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4)화 (24/456)

24. EVERYDAY(5)

“저희 데뷔 날짜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첫 앨범 곡이 계절 타는 노래면 좀 금방 질리거나 식을 거 같았어요. 그래서 뭔가 계절 타지 않는, 그냥 아무 때나 내가 힘들거나 생각날 때 들으면 좋을 주제가 뭘지 생각해봤는데 이런 게 생각났고요.”

말을 하고 있는 나도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정리를 할 수 없어서, 거의 아무 말을 내뱉고 있었다. 말재주가 별로 없는 편인 내 스스로가 이럴 때 참 답답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며 잠깐 생각에 빠진 것 같았던 주영 팀장님이 자신의 생각을 보탰다.

“얘기를 들으니까 생각난 건데, 이런 식은 어때?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 학업에 대한 두려움, 가족에 대한 두려움, 편견에 대한 두려움…. 이런 식으로 멤버들이 하나씩 포지션을 잡고 차차 그걸 풀어가는 식으로. 이렇게 하면 앨범이 시리즈물이 될 거 같은데.”

“와, 전 제가 말하면서도 이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그걸 정리하시네요.”

놀란 내가 팀장님을 보며 감탄 어린 말을 하자, 옆에서 피식 웃던 소현 팀장님이 한마디 거들었다.

“A&R 팀은 아무나 하는 게 아냐. 일단 지환이 의견 킵하고 너희도 얘기해봐.”

일단 의견을 회사 사람들에게 전달하겠다는 목표를 완수한 나는 그사이 긴장 때문에 손바닥에 난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저는 이런 것도 좋을 거 같아요. 좀 발랄하고 귀여운 짝사랑? 같은 느낌이요. 사람들한테 처음 보이는 앨범이니까… 우리가 너희를 이렇게 짝사랑하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를 좀 봐줄래?”

“고백의 대상이 팬이 되는 그런 걸 말하는 거지?”

내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해서 그런지 멤버들도 하나둘 자기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신인다운 모습의 컨셉은 처음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거니까 그걸 살리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고, 약간 센 느낌의 그룹으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다.

“너네 이렇게 말 잘하는 애들이었어?”

한참 동안 적극적으로 각자의 생각을 말하는 멤버들 모습에 소현 팀장님은 새삼 기특하다는 듯 한 명씩 차례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회사에서 잠깐 말이 나왔던 컨셉은 여름이 다가오니까 그즈음에 맞춰서 분위기를 좀 밝게 내는 게 어떻냐는 얘기였거든. 너희가 이렇게 아이디어가 많을 줄 몰랐지.”

“평소에 소현 팀장님이 얼마나 무섭게 굴었으면 애들이 이렇게 막 한 맺힌 것처럼 말을 해.”

“어휴, 진짜! 주영 팀장님 애들 앞에서 이러실 거예요?”

“허허, 농담이지. 얘들아 알지? 농담이야.”

다행히 회사에서도 우리 의견을 긍정적으로 수용할 생각이라는 말을 전하며, 우리 태도가 적극적인 게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그리고 A&R 팀에서 일차적으로 거를 건 거르고 회의를 거치고 나서 내일 중에 팀의 최종 컨셉을 확정 지어 얘기해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주영 팀장님과 팀원 분들이 회의실을 나섰다.

“자, 이제 너희는 스튜디오 가자. 확실히 땀 좀 빼고 시간 좀 지나니까 부기는 빠졌네. 너희 회사 식당에서 뭐 먹는지 다 기록 남는다, 알지?”

“네에….”

방금까지 기운 넘치던 멤버들은 다시 하찮고 작게 쪼그라들어버렸다. 몸은 엄청 많이 움직이는 데 앞으로 먹을 수 있는 게 단백질과 풀 뿐이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그래도 가끔 치킨도 먹게 해주고 고기도 먹게 해줬었는데 이제 기름진 음식은 한참 동안 만나지 못할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다시 팀장님과 매니저님 차에 나눠 탄 우리는 한참을 달려 한적한 곳에 있는 웬 건물 앞에 내렸고, 팀장님이 사진작가분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스튜디오 안을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얘들아, 와서 인사드려. 박연우 작가님이야. 엄청 모시기 힘든 분인데 간신히 허락받은 거니까 잘하자?”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모시기 힘든 분=매우 비싼 분’이라는 공식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고, 잘 못 하면 많이 혼나겠구나 하는 생각도 덩달아 떠올랐다.

