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5)화 (15/456)

15. Dejavu(1)

평소에도 터덜터덜 걸었다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감은 건지도 구분하기 힘든 내가 그래도 무사히 회사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포잉 덕분이었다.

‘님, 왼쪽. 아니 그건 오른쪽이잖아. 님이 밥 먹을 때 안 쓰는 손!!’

“…어?”

‘멈추셈. 인생 2회차도 교통사고로 가고 싶지 않으면.’

중간중간 이렇게 소름 끼치는 말도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이상한 행동이 도대체 무슨 영향을 준 것인지 모르지만 민첩이 1 올라서 이제는 36이 되었다.

덜 넘어지게 해주는 건가? 그것 참 고맙구나….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도착한 회사 작업실.

공용 작업실이라 온갖 사람들이 쓸 수 있지만 나는 아이디가 없어서 건드릴 수 없었던 컴퓨터였다.

시무룩해있는 나에게 소현 팀장님이 어제 슬쩍 다가와서는 로그인할 수 있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주셨다. 이게 내 계정이니 앞으로 작업할 때 컴퓨터를 마음껏 써도 된다고 해주셨다.

사실 이런 관심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쁘기도 하지만, 부담스러웠다. 실제로 내가 만들어낸 성과물이 아닌데.

‘님은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음.’

‘왜 또 구박해….’

‘어차피 거기서의 일이 이 세계에서 반드시 일어나리란 보장은 없음. 일어날 확률이 높지만.’

‘이미 몇 번 겪어서 조심스럽단 말이야. 그리고 일어날 가능성이 큰 안좋은 일은 빨리 치워서 우리 래블이들 꽃길 걸어야 해….’

‘그래, 그러니까 일해라 노예야.’

이 요정은 자꾸 이런 말을 어디서 배워오는 거야?

인터넷을 못 하게 하든가 해야지 원.

포잉과 투닥거리면서 지난밤을 떠올려보았다.

공부하면서 느낀 거지만 작곡이라는 게 생각보다 재밌었다.

물론 내가 직접 작곡한 건 아니었지만, 졸업식의 음을 떠올리며 베이스가 될 음표를 하나씩 찍고 효과를 넣은 뒤 연주될 악기를 하나씩 지정할 때의 쾌감은 생각보다 강했다.

그렇게 어제 1차로 완성한 졸업식은 예전 내가 들었던 졸업식의 멜로디와 조금은 달라진 곡이 되었다.

그래서 조금 궁금해졌다.

둘 다 들려줬을 때 원곡과 변형 곡 중 어떤 쪽이 더 사람들에게 좋게 들릴지.

파릇파릇한 새싹 작곡가의 꿈과 희망을 포잉은 비웃었지만, 포잉의 도움으로 이 곡을 완성한 순간 새로운 나로서 한 발짝 내디뎠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으니까.

회사에는 쉬는 날 종종 피시방에서 무료 배포 프로그램으로 음을 찍어보며 놀았고, 그러다 만들어진 곡이 이 곡이라고 설명할 생각이었다.

어젯밤 몇 번이나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weCam 영상을 찾아보며 배웠다. 그 후엔 실전이었다.

어떤 구조인지 모르겠지만 포잉은 원곡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조언 정도는 해줄 있다고 했기에 조언을 빙자한 어마 무시한 타박을 들으며 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

‘뚱땅뚱땅 눌러서 곡이 만들어진다는 게 되게 신기하지 않아?’

‘신기하지. 아무거나 눌러서 듣기 좋은 소리가 되는 건 아니니까.’

‘그치? 근데 그걸 내가 해냈다는 게 가장 신기한 거 같아.’

‘야매로 만든 것치고는 괜찮았음.’

‘너 진짜 한글 다시 배워와…. 우리 누나가 들었으면 진짜 맞았어, 너.’

‘나 때리면 동물 학대임.’

‘요정이라며?’

시답잖은 대화로 긴장을 풀어가며 프로그램을 켜고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어 멜로디를 만들어가던 순간, 스탯 창이 반응했다.

[시스템 이용자가 최초로 작곡에 성공해 특전이 발동합니다.]

‘…포잉, 이 시스템이란 거 원래 이렇게 특전이 많아?’

‘…내가 만든 거 아니니까 나한테 묻지 마셈. 그냥 좋게 생각해.’

‘그래…. 내가 랜덤 골라서 그런 거라고 치자.’

‘그건 아닌 듯.’

내가 현실 감각을 잊을까 봐 걱정해서인지 포잉은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조금쯤은 감상에 빠지거나 말랑말랑하게 넘어가도 될 텐데. 쳇

시스템 메시지를 꼼꼼하게 확인해보니 보너스 스탯과 스킬 레벨 하나를 올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이 시스템이라는 것이 적응도 안 되고 이해하기도 어려웠기에 메시지가 확인될 때마다 여러 번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다 확인한 후에는 망설이지 않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스킬 레벨을 올렸다.

