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SOMEDAY(2)
내가 박 병장, 그 새끼 같은 놈을 또 만나야 한다고?
헤어나올 수 없는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때, 벌컥 연습실의 문의 열리며 하준이 뛰어 들어왔다.
“야, 왜 이래.”
“하….”
차마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군대에 또 가야 하다니. 이게 무슨 X 같은 소리지?
“뭐야, 지환이 왜 저래?”
“몰라. 쟤 울어?”
애들이 내 몸을 붙잡고 흔드는 게 느껴졌지만 정신 줄을 부여잡기엔 타격이 너무 컸다.
죽었다 살아난 대가라지만 그곳을 다시 가야 한다니.
주변에서 무어라 말하는 게 제대로 들리지 않아 잠깐은 흔드는 대로 몸을 내버려 두었지만, 결국 어지러워져서 하준의 손목을 잡았다.
“형, 어지러워요….”
“너 무슨 일인데 그래. 왜 갑자기 울어.”
너무 억울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던 모양이었다.
살짝 눈이 촉촉해졌을 뿐, 흐르진 않은 것 같은데 멤버들의 반응이 의외로 격해 의아했다.
잠깐 바닥에 주저앉아 애써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사이 들린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출입문으로 본 내가 안무 동작을 하다가, 갑자기 힘이 쭉 빠진 것처럼 벽면의 거울에 머리를 박았다고 했다.
그런 내 모습에 혹시 몸이 안 좋은 건가 하고 놀란 하준과 경환이 급하게 들어와 나를 붙잡았는데,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어서 모두가 당황하게 됐던 것 같았다.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해준 것은 고맙지만, 이들에게 사실대로 얘기해줄 수 없는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눈물을 삼키느라 잠긴 목소리로 대꾸해 주었지만, 오해가 풀리는 것 같진 않았다.
괜히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아끼기에, 재입대 충격을 다른 것들로 분산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겸사겸사 어제 제 마음대로 발동되었던 스킬을 한번 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고.
한 번에 여러 명은 못 하지만 잠깐씩 보고 끄면 되니까 하는 생각으로 스킬을 발동했더니….
[사내새끼가 아침부터 눈물 짜고 지X이야, 재수 없게.]
[얘도 많이 힘든가 보네. 휴…. 그냥 그만둔다고 내가 먼저 말할까.]
[지금이라도 병원에 보내자고 해야 하나….]
[어떡하지, 형 많이 힘든 거 같은데, 아씨, 어떡하지.]
[괜찮은 척하더니 혼자 나간 게 힘들어서였나. 역시 조금 더 신경을 써줘야겠다.]
[어젯밤 내내 괜찮은 것처럼 굴더니 역시 퇴출 얘기 때문에 부담이 컸던 거 같네. 하아… 잘 다독여야겠다.]
김우빈, 힘찬이, 경환이, 세빈이, 영빈이, 하준 순으로 모두 확인한 후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표정은 전부 근심, 걱정이었지만, 말풍선처럼 떠오른 글자들의 나열이 내게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지난번 경험을 토대로 딱 한 마디씩만 보고 스킬 사용 대상을 계속 바꿨기 때문에 그사이 있었던 생각은 알 수 없었지만, 다행히 한 명 빼고는 나를 욕하고 있진 않았다.
김우빈, 이 새끼는 아주 한결같은 놈이네.
“죄송해요. 제가 분위기를 좀 망쳤네요. 아침부터 눈물 바람하고 이러면 재수 없는데, 그쵸?”
가뜩이나 세상 우울한 일이 생각나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던 기분인데, 저 인간말종 새끼한테 한마디 하지 않으면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그런 말 하지 마. 눈물 날 수도 있지.”
“너 진짜 다시 병원 안 가도 괜찮냐?”
“얼마나 속상하면 눈물이 나. 그런 거로 뭐라고 하는 새끼가 인간말종이지.”
영빈과 경환 하준이 다독이며 한마디씩 덧붙이자, 내가 자기 속마음 같은 본 것 같아서 뜨끔했는지 가뜩이나 굳어있던 우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멍청한 놈. 모든 멤버들이 연습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촬영은 시작되고 있었다. 저렇게 자기 혼자만 티 나게 표정이 바뀌면 분란 거리를 좋아하는 방송국에서는 어떻게든 써먹을 게 뻔했다.
연습생끼리의 갈등, 적당한 분란은 시청률의 좋은 밑밥이 되어 주니까.
그나저나 힘찬이가 한 말이 너무 의미심장해서 머릿속에 콕 박혀버렸다. 연습생 생활을 그만둘 생각인 건가?
“저 진짜 괜찮아요. 잠깐 몸이 생각만큼 안 움직여져서 좀 분했나 봐요.”
“아냐, 너 진짜 많이 늘었어. 그런 생각하지 말고.”
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적당히 핑계를 대며 웃어 보이자, 평소에도 모두에게 담담하게 대해 ‘나’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알 수 없었던 백경환이 의외의 말을 했다.
경환아, 네가 표현 막 안 해도 멤버들 엄청나게 생각하는 건 솜뭉치들은 다 알고 있었어….
나도 모르게 솜뭉치 마인드가 불쑥 튀어나와 경환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
“…?”
“경환이 형,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뭘 새삼. 연습이나 하자.”
