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말 좀 해줘(3)
아무래도 계약자는 자신이 요정이라는 걸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자꾸 감시 카메라처럼 사용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포잉이 계약자에 대한 불만을 투덜거렸지만, 이대로 데뷔가 어그러지면 지환의 영혼을 구해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리니 참기로 했다.
아까 그 작은 인간이 울고 있던 곳에 갔더니 아무도 없어서 하준이라고 했던 인간의 냄새를 쫓아갔다.
하준이라는 저 인간에게서는 설익은 밤송이 같은 향이 났다.
겉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의 풋풋한 풋내와, 그 안 과육에서 은은히 퍼지는 달큼한 향.
포잉이 좋아하는 향이었다. 덕분에 포잉은 그 인간에게 꽤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아까까지 지환이 앉아있던 A팀의 회의실에 있었다.
“그러니까 우빈이가 너한테 볼 게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저한테 뭐라고 한 건 괜찮은데 자꾸, 흑. 영빈이 형한테….”
“하…. 개판이네, 진짜.”
이미 눈이 팅팅 부은 작은 인간은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그 모습에 눈을 찌푸린 하준이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작은 인간의 입에 물렸다.
“세빈아, 너 그 성격 고쳐야 된다. 억울하고 분하면 더 이 악물고 버텨야 해. 우리끼리 있을 땐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안 돼. 알지?”
“그래서 바람 쐰다고 하고 나와서 혼자 울었어요.”
“너 이렇게 팅팅 부어서 다시 회의실 들어가면 애들이 퍽이나 모르겠다.”
“….”
“형이 일단 가볼 테니까 너 여기 있어.”
“네….”
혼자 남은 작은 인간의 눈두덩이에 캔을 얹어준 뒤 회의실을 나서는 하준의 뒤를, 포잉이 종종걸음으로 따라 나갔다. 그는 맞은편 B팀의 회의실로 들어갔다.
‘저기 가기 싫은데.’
그 새까만 욕망의 냄새를 풍기던 인간을 마주하는 건 포잉에게도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계약자를 위해 참기로 했다.
“이 경연이 왜 있는지 잊었어? 팀플레이를 하라는 거잖아.”
“그러니까 B팀 세 명이 돋보일 수 있는 모습을 만들려는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네가 돋보일 모습을 만들려는 거 같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하, 지금 세빈이 말만 듣고 와서 이러는 거 얼마나 우스운 줄 알아요?”
“뭐?”
“영빈이 형이나 나나 노래가 특기고, 특히나 둘 다 고음에 더 강한데 그거랑 세빈이 춤이 어울려요?”
“어울리게 퍼포먼스 짜는 게 역량이라는 거다.”
“걔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는데, 왜 우리 앞에서는 얌전한 척하다 형한테 가서 뒷말해요? 그리고 형이 B팀 팀장이에요?”
들어가자마자 악의와 분노가 뒤엉킨 공기가 느껴져 매캐한 매연만큼 불쾌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또 다른 인간은 가뜩이나 원래도 창백해 보였는데 이제는 아예 곧 뒤로 넘어갈 것처럼 생겼다.
“우빈아 그만해. 하준아, 너도.”
“야, 김영빈.”
“우빈아, 하준이 말이 맞아. 셋이 모두 어울리는 무대를 만들어야지. 근데 지금까지 네가 말한 방향은 보컬만 보이고 세빈이는 묻혀. 그러면 안 돼.”
짜증이 가득한 인간과 딱딱하게 굳은 하준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약자 놈이 봤다면 싸우자고 덤빌 것 같은 분위기. 그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준아, 어쨌든 너희 팀이랑 우리 팀은 경쟁해야 하는 거잖아. 여기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가봐. 나중에 얘기하자.”
평소보다 더욱 단호하게 말하는 상대방의 태도에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하준은 B팀 회의실을 나왔다.
인간들의 이름을 외우는 건 꽤 힘들었다. 그나마 지환과 자주 붙어 있던 하준이라는 인간과 지환에게 욕했던 인간의 이름은 외웠지만, 나머지는 아직도 어려웠다.
그래도 대충 상황에 대한 설명은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이쯤하고 돌아가야지 싶었는데, 하준은 다른 멤버들이 있는 녹음실이 아니라 다시 A팀의 회의실로 들어갔다.
아직 감시 카메라 역할이 끝나지 않았나 보다.
다시 터덜터덜 따라 들어가자 하준이 작은 인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저 작은 인간은 불꽃 같은 냄새를 풍겼다.
불티같은 작은 불꽃이지만, 태울 수 있는 무언가만 주어진다면 아주 커질 수 있는 그런 불.