빨리 이 스킬을 올려서 모든 멤버들을 챙길 수 있다면 언젠가 반드시 쓸모가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은 스탯은 연기와 행운을 제외한 모든 스탯에 조금씩 나눠 넣었다.

스탯이 올라간다고 갑자기 “짠, 천재가 되었습니다.”라는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관련된 무언가를 할 때 월등한 효율을 가져왔다.

바로 지금처럼.

‘와, 체력 올리니까 그래도 바로 살만해진다.’

방금까진 모니터에 머리 박고 그대로 눈을 감을 것 같았던 몸이 이제는 뻐근하고 피곤할 뿐,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뭐야, 지환이냐?”

“어라, 안 대리님 안녕하세요.”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해. 잠도 모자랄 텐데.”

서글서글한 성격이라 모두와 사이좋기로 유명한 대리님이었다.

역시 모든 기억을 미리 훑어봐 두길 잘했다.

“아, 작곡 공부하고 있었는데 실장님이 결과물 하나 가져오라고 하셔서요.”

“올, 너도 이제 작곡 공부하냐. 내가 한번 봐줄까?”

“아, 진짜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포잉의 평가는 믿을 수 없었기에 멤버가 아닌 사람에게 들려줄 기회가 반가웠다. 실제 내 곡도 아닌 곡이었기에 멤버들에게는 말하기 부끄러웠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하준과 인사를 하면서도 무슨 일인지 말하지 않고 나선 것이었으니까.

가칭 ‘졸업식’이라는 제목의 곡을 차례대로 재생시켰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멜로디를 듣던 안시영 대리가 노래가 모두 끝난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네가 만들었다고?”

“…어때요?”

뭔가 알고 있는 사람일까 싶어 괜히 등 뒤로 식은땀이 툭 하고 떨어졌다.

안 대리는 혼자 무언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말이 없었다. 이 침묵에 무겁고 무서워서 뭐라도 말을 해볼까 하는 그때, 누군가 안시영 대리를 불렀다.

“야, 안 대리야. 어디 가서 안 오냐.”

“아, 팀장님. 여기요.”

안시영 대리는 그래도 몇 번 인사도 나누고 말도 해서 친분이 있었지만, A&R 팀 팀장님은 얘기가 달랐다.

“팀장님, 지환이가 곡을 하나 썼는데 들어보실래요?”

“그래? 틀어봐, 한번 들어보자.”

내 의사는 어디 갔는지 자기들끼리 곡을 차례대로 들어보더니 망부석처럼 서 있는 나를 두고 둘이서만 무언가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지환아, 이거 네가 만들었다고?”

“팀장님, 그거 제가 먼저 했어요.”

“야 인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뭐가 잘못됐나요?”

더는 이 긴장감 넘치는 상황을 버티지 못한 내가 먼저 그들에게 질문을 했고,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둘이 작업실 한쪽에 있는 낡은 소파에 나를 앉혔다.

“지환아, 너 작곡 따로 배웠니?”

“아뇨, 그냥 위캠 영상 보고, 블로그 보고 하면서 조금씩….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데 제가 지금 처지가. 하하.”

그러자 대답을 들은 팀장은 회사에서 야근한 건지 까끌까끌한 턱을 쓰다듬더니 나에게 툭 한마디 던졌다.

“혹시라도 아이돌 때려치우거나 하면 곡 만드는 거 배워볼래?”

“예?”

“초 치자는 게 아니라, 너 이게 처음이라고 했잖아, 근데 초심자의 행운일지 뭔지 모르겠는데 꽤 괜찮은 게 나왔어. 이거 가사 있냐?”

“아, 네. 있어요.”

“이거 아예 가이드까지 붙여서 정 실장님한테 보고하자.”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이미 장비를 만지기 시작하는 모습에 나도, 포잉도 당황해서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모습에 안시영 대리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진짜 잘한 거야, 지환아. 너 지금 기죽을 게 아니라 좋아해야 한다고.”

“저, 질문이 있는데요.”

“응, 물어봐. 뭐가 궁금한데.”

“거기 버전이 1, 2 이렇게 있잖아요. 어떤 게 더 나아요?”

“난 2가 낫더라. 뭔가 더 멜로디가 풋풋해. 딱 청춘 드라마 느낌?”

“1번이 좀 더 세련되긴 했는데 일단 가사 붙여서 들어보고 결정하자.”

내가 수십 번을 흥얼거렸던 그 곡을 원곡과 내가 편집한 곡으로 나누고, 거기에 맞춰 다시 부르는 이 기묘한 느낌. 그걸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게 가장 답답했다.

