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2)화 (12/456)

12. 말 좀 해줘(2)

“지환아, 이거 다 수정하려면 거의 절반 이상을 뜯어고쳐야 할 텐데.”

“일단 우리가 할 일은 체크만 해두는 거야. 어차피 형들이 편곡하면 거기에 맞게 또 바꿔야 하니까 미리 하지는 말자.”

그제야 얼굴이 조금 펴진 힘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힘찬이 말은 저렇게 해도 춤에 관해서는 굉장히 열정적으로 파고들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던 애가 왜 그만둘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직접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계속 함께 지낼 것처럼 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적어도 힘찬은 김우빈처럼 앞뒤가 다른 얼굴로 다른 멤버들을 대하지 않았으니까.

“아예 싸비 쪽 안무는 다 갈아야겠네. 하아….”

편곡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 일단 대충 우리가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의 안무 부분만 따로 메모해두었다가 형들과 상의해보자고 했지만, 힘찬은 이미 춤을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렇게 춤을 좋아하면서 왜….

갑자기 아무런 이유 없이 속이 조금 답답해졌다.

“찬아, 우리 이거 들고 형들한테 가볼까?”

“우리가? A&R팀 갔다가 여기로 오지 않을까?”

“그러려나….”

“어차피 형들도 바로 거기서 작업 시작하진 않을 거 같은데.”

어느새 자연스럽게 다른 멤버들을 생각하고 의지하는 자신의 모습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마도 내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만큼 나도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리라.

계획서에 넣을 내용이라도 정리해볼까 하는 마음에 노트북에 문서 프로그램이 뭐가 깔려있나 찾아보는 데, 갑자기 힘찬이 말을 걸어왔다.

“지환아, 우리 데뷔할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방심하다 한 대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지금 우리가 움직이는 사방에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거 하나 보고 여태 이 악물고 버틴 거잖아, 우리. 데뷔 해야지. 너도, 나도.”

“그치. 근데 왜 점점 나는 더 자신이 없을까.”

여태 나한테 한 번도 내보인 적 없었던 최힘찬의 속마음. 당황스러운 마음과 죄책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나는 최힘찬의 속마음을 아무도 모르게 훔쳐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

“자신, 그런 거는 난 여기 들어오고 일주일 만에 없어졌던 거 같은데.”

일부러 웃으며 툭 던지듯 말을 건넸지만, 힘없이 마주 웃는 그 얼굴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눈에 박혀서 한참 동안 속으로 스킬을 발동시킬까 말까 고민했다.

그런 나를 제지한 건 포잉이었다.

‘지금은 그냥 쟤 얘기 들어주는 게 더 나을 거 같음.’

‘그럴까? 내가 쟤한테 ‘내적 친분’ 스킬 쓴 게 영향 있을까.’

‘그럴지도 모름. 그래도 스킬에 익숙하지도 않은 님이 여러 개 같이 쓰면 꼬일 거 같으니까 그냥 두셈.’

“최힘찬아, 왜 그러냐.”

어설프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보다는 그래도 포잉이 조금이라도 더 잘 알 거라고, 그렇게 애써 나를 다독이며 조금 풀이 죽어 있는 힘찬의 앞에 털썩 앉았다.

“아까 소현 팀장님이 그랬잖아. 우리 되게 신나 보인다고.”

“응.”

“나도 신나긴 했는데, 방금 안무 짜는 네가 되게 신나 보였거든.”

“하하, 그래?”

“억지로 웃지 말고 인마. 근데 갑자기 왜 이렇게 풀이 죽었어.”

힘찬의 손안에는 가사 어느 부분에 어떤 안무가 있었는지, 그걸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에 대한 내용으로 빼곡한 종이가 쥐어있었다.

그 종이를 물끄러미 보던 힘찬이 피식 웃었다.

“그냥 좀 겁났나 봐. 진짜 이제 코 앞이라.”

