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Dejavu(3)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찍 잠에 들기로 했다.
일주일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 안에 완벽한 무대를 만드는 건 아직 우리 수준으로는 턱없는 얘기였기에 나는 최대한 회사의 지원을 잘 받아낼 수 있는 방향으로 계획을 잡았었다.
애당초 이 경연 자체가 멤버들 간의 협력은 물론, 완성도를 위해 회사에서 적절한 협력을 받아낼 수 있는 지도 평가하는 미션이었다. 적어도 그 부분은 우리 팀이 합격점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카메라 앞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하루는 잘 보냈어요? 아, 아침에 보는 분들도 계실 테니까 오늘 하루도 잘 보내시라고 해야 하나? 늘 숙소 와서 잠들기 전에 찍다 보니까 인사가 이러네요.”
이제는 제법 어색한 부분 없이 대화하듯 말을 이어가는 스스로가 조금은 기특해졌다.
“이제 내일이면 1차 경연이 진행되는 날이에요. 떨리냐고 물어보시면…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 뭐라고 해야 하지? 너무 거대하고 큰 걸 보면 현실감이 좀 없잖아요. 지금 제가 그래요. 엄청 열심히 뛰어다니고 준비하고 했는데 막상 내일이 그날이라고 생각하니까 실감이 안 나요. 나중에 데뷔할 때는 또 다를까요? 하하, 아직 경연도 통과 못 했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네요.”
조금 멋쩍어져서 볼을 긁적이다 아, 하고 다시 얌전히 손을 내렸다. 아무래도 일반인 공지환에서 연습생 공지환으로 바뀌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것 같았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하려구요. 제가 스스로 된다, 할 수 있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하고 그렇게 됐다고 믿고 움직여야 가능성이 조금씩이라도 더 올라가지 않을까 해서요. 이런 게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하던가요?”
이전의 자신에게는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냥 나에게 주어지는 대로, 되는대로 살아왔었다.
대학 가라고 해서 갔다 왔고 대한민국의 남자니까 군대도 어차피 가야 했던 거라고 생각했었다. 잠깐잠깐 흥미가 생겼던 것들은 많았지만 오랜 시간 즐겁게 해왔던 건 없는, 그런 무미건조한 삶이었다.
그래서 아이돌 창조라는 프로그램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들었다.
화면 속의 아이들은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 보였는데 웃고 있었다. 경쟁에서 지게 되니 당사자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까지 대성통곡을 해, 그 모습이 이상하기까지 했다.
그런 모습이 호기심에서 동경이 되고, 삶의 활력소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직접 목표를 잡고 이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그때의 멤버들이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가끔은 이게 이전의 ‘공지환’이 가진 마음인지 지금 내가 결심한 마음인지 헷갈리기도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진 것 같았다.
“저도 후회 한 톨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저를 믿어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그분들께 아픔을 남기고 싶지 않거든요. 그리고 저도 꼭 우리 멤버들이랑 무대에 서고 싶어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오 분이 다 되어가는 시계가 오늘따라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잘, 하고 올게요. 우리 또 봐요. 오래오래 봐요.”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이 카메라 너머에서 나를, 우리 멤버들을 지켜볼 그들에게 오늘의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 * *
‘포잉, 오늘은 계속 같이 있어줄 거지?’
‘있을 거라고 했잖아. 몇 번 묻냐!’
‘꼭 같이 있어야 된다? 오늘 경연 망하면 진짜 끝이야….’
어젯밤에 카메라 앞에서 잘 모르겠다고 한 내 주둥이를 매우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행히 잠은 푹 잤고 일주일 사이에 몸이 적응한 건지 일찍 일어나져서 어젯밤에 애들이 먹고 싶다고 노래 불렀던 김치볶음밥도 해놨다.
참치 한 캔 털어 넣거나 하다못해 달걀 프라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심장이 덜컹거리지 않았을까? 하다 하다 별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했다고, 매우 안일하게도 잠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눈을 뜨고 멤버들과 웃으며 아침밥을 먹고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심장이 발바닥에서 뛰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리냐면 발에서 뭐가 쿵쾅거리는 것 같아 땅이 울렁거리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는 얘기였다.
“아… 아침 괜히 먹었나. 체할 거 같아.”
“그거 안 먹었으면 더 힘 안 났을 거야.”
“얘들아, 다 왔니?”
다 같이 큰 연습실에 모여 옆 사람과 수군거리던 우리는 소현 팀장님이 나타나자마자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왜 이렇게 긴장했어. 너희 연습 많이 안 했어?”
“아닙니다!”
“연습 많이 했잖아. 연습은 배신 안 해. 그만큼만 해.”
경연 시즌 내내 매니저 형도 팀장님도 우리를 터치하지 않았다. 그저 최소한의 시선만 주고 그 외 나머지는 전부 철저히 우리끼리 해나가야 했다.
“경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실장님이 해주실 거야. 가자.”
드디어 1차 경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문득, 카메라에 우리 모습이 어떻게 잡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주변을 슬쩍 바라보니 우리 애들이 전부 긴장 때문인지 움츠러들어 있었다.
왜?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죽어라 굴렀는데.
그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억울한 마음과 오기가 치밀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기죽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깨를 펴고 허리를 세우고 배에 힘을 주자 바닥이 울렁거리던 느낌도 그 순간 사라졌다.
나도 이런데 내 새끼들은 오죽할까 싶어 하나씩 바라보다 하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하준의 길고 깊은 눈이 부드럽게 접히며 웃었다.
영상에서 수없이 봤던, 하준이 언래블 멤버들을 보며 짓던 그 웃음이었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졌다.