“어휴, 그 정도는 아니죠. 하하, 정윤 씨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이번에 데뷔하는 친구들이라면서요? 이름이 뭐예요?”

“아, 저희 애들은 ‘언래블’이라고 해요. 각자 인사드려.”

태연하게 작가님에게 우리 팀명을 말하는 팀장님의 모습에 멤버들 머리 위에는 물음표가 무수히 떠올랐다.

그래도 눈치껏 한 명씩 자기 이름과 나이를 말하는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고 보조 작가분들과 세팅하는 동안 쉬고 있으라는 말에 우리는 우르르 매니저 형에게 몰려갔다.

“형, 저희 그룹명 확정됐어요?”

“어? 팀장님이 회의 때 얘기 안 해주셨어?”

“얘기 못 들었는데요….”

“언래블로 확정됐어.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네엡.”

하루 종일 매니저 형은 왜 이렇게 바쁜가 했더니 우리를 예쁘게 꾸며주실 코디분들을 불러오고, 헤어, 메이크업 디자이너분들을 찾아서 모셔오느라 그랬던 것 같았다.

앉으라는 대로 얌전히 앉았더니 짐 한 보따리를 들고 몇 분이 더 들어와서는 짐 보따리에서 의상을 꺼내기 시작했다.

앞으로 우리를 챙겨주실 분들에게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하자 그 모습에 다들 잘생긴 데다 예의 바르고 착한 것 같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모처럼 칭찬받아서 다들 광대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매일 같은 연습과 경연에 치이며 지내다 보니 다들 잘했다는 말보다 부족한 부분에 대한 지적을 더 많이 받으며 살았던 탓에 칭찬에 고파했다.

나라도 멤버들에게 칭찬봇이 되어야겠다.

다들 표정을 한 번씩 수습한 후 우리는 다시 불쌍한 표정으로 매니저 형을 애타게 바라봤다.

“응?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형, 근데 저희 무슨 컨셉인지도 모르는데…. 그냥 찍음 돼요?”

“팀장님이 그것도 말 안 해줬어?”

우리는 차마 그렇다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의상을 준비하던 코디분들도, 디자이너분들도 우리 표정이 웃겼는지 헛기침을 하며 애써 표정들을 관리했다.

다행히 팀장님은 사진작가님과 얘기하느라 이쪽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매니저 형의 얼굴엔 이젠 체념이 깃들었다.

조그맣게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내용이 팀장님에 대한 원망인 것 같았지만 우리는 모두 듣지 못한 척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했다.

“일단 검색 사이트에 공식으로 올릴 공식 프로필로 캐주얼한 복장 하나 찍을 거야. 그리고 회사 홈이랑 홍보에 쓰일 너희 사진은 발랄한 느낌으로 하나, 차분한 느낌으로 하나 이렇게 총 3개 찍을 거야.”

매니저 형의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보니 우리를 보며 씩 웃던 코디분들이 의상을 들어서 보여줬고 우리는 다 같이 엄지를 척하고 들어줬다.

다행히 이전에 내가 알던 언래블의 코디들이 아니었나 보다.

이전 코디에 대해 솜뭉치들과 내가 자주 하던 한탄이 있었다.

우리 애들 얼굴하고 기럭지가 개연성이고 옷만 예쁘게 입히고 세워놔도 사연이 오조오억 개는 나올 것 같은데, 왜 동대문 돌아다니면 거리에서 서너 번은 볼 것 같은 스타일로 입히는지 모르겠다고.

도대체 왜 체크에 집착해서 상하의를 체크로 도배하는지 이유를 아시는 분 말 좀 해달라고.

내 불안과 걱정을 한 방에 날려버릴 만큼 깔끔하고 기본적인 아이템들로 잘 골라와 준 코디분들께 감사의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처음 우리에게 주어진 의상은 통일감을 주기 위해 기본 베이스 색상을 코발트블루로 맞춘 것들이었다.