“세빈아, 억울할수록 이 악물고 네 주장이 타당하다는 근거를 들어서 상대방한테 말해. 그 자리에서 피하면 네가 도망친 게 되는 거야.”
“아는데 그게 잘 안 돼요, 형….”
“너네 팀에서 잘못된 게 뭔지 알아?”
“의견 조율이 잘 안된 거요?”
“아니, 너네는 이게 촬영 중이라는 걸 잊고 있다는 거야.”
“카메라는 저희도 알고 있….”
“카메라 앞에서 무조건 웃기만 하라는 게 아냐. 네가 타당한 이유를 대서 설명했는데도 우빈이가 무시했다면, 시청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아….”
“방송이란 게 그래 세빈아. 너무 카메라를 의식하면 그게 더 어색하겠지만 카메라가 지금 뭘 담고 있는지를 잊으면 안 돼. 우리는 그걸 업으로 삼겠다고 한 사람들이고.”
작은 인간에게 의도한 바를 다 설명한 건지 어깨를 두드려준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영빈이한테 많이 의지하는 거 알아. 그럼 영빈이 믿고 영빈이가 어떻게 하는지도 지켜봐, 세빈아.”
“네….”
포잉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하준이라는 인간이 그리는 팀에서 우빈이라는 인간은 사라졌다는걸.
혀를 차며 조금 빠르게 뛰어 지환을 찾아갔다.
꼴에 잔정이 많아서 아닌 척하면서도 여기 일에 온 신경이 곤두서있을 모자란 계약자에게 상황을 대충 설명해 줘야 했다.
* * *
포잉에게 상황을 대충 전해 들은 나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우빈의 지금 행동은 당연히 팀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
분위기가 있는대로 엉망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좋은 결과물이 나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하준이 왜 세빈에게 그런 얘기를 했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빈이 지금 하는 행동은 전부 이전의 ‘내’가 팀에 녹아들지 못했던 이유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김우빈은 초조했던 것 같았다.
하준은 곡의 방향을 잘 잡을 수 있을 테고 경환은 그런 하준의 서포트를 충분히 해낼 것이었다. 힘찬은 댄스곡에 맞는 퍼포먼스를 잘 골라낼 줄 알았고, 나는 어디에도 특화되지 않았지만 어디에든 넣을 수는 있었다.
거기에 비해 김우빈은 자기가 속한 팀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A팀에 밀린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럴 바엔 자기가 조금 더 돋보일 무대를 만드는 게 낫다고 착각한 결과가 지금의 B팀 상황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하면 우리 팀 이 순둥이들은 참….
“세빈이 괜찮겠지?”
“하준이 형이 알아서 잘할 거야.”
미래에는 한 팀이 될 사람들이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서로가 경쟁자인데 그런 인식이 아예 없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는 그래도 B팀보다 더 멋있게 하자! 정도의 분위기는 있었는데 지금은 아예… 없다.
“너네끼리라도 먼저 하고 있지, 왜 그냥 있어.”
“형, 세빈이는요? 왜 운 거예요?”
“괜찮아요?”
하준이 녹음실에 들어오자마자 경환과 힘찬 둘 다 병아리처럼 삐약대고 있었다. 이미 포잉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하준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라도 이렇게 있어 주는 게 하준에게는 더 의지가 될 것 같았다.
“세빈이 좀 답답하고 잘 안 풀리면 눈물 나서 힘들어하잖아. 그 성격 때문에 그러는 거야.”
“진짜요?”
“너희가 세빈이 신경 쓸 때냐? 우리 팀 것도 제대로 안 끝났는데.”
화제를 바꾸고자 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기에 나도 경환에게 다른 말을 걸었다.
“하준이 형 왔으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건지 좀 잡아주세요. 그래야 힘찬이랑 저도 안무 빼고 넣고 할 텐데.”
다행히 그렇게 대놓고 말하자 세빈에 대해서는 둘 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이런저런 의견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도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더 언급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 정도는 이해했을 것이다.
나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하는 하준을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완충 지대가 되어 분위기를 바꿔줄 수 있는 캐릭터는 여러모로 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그래서 예전에 다른 아이돌 팀들을 보며 언래블에도 저런 캐릭터가 한 명쯤 있었다면 하준이가 좀 덜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앞으로 내가 그런 역할이 되면 되지, 뭐.
조금 건방질 수도 있는 생각을 하며 혼자 조금 웃었다.
그러나 현실은 숙소로 돌아가기 전까지 하준과 경환에게 잡혀, 바짝 마른오징어처럼 쥐어 짜진 내 모습이었다.
