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5)화 (25/456)

25. EVERYDAY(6)

먼저 매를 맞은, 아니 먼저 촬영을 끝낸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남아있는 멤버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다음 타자인 하준은 그래도 카메라가 낯설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그만큼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했다.

부드러운 미소를 베어 문 입술이 원만한 곡선을 그려 다정다감한 그의 미소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포인트로 걸친 회색의 카디건은 짙은 코발트블루의 셔츠와 대비되었고, 늘씬한 하준의 핏을 따라 무심한 듯 툭 떨어져 차분하게 분위기를 잡아주었다.

“좋아요, 하준 군. 조금만 왼쪽으로 고개 기울여볼게요. 좋아.”

내가 촬영할 때부터 느낀 거지만, 이 작가님은 칭찬하면서 상대방이 긴장을 풀게끔 하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덕분에 하준의 촬영도 금방 끝이 났고, 이어진 영빈의 촬영도 순조로웠다.

붉은 장미 꽃다발을 무심하게 늘어트린 영빈은 옆으로 서서 고개만 살짝 돌린 상태로 카메라를 응시했고, 그 표정이 타고난 얼굴이 주는 섹시함을 더 돋보이게 했다.

“이야, 이 친구들 모델 출신인가? 다들 포즈가 엄청 좋네.”

“감사합니다.”

저희 애들이 칭찬에 매우 목말라서 그렇습니다. 하하

마지막으로 막내 세빈까지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그 후에 주어진 의상은 스포티한 느낌의 후드 집업과 파스텔 톤의 니트, 큼직하게 프린트된 티와 스냅백 등으로, 전체적으로 발랄한 느낌이었다.

다부진 체형의 경환이 깔끔하게 검은색 영문이 새겨진 노란색 니트를 입고 다양한 포즈를 취하자 작가님의 칭찬이 계속 쏟아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리는 존경과 탄사를 담아 메이크업 디자이너분들과 코디네이터분들을 바라봤다.

“이야…. 우리 경환이가 노란색이 잘 받는 줄 몰랐는데.”

“그러니까요. 숙소에서 입던 노란 티는 곰돌이 푸 같던데. 어떻게 저렇게 잘 어울리는 옷을 찾으셨어요?”

“풋, 다들 비율이 좋아서 옷 빨 잘 받을 거 같았어요.”

서로 초면인지라 조심조심 말을 걸던 우리에게 어느새 다가온 매니저 형이 말했다.

“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네. 앞으로 이분들이 너희 예쁘게 만들어 주실 분들이야.”

“어휴, 모자란 우리 애들 잘 부탁드립니다.”

“야! 내가 왜 네 애냐!”

“다들 너무 착해서 다행이에요. 우리 앞으로 잘해봐요.”

회사에서 전속 팀을 붙여주는 건 그만큼 거는 기대가 크다는 얘기고, 우리가 그만큼 뼈와 살을 불태워 잘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게 우리의 부채로 쌓이고 있을 터.

“그나저나 작가님 진짜 성격 좋으신 것 같아요. 우리 멤버들이 칭찬에 약한 거 어떻게 알았지….”

“우리 얼굴에 막 쓰여 있나? 칭찬해달라고?”

“그랬으면 트레이너 쌤들도 우리한테 칭찬해 주셨겠지….”

어림도 없는 소리를 주고받는 멤버들을 조금 측은하게 바라보던 하준은 허허롭게 웃었다.

“하준이 형, 지금 웃는 거 그거 같아. 그 뭐야. 허허, 내가 앞으로 이 팔푼이들을 어떻게 데려가지. 하는 그거.”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바라보던 하준을 향해 힘찬이 용감하게 한마디 했다.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니 매우 다행이구나.”

그리고 하준의 다정한 한마디에 격침당했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소리를….”

작게 혀를 찬 나는 벌써 세 번째 의상으로 갈아입고 촬영을 시작한 세빈을 바라보았다.

아직 덜 자라 앳된 얼굴이었지만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벌써부터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힘찬과 달리 어릴 때부터 무용을 배워온 세빈은 몸의 선이 굉장히 고왔다.

그래서 힘찬과 세빈이 같은 안무를 해도 볼 때의 느낌은 확연히 달랐고 그것이 언래블이라는 팀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가 되어 주었다.