* * *
“알다시피 오늘 1차 경연을 치르고, 남은 멤버들끼리 겨루는 2차 경연까지 거친 뒤 총 데뷔 멤버를 뽑을 거야. 2차 경연 때는 회사뿐만 아니라 팬들의 투표로 확인되는 선호도도 점수에 포함될 거고.”
회의실에는 나란히 앉은 우리의 맞은편에 정연 실장이 있었다.
단정한 느낌의 짧은 단발과 또렷한 눈매가 인상적인 정연 실장은 회사 내에서도 굉장히 단호한 걸로 유명하다고 했었다.
“일단 오늘은 1차 경연에 대해서만 얘기하자. A팀, B팀 순서대로 무대를 할 거고 평가는 대표님, 나, A&R 팀 김건욱 실장님, 그리고 하연수 씨가 진행할 거야. 너희가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줬으면 좋겠다.”
하연수는 ON 엔터의 간판 가수나 다름없는 발라드 가수였다.
허스키하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여운이 많이 남는 가사를 직접 쓰는 걸로 유명한 가요계 대선배였다.
원래는 경연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벌써 변수가 하나 생겼다.
“이제 너희 무대를 보자.”
원래 아이돌 창조에서 나왔던 결과와 다른 결과를 내야 했기에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내가 한 행동들이 얼마나 미래에 영향을 주었을지 걱정되었지만, 스스로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회사 지하에는 소극장 같은 무대가 있었다. 이 무대에서 ON 엔터의 배우, 가수들이 오디션을 보거나 지금처럼 테스트를 치르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그 무대에서 시험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연습했던 것만 잊어버리지 말고 하자. 할 수 있지?”
“우리 형님 긴장했나 보다. 우리한테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 못 하는 사람이.”
“그러게. 평소에도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주면 좀 좋아?”
“너희는 어떻게 된 게….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긴장 푸는 데는 리더 몰이만 한 게 없지.
다행히 A팀 모두 웃었고, 옆에서 목을 풀던 B팀 멤버들도 우리 대화에 같이 피식거렸다.
A팀은 청바지에 흰 셔츠로 통일한 의상이었고 B팀은 슬렉스에 검정 셔츠를 입었다.
이 와중에도 길쭉길쭉하니 잘 큰 우리 멤버들은 벌써부터 옷 태가 나서 카메라가 손에 없다는 게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잘하고 와.”
그동안 둘이 대화로 잘 풀어왔는지 영빈이 하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훈훈하고 보기 좋은 이 풍경이 쭉 유지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A팀, 준비됐으면 올라가세요.”
“가자.”
그리고 여태 사용하지 않았던 새로 얻은 스킬과 독종 스킬까지 발동시킨 나는 차분히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사전에 맞춰두었던 내 자리에 실수 없이 잘 설 수 있었다.
조명이 켜지기 전 무대 아래를 슬쩍 바라보니 무대 바로 앞에 앉아서 나를 지켜보는 포잉이 보였다.
‘잘해라, 계약자 놈아.’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귀 끝이 계속 움찔거리고 꼬리는 얌전히 있지를 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무대는 내가 서는데 긴장은 포잉이 더 한 것 같았다.
‘잘할게.’
그리고 켜진 조명과 들려오는 인트로.
일렬로 서 있던 우리는 가사를 여러 번 곱씹으며, 수정했던 안무처럼 두 명씩 서로를 바라보는 대형으로 바꿨다.
사랑하는 사람이 날 떠나갔지만 구차하게 잡기보다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 돌아오게 만들겠다는 다짐이 담긴 가사였지만, 쉽사리 그 감정을 잡을 수 없었던 우리는 이 경연을 떠올렸다.
데뷔라는 달콤한 결과가 우리 곁에 오려고 하지 않지만 구걸하기보다 그쪽에서 우리를 원하게 만들자고.
이토록 환한 조명은 받을 일이 없었고, 덕분에 내 옆에 선 멤버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독종 스킬 덕에 동선 꼬임 없이 다음 안무로 넘어갈 수 있었다.
경환의 랩 파트가 시작되고 그를 둘러싸고 조여들 듯 한 걸음씩 다가가는 우리 3명, 그리고 다음 벌스로 넘어가는 브릿지에서 경환이 앞을 막듯이 서 있는 힘찬의 팔을 잡아 내던지듯 밀어냈다.
실제로는 미는 시늉만 했지만 힘찬은 세게 밀린 듯 옆으로 몸을 비틀어 허공에서 반 바퀴 돌아 안전하게 착지했다.
이 부분은 원곡에는 없는 안무였고 혹시라도 다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지만, 임팩트를 줄 수 있을 거란 판단으로 결국 추가했다.
자리를 이동하면서 힘찬이 쪽을 힐끗 확인했더니 다행히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멤버들 모두 각자 주어진 파트를 문제없이 해내자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정면의 심사위원석에 앉은 사람들도 다들 무대에 집중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하준의 랩은 내가 부를 파트의 노래와 대화하듯이 이어졌다.
읊조리듯 나에게 한마디씩 던지는 가사가 내 파트의 노래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가 준비한 4분 30초가량의 무대가 끝났고, 이 자리엔 팬들의 환호도 박수도 없었지만 우리가 연습했던 것 이상으로 잘 해냈다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A팀 준비 많이 한 게 티가 나네. 잘 봤어.”
심사위원 중 대표로 나서서 인사를 건네준 것은 ON 엔터의 대표님이었다.
“어휴, 어린 친구들이 독기 품고 무대 하니까 이런 모습도 보네요. 하하. 잘 봤습니다.”
“자, 그럼 이제 B 팀 무대 볼게요.”
이어진 하연수의 덕담에 안도하려던 찰나, 적절하게 정윤 실장이 마무리했다.
이로써 이번 경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끝났고 기다림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