“시험 삼아 몇 장 찍어보게 준비된 사람 아무나 먼저 와볼래?“

우리 팀은 팀워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진작가님의 말이 끝나 마자 모두가 나를 바라볼 만큼 협동이 잘 되는 걸 보니.

“이런 건 리더가 나서는 게 국룰 아니었어요?”

“준비가 덜 돼서 어쩔 수가 없네. 하하, 지환이 파이팅.”

“지환아, 네가 제일 하얗고 잘생겼으니까 잘 찍힐 거야. 널 믿는다!”

“형, 파이팅!”

영혼 없는 멤버들의 응원을 받으며 배신감을 곱씹고 있자 아까 웃던 코디분이 다가와 다시 한번 의상을 점검해 주셨다.

흰색 베이스에 코발트블루 체크가 들어간 셔츠, 그리고 군데군데 스크래치가 들어간 블랙 진이 내 의상이었다.

처음 찍어보는 프로필 사진인 탓에 긴장한 게 얼굴에 그대로 티가 났는지 작가님이 푸근하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지환 군이라고 했죠? 자, 저기. 그래 거기 가운데에 편한 자세로 서봐요.”

그냥 서는 게 어떻게 서 있는 거였지? 하고 잠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지만 빠르게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테스트 촬영이라지만 첫 타자인 내가 망치면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 테니 정신 차려야 했다.

이럴 때 쓰라고 스킬이 있는 거겠지?

작가님을 대상으로 ‘내적 친분’ 스킬을 발동시킨 나는 조금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자세를 잡았다.

일단은 스킬을 발동했으니 생판 처음 보는 내가 그래도 어쩌다 몇 번 본 사람처럼 친근하게 보일 테니까 덜 혼나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마음이었다.

몸을 약간 틀어 비스듬한 자세를 취하고, 한 손은 늘어트리고 한 손은 주머니에 살짝 걸친 상태로 얼굴만 정면을 바라봤다.

“지금 자세 괜찮네. 턱 조금만 내리고, 눈에 조금 힘 풀어봐요.”

찰칵거리는 촬영음과 그 뒤로 이어진 멘트는 원래도 이 작가님의 성격이 부드러운 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친근한 어조였다.

다행히 자세 수정을 요청할 때도 설명이 자세한 편이라 이해하기 쉬웠다.

그렇게 내가 열심히 팀 이미지 어필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멤버들은 역시 지환이 먼저 보내길 잘했다며 자기들끼리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고, 작가님 옆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던 소현 팀장님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내 새끼, 잘생겼네.”

“그, 팀장님? 애들이 팀명도 컨셉도 못 들었다고 하던데요.”

“아, 내가 회의하다가 깜박했네. 우진 씨 미안해요.”

내가 뽑은 애지만 참 잘생겼다 싶은 뿌듯한 마음을 갖고 촬영을 바라보던 소현 팀장님은 그사이 조금 퀭해진 매니저 형의 질문에 상큼하게 웃으면서 사과했다고.

“잠깐 테스트 촬영한 건데, 이거 그대로 써도 되겠는데요? 와서 확인해보세요.”

모니터링하라고 부르는 작가님 옆으로 나뿐만 아니라 멤버들까지 어느새 다 다가와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서 있는 사진, 소품용 의자의 등받이 쪽에 기대서 찍은 사진 등 몇 가지 포즈를 취한 사진들이 무수하게 늘어져 있었는데, 그 와중에 작가님이 딱딱 뽑아서 확대한 사진들은 내가 봐도 잘생겨 보였다.

“지환 군 마스크가 딱 내 취향이야. 찍으면 찍을수록 다른 포즈가 막 떠오른다니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킬 효과가 과하게 발휘는 건지 어깨를 두드리며 흡족해하는 작가님의 모습에 허리를 90도로 접어서 인사하자 옆에서 팀장님이 더 좋아하셨다.

“자, 다음 멤버들도 한번 가봅시다. 이러다 오늘 촬영 금방 끝나겠는데?”

첫 의상 촬영을 순식간에 끝낸 나는 남은 멤버들을 보며 씩 웃었다.

“님들 파이팅.”

이게 바로 먼저 매 맞고 끝낸 자의 여유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