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8)화 (8/456)

8. SOMEDAY(1)

“왜 말을 안 해. 곡 쓰는 건 또 언제 공부했어?”

실장님이 무섭게 쳐다보고 있잖아요!

차마 사실을 고할 수 없어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기사들을 늘 빠짐없이 챙겨봤었고, 이 곡에 대한 에피소드도 들었을 텐데…. 머릿속으로 이 곡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려 애썼다.

“요새 자작곡 내는 아이돌이 평이 좋잖아요. 그래서 조금씩 공부했어요.”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댔지만 아주 조금 남아있던 양심이 파삭하고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 생각났다.

꽤 유명했던 작사가 에단이 동창회에서 자기 첫사랑 만나, 그날 술 왕창 먹고 작업했던 곡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이 노래는 굉장히 풋풋하고 두근거리는 곡이었지만, 이후 나올 후속곡은 그녀의 결혼식에서 겪은 씁쓸함과 아픔을 통해 화자가 자신의 추억과 이별하는 내용의 노래였다.

“흠, 이거 누가 알아?”

“저 말고는 이제 실장님만 알아요.”

“좋아. 다른 데 말하지 말고 나중에 나한테 가져와 봐.

그런 재주가 있으면 매니저나 팀장한테 어필해야지 왜 숨기고 있어.”

원래는 없는 재주였으니까요! 지금도 없는데!

내 속마음의 외침은 안타깝게도 정윤 실장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나는 어설픈 웃음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를 떠나 남의 창작물을 도둑질 하게 생긴 내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알림창이 반짝였다.

- 업데이트 이력이 존재합니다. 상태창을 확인하세요.

정윤 실장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조금 후들거렸던 다리를 주무르며 다른 멤버들이 모일 연습실로 이동했다.

이거 확인한답시고 멤버들보다 늦게 들어가면 모양새가 보기 좋지 않겠지. 구석에 있더라도 먼저 가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태창 확인’

[상태창]

이름 : 공지환

직업 : 재능의 한계를 느낀 연습생

Lv : 6

특성 : 죽기 살기(1), 아낌없이 주는 나무(1)

스킬 : 너의 목소리가 들려(1), 독종(3), 내적 친분(1)

왜 레벨이 올랐지?

의아함도 잠시 미정이라는 글자가 있던 자리에 ‘죽기 살기’ 라는 새로운 특성이 생겼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죽기 살기 모두 반짝거리는 빛이 나고 있었다.

지난밤처럼 정신 건강에 위험한 설명이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빨리 확인하라는 듯 반짝이는 빛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스킬 설명의 처음 부분은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설명 문구 마지막에 특이한 게 생겼다.

*현재 지정 대상

민하준(63), 김영빈(48)

100점 만점에 100인지 1,000점 만점에 100점인지 가늠하기 힘들어 눈살을 찌푸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의 사용 방법 대로면 저것도 설명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신뢰도 설명’

[신뢰도]

나와 상대방이 얼마나 서로를 믿고 있는지, 상대방이 나를 위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는지를 수치화한 표기. 이 숫자는 매우 유동적이며 상대방을 위해 내가 보인 모든 것들에 영향을 받습니다.

10 미만: 당신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못 믿을 사이

40 이상 : 당신의 말에 어느 정도 신빙성을 부여하고 논리적인 결함을 생각해보는 사이

60 이상 : 당신의 말에서 타당함을 찾고 어느 정도 의심스러운 것도 이해하고 넘어갈 사이

70 이상 : 당신이 갑자기 길거리에서 춤춰도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으며 박수 쳐줄 사이

100 : 당신이 우주인이라고 해도 믿을 사람

※ 단, 당신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사람일 경우 신뢰도가 아닌 호구도가 올라갑니다. 주의하세요.

이게 뭐야….

설명을 요구하니 진짜로 설명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불친절하고 제멋대로인 시스템이 있다니.

개발자가 세상에 대한 불만을 심각하게 품고 만든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 현실이 되었다. 수치를 확인한 나는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준의 신뢰도야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간 꽤 깊은 대화를 나누었으니, 매우 유동적이라는 설명대로 오늘은 신뢰도가 높아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영빈은 어째서 48이라는 애매한 수치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나’의 기억을 떠올려봐도 대화를 오래 나눈 적은 없는데.

설마, 밥 때문은 아니겠지….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결론이었지만, 신뢰도란 곧 상대방이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이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라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신뢰도 수치를 모두 확인한 그때, 새로운 알림창이 떴다.

- 사용자가 시스템의 사용법을 인지하고 모든 특성이 개화되어 특전이 발동합니다. 사용자의 현 상태가 수치화되어 표기되며, 특전 발동 효과로 30포인트가 주어집니다.

갑자기 상태창이 변하기 시작했다.