“난 병원에 누워있을 때 그렇게 무섭더라. 이 팀에서 잘릴까 봐. 우리 누나가 나 진짜 쫄딱 망해서 아무 데서도 안 받아주는 거 아니면 집에 오지 말라고 했거든.”

평소엔 있었는지도 몰랐던 양심이라는 게 갑자기 튀어나온 걸가. 심장이 목에서 뛰는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쓰레기 같아서 지금이라도 힘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할 거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평소엔 무게도 느껴지지 않던 포잉이 지금은 너무 따뜻해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던 언래블의 4명과 나 하나만 생각하고 있었다.

앞뒤 다른 김우빈이야 그렇다 쳐도 힘찬이한테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 빌어먹을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결말을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에만 집중했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사람도 자신의 미래를 걸고 몇 년을 연습생으로 살아온 사람인데.

어떻게 같이 자고 먹고 연습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 사람을 내가 그리는 그림에서 아예 배제하고 있었는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님, 정신 차리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포잉, 내가 보고 듣고 겪었던 미래랑 여기는 다를 수도 있는 거지?’

‘거기랑 여기는 엄밀히 말하면 다른 세상임. 그러니까 님이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음.’

“찬아, 내가 떨어지든 네가 떨어지든 우리 좀 멋있게 하자.”

“어?”

이놈은 이미 넋이 반쯤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 멀쩡하던 애가 이러니까 괜히 내가 쓴 스킬이 부정적인 영향을 준 것 같아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입안에서 맴돌던 말을 고르고 골라 천천히 말했다.

“우리 무대에서 서고 싶어서, 사람들한테 사랑받고 싶어서 매일 매일 연습실에서 살았잖아.”

“그놈의 연습실.”

“그러게, 그놈의 연습실. 그러니까 진짜 멋있게 하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손을 거친 무대가 되는 거잖아.”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니었던 것 같았다.

일주일도 안 돼서 지금 내 상황에 적응을 다 했다고,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내 천성이 워낙 느긋하고 매사에 좋게좋게 넘어가려는 편이라 이 말도 안 되는 일에도 빨리 괜찮아졌구나,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이 사람들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한 상태였고, 무의식중에 이전 삶의 언래블을 기준으로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다.

사람을 내 맘대로 재단하려고 하다니.

나 엄청 쓰레기 같은 짓을 하고 있었구나.

“오늘 내가 좀 이상하지?”

“최힘찬, 너는 늘 이상했지.”

“아, 뭐래.”

다행히 조금은 평소처럼 돌아온 힘찬에게 가벼운 장난을 쳐 기분을 풀어주었다.

“너도 그 진실의 공원에 한번 가야겠다.”

“진실의 공원?”

“있어, 하준이 형이랑 가서 나란히 앉으면 숙연해지고 진실만 말해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그곳.”

“뭐야 왠지 되게 싫다….”

“싫다는 게 나랑 나란히 앉는 거야, 아니면 진실을 말하는 거야.”

“으악!! 형! 인기척 좀 내고 다녀요!”

“아씨, 깜짝이야. 욕할 뻔했잖아요. 와, 놀라라….”

문 여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어느새 하준과 경환이 투닥거리는 우리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둘이 웬 청춘 드라마 찍길래 그냥 뒀지.”

“아니거든요. 잘 다녀왔어요?”

“오냐, 대충 스케치만 하긴 했는데 나머진 너희랑 더 얘기해보려고.”

“너희는 안무 좀 생각해봤어?”

자연스럽게 다시 한자리에 모인 우리는 안무에 대해, 곡의 분위기에 대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틈틈이 힘찬의 얼굴이나 분위기를 살핀 나는 나중에 카메라 없는 곳으로 저놈을 끌고 나가서 얘기를 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행히 아까처럼 처져있지는 않았다. 아니, 되려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자신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어떤 것을 좀 털어낸 듯 가벼워 보이기까지 했다.