하지만 이 마음은 앞으로도 영영 포잉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이야기겠지.

포잉은 어느 순간부터 될 대로 되라는 건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더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랑 같이 밤새우느라 포잉도 피곤하긴 했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사랑 더 어울리는 건 2번이네.”

“그렇죠? 2번이 더 애들 노래 같고 풋풋해서 나은 거 같아.”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네가 잘 만든 건데.”

내가 이전 생에서 본 ON 엔터의 A&R 팀은 도라에몽의 사차원 주머니 같았다.

이전까지는 배우와 발라드 가수 위주의 구성이었던 ON 엔터에서 최초로 만든 아이돌이 언래블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찰떡같은 컨셉들을 잡았는지 신기할 지경이었으니까. 언래블이 그만큼 흥하기까지 A&R 팀을 갈아 넣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전 ‘나’의 기억을 되새겨보면 그간 A&R 팀 사람들을 꽤 믿고 따랐던 것도 알 수 있었다. 워낙 다재다능한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들이 우리 같은 연습생의 말도 진지하게 듣고 고민해주었던 것이 컸다.

회사 내에서 그래도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들이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특정 포지션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다들 어지간한 프로그램은 다룰 줄 안다고 들었고, 듣는 귀가 굉장히 좋다는 평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 마음대로 편집한 것에 불과했지만 직접 손을 댄 곡이 칭찬을 들으니, 잠도 못 자고 헤매며 힘들었던 시간을 보상받는 것 같았다.

“일단 실장님 오늘 일찍 온다고 하셨으니까 가보자.”

“네? 갑자기요?”

“아니다, 들어보셔야 하니까 여기로 오시는 게 낫겠네.”

“그, 팀장님, 저 연습실로 돌아가야 하는….”

“네, 실장님. 저 김주영입니다. 네, 지환이랑 같이 있는데 이거 괜찮은데요? 금방 오신다고요? 네네, 여기 5번 작업실이요. 네에~.”

이 팀장님도 너무 직진이시네.

이 곡을 이렇게 이 시기에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게 미래에 어떤 영향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솔직히 지금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어떤 게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왕 지른 거라면 잘되고 싶었다.

“지환아, 다 된 거야?”

“아, 일단 팀장님이랑 대리님이 도와주셔서 가이드는 땄는데 아직 멀었죠.”

“실장님, 지환이가 버전을 두 개로 만들었어요. 둘 다 들어보실 거죠?”

그리고 또다시 부끄러운 감상 시간이 시작되었다. 미묘한 표정을 짓던 정윤 실장은 2번 곡을 택하며 파일을 따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파릇한 게 딱 애들한테 쓰기 좋은 곡이네. 일단 이거 킵해두자.”

“네?”

“뭘 놀라. 네가 데뷔하면 네 곡을 직접 부르게 될 거고, 네가 떨어지면 작곡가로 넣어줄게.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이 평범한 내용이 아니어서 작디작은 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가 생각하지 않은 플랜 B를 실장님이 만들어 주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아뇨, 그게 아니라 놀라서요. 너무 미숙한 곡인데 좋게 봐주시니까….”

“엄살은. 작곡도 좋지만, 경연 준비해야 하지 않아?”

“아, 네. 저 연습실로 복귀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속이 타는 건 나 하나뿐이고 실장도, 팀장도, 대리도, 하다못해 포잉도 여유롭다.

사실 내가 속이 타는 이유는 나도 알고 있었다.

온전한 내 곡이 아닌 곡이지만, 팬으로서의 마음이 담겼던 편곡을 듣기 좋다고 해줘서.

거기에 더해 언래블의 새로운 멤버가 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일이 아닌 것 같아서. 그걸 하루하루 실감하다 보니까 자꾸 더 큰 욕심이 생기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긴 밤을 보내며 머릿속 가장 깊숙이 박힌 생각은, 언래블과 같은 무대에 서고 싶다는 것이었다.

무대 구성을 짜보고, 안무를 고민하고,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하는 이 모든 것들이 즐거웠다.

이전에 백수 공지환으로 살 때도 그렇게 즐거움을 찾지 못해 허송세월하다 겨우 언래블을 만나 삶의 빛을 찾은 기분이었는데, 지금의 공지환도 결국은 언래블과 함께하는 걸 선택해버렸다.

이젠 나의 아이돌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언래블이 되어 무대라는 곳에 올라보고 싶었다.

그렇게 그들을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바라는 것을 꿈꾸고 싶었다.

연습실에서 몸을 풀고 있는 멤버들이 짧은 시간 사이에 너무나 익숙해졌다. 그들이 나를 향해 신뢰의 시선을 보낼 때마다 이 꿈들이 손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생각보다 나는, 지금 내 자리가 훨씬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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