루즈한 핏의 실크 셔츠를 입은 세빈이는 본인의 팔보다 조금 더 긴 셔츠를 걸친 탓에 손의 절반 정도가 소매에 가려졌다.

코디 분들이 다른 셔츠를 찾으려 하자 작가님이 다급히 지금 느낌이 좋다 말하며, 그대로 가자고 했다.

영빈이 붉디붉은 장미 다발로 자신의 섹시함 어필에 포인트를 주었다면, 세빈은 다 피어나지 않은 연분홍빛 튤립 한 송이를 늘어트린 손에 쥐고 있었다.

“우리 애가 이렇게 곱다, 고와. 팬분들이 보면 좋아하겠어.”

“지환아, 진짜 영감님처럼 말하지 마. 너 이미지 확 깬다….”

주변에서 뭐라고 수군대던 세빈과 작가님은 촬영에 여념이 없었고, 마지막으로 촬영에 나선 힘찬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까 후드티를 입고 스냅백을 쓴 힘찬은 누가 봐도 장난꾸러기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지금은 모델 같은 느낌을 뽐냈다.

어깨에 딱 맞는 짙은 회색의 차이나 카라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를 입은 모습은 쟤도 아이돌이었지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멤버들 중 유난히 몸이 좋은 힘찬과 경환은 몸에 딱 맞는 옷만 입혀도 태가 확 살아났다.

“힘찬 군, 표정에 힘 조금만 풀게요. 아니, 너무 웃진 말고.”

다만, 포즈나 표정이 다른 멤버들보다는 조금 어색해서 사진작가님과 긴 시간을 함께해야 했을 뿐.

“형, 쟤는 연기는 안 되겠는데요.”

“그러게. 우리 힘찬이는 열심히 안무 짜고 퍼포 만들어야겠다. 허허.”

어느새 내 옆으로 온 매니저 형에게 힘찬에 대해 말하자, 피식 웃던 매니저 형이 고개를 내저었다.

꽤 겁을 냈던 것과 달리 멤버들은 카메라 앞에서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어서 보는 내가 다 흐뭇했다.

“다들 걱정 엄청 하더니 엄살이었네.”

“네가 첫 타자로 그렇게 잘 끊었는데 형인 우리가 못하면 뭐가 돼.”

자꾸 우리 때문에 표정이 흐트러지는 힘찬을 위해 스튜디오 뒤쪽에 우리끼리 모여 앉았다.

“제가요?”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영빈이 어이없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카메라 앞에 서니까 아주 살판난 것 같더라. 무슨 생각 하고 그렇게 웃었어?”

“어…. 글쎄요?”

음, 너희들?

언래블을 떠올리고 있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덕질했던 언래블과 지금의 언래블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내가 더 잘해서 내가 더 열심히 해서 우리 애들이 욕먹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높이, 더 오래 날아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당사자들 앞에서 말하기엔 너무 낯간지러웠다.

이어진 단체 촬영과 유닛 촬영 모두 무사히 마쳤을 때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흘러있었다.

“와, 벌써 밤 다 됐네.”

“생각보다 시간 엄청 걸리는구나.”

체감상의 시간보다 실제 시간이 더 많이 흘렀어도 지치지 않고 촬영할 수 있었던 건,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신 덕에 너무 긴장하지 않고 촬영에 임할 수 있었던 점이 컸다

물론 프로필 사진 촬영으로 코앞에 다가온 데뷔가 더 실감 나서 텐션이 높아진 탓도 있는 것 같았다.

스튜디오 직원분들과 작가님이 우리 팀장님에게 굉장히 예의 바르고 착한 애들이라고 앞으로 종종 봤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남겨서 회사로 돌아오는 우리는 어깨가 들썩거렸다.

“지금처럼만 해. 앞으로 어떤 분들을 만나도 꼭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네엡!”

회사에서는 늘 인성이 좋아야 한다는 얘기를 강조했었고, 하준은 멤버들에게 틈나는 대로 자신이 겪었던 여러 연습생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재능이 뛰어나서 회사의 기대를 받던 사람들이 천둥벌거숭이처럼 굴어서 데뷔 앞두고 쫓겨난 일, 기껏 데뷔했다가 입 잘못 놀려서 그대로 사장된 그룹들 등, 그는 마치 연습생 역사의 산증인처럼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나’야 사람들과 친분도 못 만들고 늘 혼자 지냈지만 힘찬이나 하준은 회사를 거쳐 간 연습생들이나 이전에 알던 연습생들 등과 여기저기 꽤 친분이 있는 편이었다.