“지환이랑 제가 무대를 여러 개 확인했는데, 우린 절대 선배님들 같은 분위기 못 내요. 인원수가 너무 적어서 무대가 되게 휑해 보일 거예요. 그래서 아예 크게 대형을 쓰는 부분은 4인용으로 다 갈아엎자는 게 우리 결론이에요.”

“그 곡 거의 다 단체 안무 아냐…?”

“하하하하하하하하. 맞아요.”

“그럼 다 들어내야 해?”

“아뇨. 그럼 우리 선에서 못하죠. 축소해도 되는 건 축소하고 바꿀 건 바꾸고 해야 하는데, 가사별로 구분해놨어요.”

힘찬이 나와 같이 열심히 정리한 종이를 하준과 경환에게 건네자 둘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우리 일주일이 참 바쁘겠다.”

“형들이 빨리 최종 곡을 줘야 안무도 확정지어서 제영 쌤한테 들고 갈 수 있어요.”

“무섭게 그러지들 마라….”

머리를 부여잡는 경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 대충 방향은 정해왔는데 지환이랑 힘찬이는 어디까지 올릴 수 있어?”

“음역 말하는 거죠?”

“어어, 대충이라도 알려줘야 좀 바꿔줄 수 있으니까. 아니면 내가 이 곡까진 부를 수 있다, 뭐 그렇게라도 말해줘.”

“이럴 게 아니라 같이 녹음실 가자. 같이 하다 보면 더 다양한 의견이 나오지 않겠냐.”

같이 가자고 말하는 하준의 얼굴이 어째서인지 굉장히 신나 보이는데 절대로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하하, 형 저희는 춤 연습….”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말고 따라와.”

왜 민하준은 늘 무서운 소리를 저렇게 세상 다정하게 웃으면서 하는지 모르겠다. 그게 더 무섭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도망가지 못한 나와 힘찬은 하준, 경환에게 양쪽에서 포위당한 형태로 녹음실까지 연행되었다.

* * *

네 명이 같이 녹음실로 가던 길,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억눌려서 엉망으로 뭉개지는 목소리긴 했지만 분명 우리 막내 목소리였다.

“이거, 세빈이 아냐?”

“형, 세빈이 목소리 같은데 왜….”

하준이 손을 들어 우리 입을 막았다. 하준은 경환에게 손짓해서 우리를 끌고 녹음실로 먼저 가라고 한 후,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예상대로 우리 막내가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왜 울어, 세빈아.”

“너네 먼저 가 있어. 형이 세빈이랑 얘기하고 갈게.”

“형!”

“애 놀란다. 나중에 얘기해.”

평소에도 세빈이를 많이 예뻐했던 힘찬은 먼저 가 있으라는 하준의 말에 발끈했지만, 경환과 내가 양쪽에서 그를 끌며 그 자리를 비켜주었다.

“찬아, 우리까지 거기 다 있으면 세빈이가 속 편히 얘기하겠냐.”

“아까까지 멀쩡하던 애가 왜 울어, 도대체.”

“…일단 소란피우지 말자. 회사야.”

팀이 바뀌고 다르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어떻게 되든 동일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도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아이돌 창조에서 본 것은, 하준과 세빈이 의견 충돌로 트러블이 생겼고, 서운함이 폭발한 세빈이 울면서 형에게 대드는 장면이었다.

세빈이는 노래나 무대에 관련된 것만큼은 자기 주관이 뚜렷한 아이라 그 자리에서 싸우면 싸웠지 이렇게 혼자 나와서 남들 몰래 울지 않을 텐데.

여러 상황을 떠올리며 포잉을 슬쩍 바라보자 눈이 마주친 포잉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나보고 가서 보고 오라는 거임?’

‘역시 우리 포잉은 천재야! 말하지 않았는데도 다 아는구나.’

‘하아, 너님. 진짜 가만 안 둬.’

포잉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경환과 힘찬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다니는 복도 한가운데에 우르르 몰려 있는 건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기에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나와 경환, 힘찬 모두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B팀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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