순간 얘가 왜 이러지 하고 보던 경환은 다행히도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자기 자리를 잡으러 움직였다.
나도 자리를 잡기 위해 움직이면서 머리를 핑핑 돌리기 시작했다. 전반적으로 지금 ‘나’를 대하는 분위기가 아주 날카롭지는 않았다.
어제 느꼈던 날카로운 분위기는 가뜩이나 예민한 시기에 돌발행동을 해서 다들 반발심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계속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먼저 친근하게도 굴고 청소며 밥도 해두었더니 많이 누그러든 것 같았다.
회사고 방송국이고 시청자고 모두 멤버들 간의 케미 부분을 꽤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히나 일부 팬들은 멤버 간의 사이좋은 모습, 서로 위하는 모습에 많은 공감과 격려를 보내며 지지하기도 한다.
나만 해도 하준과 영빈의 찐 우정, 투빈(영빈과 세빈)의 케미 등을 다룬 수많은 움짤과 영상을 보며, 언래블에게 절대 해체라는 단어는 없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팬 중 하나였다.
그렇게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스킬로 멤버들이 가진 나에 대한 신뢰도를 체크하고, 내적친분 스킬도 조금 사용하면, 빠듯하긴 해도 일주일 동안 나쁘지 않은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를 팽팽 돌리며 몸풀기치고는 과격한 연습 시간을 보내고,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때, 영상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연습실의 문이 열리고 소현 팀장님이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왔다.
영상으로 볼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가던 한 장면일 뿐이었지만, 내가 이 자리에서 팀장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입장이 되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오늘부터는 팀 나눠서 할 거야. 다들 기억하고 있지?”
“네.”
프로그램의 진행은 이미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앞으로 있을 두 번의 평가전, 그리고 데뷔 멤버의 확정이 이 프로그램의 마지막 이야기였다.
드디어 오늘부터 1차 평가 무대를 위한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된다.
1차로 팀이 나뉜 사람들끼리 곡의 편곡이나 안무 재구성 등 구체적인 얘기를 나누고 앞으로의 작전을 잘 짜야 했다.
그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이 팀을 짜는 것.
슬쩍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니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팀은 100% 랜덤으로 짤 거야. 한 명씩 앞으로 와서 이거 뽑아.”
팀장이 내민 작은 상자에는 1부터 7까지의 번호가 적힌 종이가 곱게 접힌 채 들어가 있었고, 밖에서 끌고 들어온 칠판에는 거대한 사다리 타기가 그려져 있었다.
사다리의 제일 위쪽에는 A와 B가 순서대로 적혀있었다. A팀이 4명, B팀이 3명이었다.
내가 아이돌 창조를 시청했던 당시를 떠올려보면, 김영빈, 김우빈, 최힘찬, 그리고 ‘나’의 포지션이었을 이름 모를 누군가가 A팀이었다. 그리고 B팀은 민하준, 백경환, 강세빈이었다.
김우빈과는 죽어도 같은 팀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가. 반쯤은 포기한 마음으로 종이를 뽑았고, 칠판엔 하나씩 이름이 적혀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이어 펼쳐진 결과에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 A조는 하준, 경환, 지환, 힘찬. B조는 영빈, 우빈, 세빈 이렇게 나눈다. 리더를 따로 정하는 것부터 모든 것을 너희끼리 해보는 거야.”
뭐지? 왜 결과가 바뀌었지? 행운이라는 게 여기에 영향을 준 걸까?
“다들 따라와.”
어미 오리를 따라가는 새끼 오리들처럼 우리는 소현 팀장님의 뒤를 졸졸졸 쫓아갔고, 팀별로 각각 다른 회의실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어떻게 되었든 한배를 타게 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결국 웃고 말았다. 랜덤으로 종이를 뽑고 사다리 타기를 했지만, 팀 인원이 나뉜 것이 꽤 절묘했기 때문이었다.
중심을 잡아줄 큰 형들이 각 팀에 나눠서 들어간 데다, 춤이나 노래에 자신 있는 멤버들의 숫자 또한 한쪽으로 몰리지 않고 잘 나뉘었다.
A조와 B조의 차이가 있다면, 하준과 경환은 랩을 하던 사람들이었지만 B조에는 랩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왠지 A조랑 B조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질지 알 거 같은데요?”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렇게 멤버의 구성이 바뀌어버렸으니 1차 평가의 결과가 내가 본 것과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소현 팀장님이 회의실에 들어왔고, 굳은 얼굴로 앉아있는 우리들을 둘러보며 씩 웃었다. 팀장님이 저렇게 웃을 때마다 쉬운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기에, 모두의 얼굴에는 다시 긴장감이 흘렀다.
“이번엔 A&R팀이랑 안무팀의 도움을 잘 끌어내는 팀이 승리할 가능성이 더 클 거야. 회사에서는 미리 각 팀 팀장님들한테 얘기해놨어. 잘해봐.”
“저희가 직접 가서 요청해야 해요?”
“응. 어떤 곡이 베이스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없지?”
우리가 준비해야 할 노래는 Limitless 선배님들의 ‘tracker’라는 노래였다.
그리고 나는 이 미션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이미 알고 있었다.
얘들아, 내가 이기게 해줄게. 나만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