“독한 사람들….”
“살려줘….”
숙소에 먼저 도착한 우리 모습은 어제와 달리 힘이 없었다. 힘찬이는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생각보다 하준과 경환은 쌩쌩해 보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작곡, 편곡에 대한 이론이 전혀 없었을 내가, 특전으로 얻었던 스텟 덕에 하준과 경환이 제시한 다양한 의견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랄까.
이전 생에서 애들의 영상을 보며 간단한 단어를 주워들어 익숙했던 것도 한몫한 것 같았다.
그게 아니었으면 내가 싸비, 브릿지, 벌스가 뭔지, 그리고 시퀀서가 뭔지 어떻게 알았겠어.
그럴수록 가장 답답했던 것은 이전의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기본 지식도 제대로 안 배워뒀을까 하는 점이었다.
ON 엔터는 연습생들이 기초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기회의 창구를 늘 열어놓고 있었다.
단체 레슨 외에도 작사, 작곡, 악기 연주, 외국어 등에 대해서 배우고자 하면 기초 강의는 다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상 수업을 듣고 싶다면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거나 데뷔 조에 들어야 했지만.
답답한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거실 바닥에서 꿈틀거리다 오늘은 먼저 씻고 나온 경환과 하준 뒤를 이어서 내가 씻고 나왔다.
그때, 숙소에 우빈과 영빈, 세빈이 들어왔고 분위기는 예상대로 썩 좋지 않았다.
당장 서로 멱살은 잡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고생했어요, 씻어요.”
머리의 물기를 대강 말린 나는 예의상 인사를 던지고 오늘의 로그를 찍기 위해 카메라를 세팅해둔 우리 방으로 들어갔다.
“여러분, 저 왔어요. 아, 머리가 덜 말라서 좀 부스스하죠? 여러분한테 빨리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고 싶어서 좀 서둘렀어요.”
약간의 서비스 성 멘트를 입에 담자 등 뒤가 따끔따끔한 것이, 내 자리에 누워있던 포잉은 멘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끼리 무언가를 해가고 있어요. 정확히 뭔지는 나중에 방송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음…. 기분이 진짜 묘해요. 내가 이런 걸 해낼 수 있구나, 이렇게 하면 무대를 보는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들이 다 잘 보일까? 이런 생각들을 많이 했어요.”
정말로 많은 생각을 했다.
모두가 각자의 몫만큼 주목받으면서 가장 반짝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일지.
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수건으로 다시 훔쳐내고 카메라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 제가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요. 되게 못생겨 보일까? 아니면 방송에서 볼 때랑 별반 다르지 않을까? 아, 여러분에게 못생겨 보이면 안 되는데. 하는 그런 생각들이요. 전 여러분들한테 최대한 잘생겨 보였으면 좋겠거든요.”
다행히 매일매일 격렬한 안무로 땀을 쭉 빼서인지 아니면 그냥 피부가 질긴 건지 트러블도 없었고, 햇빛이랑은 거리가 먼 생활을 하다 보니 피부도 하얀 편이었다.
“팀을 나눠서 진행 중이긴 한데…. 전 A팀이거든요. 이 팀 안에서도 1인분을 하고 싶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조금 후회 중이에요. 과거에 조금만 더 열심히 노력했으면 지금 팀원들한테 내가 더 도움이 될 텐데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친구한테 오늘 일과를 얘기하듯, 담담하게 온종일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수많은 감정들을 정제하고 정제해서 가장 알맹이만 카메라 너머로 건넸다.
내가 느꼈던 그 날것의 감정들은 생각보다 색이 너무 선명하고 무겁고 진득하기도 해서 이걸 팬들에게 그대로 줄 수는 없었다.
내가 직접 경험을 해보고 난 후에야 이전 생에서 언래블이 자신의 팬들에게 왜 그렇게 예쁘고 고마운 말들을 해주려고 애를 썼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내 감정 탓에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 입거나 오해하거나 같이 무거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이 카메라 너머에서 팬들이 어떤 마음으로 내 아이돌을 지켜보는지 이미 경험을 해본 덕에, 아주 조금 더 빨리 깨닫게 된 것 같았다.
“빨리 여러분들을 만나고 싶어요. 다 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그런 시간을 보내면 얼마나 즐거울지 상상이 잘 안 돼요. 하하, 제가 더 열심히 노력해서 꼭 즐겁고 행복하게 해줄게요. 늘 안 다치도록 조심히 할 테니 걱정 말고요.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여러분.”
적어도 지금 멤버 중에서 팬들의 그 애틋함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일 테니 고마운 마음을 담아 영상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