형 좋아요!”
“얘 요새 못 잤어? 왜 눈뜨고 잠꼬대해?”
내가 피식거리며 던진 한마디에 질색하고 앉은 의자를 발로 미는 힘찬이도, 손을 번쩍 들고 자기 의견을 말하는 세빈이도, 어이없다는 듯이 보는 영빈도 너무 좋았다.
이렇게 우리 애들이 착하고, 마음이 따뜻한 애들이라고 어디다 후기라도 남기고 싶었다.
앨범을 그렇게 사도 팬싸 한 번 당첨되지 못했던 내가 이제는 그 앨범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지만 자랑할 곳이 없었다.
이럴 때 포잉이 있었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가장 마음 편하게 자랑할 수 있는 포잉은 오늘도 출타 중이었다.
흐뭇한 마음을 홀로 만끽하고 있던 그때,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다행히 상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마 조금 더 오래 이러고 있었으면 힘찬이나 경환이 한동안 내 근처로 안 왔을 게 뻔해서 너무 늦지 않게 정신줄을 잡은 걸 다행이라 여겼다.
“누구세요?”
하준이 나서서 예의 바르게 물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고, 회의실 밖에서 약간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열린 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에 우리 모두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올 거라 생각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