[상태창]

이름 : 공지환

직업 : 재능의 한계를 느낀 연습생

lv : 6

특성 : 죽기살기(1), 아낌없이 주는 나무(1)

체력 : 22

민첩 : 35

보컬 : 40

작사 : 15

작곡 : 7

연기 : 5

행운 : 51

스킬 : 너의 목소리가 들려(1), 독종(3), 내적 친분(1)

뭔가 진짜 게임에서나 볼법한 상태창이 떠 있었다. 아, 보기만 해도 눈 아픈 숫자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

그 와중에 행운이 너무 높아서 이상했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죽었다가 되살아나서 최애 아이돌이랑 같이 사는 중이었다. 이보다 더 높아도 할 말이 없을 것 같긴 했다.

그래도 곡을 써서 들고 가야 하는데 포인트를 줘서 참 다행이라고 자신을 애써 위안하며 작사, 작곡에 포인트를 몰아서 찍어버렸다.

40이라는 수치의 보컬로 그럴듯한 노래를 불렀으니 그 비슷한 숫자라도 만들어야 말이 되는 걸 들고 실장에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특전이라고 했으니 앞으로 언제 또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당장 여기서 밉보이면 이번 생에서도 언래블과는 멀고 먼 사이가 될 게 뻔했고, 공지환의 꿈도 내 인생도 한탕에 말아먹을 터였다.

작사에 10, 작곡에 20을 몰아넣어 겨우 볼만한 숫자를 만들었다.

당장 오늘부터는 잠잘 생각 버리고 작사, 작곡을 파야 할 상황. 암담하다 못해 눈물이 고일 것 같아졌다.

“하아…. 내 인생….”

촉촉해진 눈가를 훔쳐내고 몸을 일으켜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았다.

어느 것 하나도 자기 손으로 제대로 잡지 못하고 연습생이라는 꼬리표로 2년을 지낸 멍청이가 거기 서 있었다.

다른 연습생들보다 덜 노력했다고는 말하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더 노력하지도 않았다.

더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다. 남들과 차별성을 두어 특별한 재능을 갈고 닦은 것도 아니었다.

연습생이라는 것 자체가 외모든, 노래든, 춤이든 그게 무엇이든 끼 혹은 재능으로 빛나는 아이들만 모인 곳인데.

이렇게 특색 없이 살았다. 과거의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체력이나 민첩 보컬만 높은 이유는 과거의 ‘내’가 죽어라, 춤과 노래만 반복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흔히 게임에서 잡캐는 망캐라지만, 어떤 자유도 높았던 오래된 게임에서는 고인물들 모두가 잡캐였다.

난 그런 잡캐가 되어야 했다.

잡생각이 너무 많았다. 차라리 몸을 많이 움직이는 게 정신 사나운 것들을 떨치기에는 효과적이리라 생각하며, 이제는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춤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각 잡힌 안무를 펼칠 수 없다면 다른 멤버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더 못해 보일 테고, 시청자들 눈에는 완벽한 미운 오리 새끼로 보일 것 같았다.

적어도 절도있게 동작을 마무리할 수는 있어야 했다.

몇 번이나 똑같은 동작을 거울에 비춰보며 천천히 확인하고, 가장 보기 좋았던 세빈이 동작을 떠올리며 따라 하려고 애써보았다.

절도있는 동작은 군대에서 질리게 갈굼 받으며 해보지 않았던가, 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을 위안하던 그때. 머리를 스치며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떠올랐다.

“아, 시X….”

지금 나는 미필이었다.

* * *

한편 다른 곳에서 나름대로 바빴던 포잉은 자신이 맡게 된 계약자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 놀고 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어리바리하고 별로 봐줄 만한 곳이 없는 인간이었지만, 딱 한 가지 잘하는 것이 있다면 저를 제법 쓰다듬을 줄 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름 기특하게 여겼건만….

포잉은 정말로 아주 많이 바빴다.

아직 초보 요정인 포잉이었다. 이번에 계약하게 된 공지환이 자신의 삶에 만족해야만 승급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는 다른 초보 요정들이 그렇듯 비교적 만족도가 쉽게 올라가는, 동식물이나 몬스터 등 지적 수준이 높지 않거나 지능이 거의 없는 생물들 대상으로만 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중급 요정부터는 지적 수준이 높은 생물을 맡게 된다.

그에 따라 배워야 하는 정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고, 기본 매뉴얼만으로는 이해도가 부족했다. 특히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튀어나오는 특성이나 스킬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다.

공지환이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초반 시간 동안, 포잉도 새로운 대상을 위한 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했다.

이 고달픈 요정의 삶을 모르는 인간은 불평이 많았다.

가뜩이나 고양이 요정은 태생적으로 잠이 많은 종이었는데, 그 잠을 모두 포기해가며 노력 중인 자신을 모르고 투덜거리다니.

포잉은 언젠가 날을 잡고 혼을 내줘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이다음은 시스템에 대한 추가 교육을 받으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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