심지어 하준은 이미 데뷔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다른 그룹에도 친한 사람이 몇 있다고 했었다.

“우리 형, 인싸구나.”

“응? 인싸가 뭐야?”

아, 이 망할 놈의 주둥이가 또.

“그, 왜 아싸 반대말….”

“요새 애들은 그런 말 써?”

“하하, 그냥 친구랑 쓰던 말인데 저도 모르게 그만….”

거짓말이 거짓말을 부르고 이렇게 내 입은 또 실수를 하고.

“여하튼 형은 친구 많은 거 같다고요. 난 친구 없는데.”

“우리만 해도 네가 이렇게 주접 캐릭터일 줄 몰랐는데 오죽하겠냐.”

어설프게 웃는 나에게 경환이 한마디 툭 던졌고 다들 이전 ‘나’에 대해 성토하기 시작했다.

맨날 잘 웃지도 않고 얼굴 굳히고 있어서 말 걸기 힘들었다는 투덜거림부터 성격이 모난 줄 알았다, 저 성격으로 아이돌 할 수 있을지 걱정 많았다 등등.

“제가 잘못했으니까 그만 해요….”

내가 저지른 일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감당해야 할 업보니 작고 하찮게 쭈그러든 나는 회사에 도착해서 만난 다른 멤버들에게도 놀림을 당해야 했다.

분명 나랑 하준, 경환만 같은 차를 타고 있었는데 내려서 멤버들을 만나니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뭐야, 그쪽 차에서도 내 얘기했어요?”

투덜거리며 멤버들 뒤를 따르던 나에게 세빈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그것으로 모든 대답이 되었다.

내 편이 없구나, 내 편이 없어.

홍보를 위한 간단한 인사 영상은 회사의 회의실 하나를 비워서 찍는다고 했다.

한 명씩 간단한 인터뷰를 따고, 단체로 인사하고, 또 짧은 대화를 나누는 영상이었지만, 사진을 찍을 때보다 배는 더 긴장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대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아창을 찍을 때는 연습하는 모습, 우리끼리 대화하고 장난치는 모습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 영상은 정식으로 언래블이라는 이름을 달고 올라갈 첫 영상이었다.

모든 일정이 끝난 우리는 겨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연습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희한하지 않아? 평소엔 연습실 오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결국 편히 누울 수 있는 곳이 여기라는 게.”

“갑자기 짠 내 나는 거 같으니까 그러지 마요….”

경환과 힘찬이 의미 없이 또 투닥거리기 시작하자 몸보다 정신이 지쳐있던 우리는 피식거리며 웃었다.

내일은 본격적인 컨셉이 결정되고 곡을 고르기 시작한다고 했다.

회사는 갑작스럽게 변경될 방송 일정과 투표 시스템의 변화에 사과하며, 방송에 응모한 시청자 50명을 뽑아 추후 친필 사인 시디를 보낼 거라고 했다.

그중 10명은 쇼케이스 무대의 초대권을 줄 거라는 말도 언뜻 들었다.

하지만 당장 몇 명이나 쇼케이스에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썩 좋은 얘기가 아닐 것 같다는 게 멤버들의 생각이었다.

더 좋은 무언가가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 이벤트를 진행하면 잘못은 회사가 했는데 왜 멤버들을 갈아서 보상에 넣냐는 말이 나올 게 뻔한데. 그렇다고 데뷔도 못 한 우리가 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차라리 커피 쿠폰을 쏘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마땅한 방법도 생각나지 않아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포잉이 생각났다.

나는 인터넷을 할 수 없지만 포잉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적어도 커뮤니티에서 사람들 반응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뭐야, 너 왜 그렇게 웃어.”

“응? 내가 뭘?”

“너 방금 되게 흑막처럼 웃었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얼굴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좀 더 표정을 감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

“에이, 흑막이라뇨. 저처럼 얌전하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입에 침이나 발라.”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