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I´ll be there(3)
말도 안 되는 스킬 설명을 보고 잠이 잠들었더니 악몽을 꾸었다.
무대 의상을 차려입은 하준, 영빈, 경환, 세빈 그리고 김우빈이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고, 나는 짐가방을 들고 숙소를 나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스킬은 왜 발동돼서 애들이 속으로 쏟아낸 비난이 두 눈에 보이는지.
“으허억!”
식은땀을 한 바가지 쏟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2층 프레임에 머리를 부딪치고 난 후에야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야….”
무슨 꿈을 이렇게 요란하고 재수 없는 걸로 꾸지?
잠들기 전에는 분명히 옆에 있던 포잉도 보이지 않고,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어슴푸레한 것이 아직 새벽인 모양이었다.
이대로는 다시 잠들어도 비슷한 꿈을 꿀 것 같은 오싹한 예감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 관한 꿈을 꾸었으니 이제 ‘아낌없이 주는 나무’나 ‘독종’, ‘내적 친분’ 같은 다른 스킬의 꿈도 남아있을 것 같아 왠지 공포스러웠다.
다행히 같은 방을 쓰는 영빈과 세빈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동안 쌓인 피로가 녹록지 않았는지 내가 낸 요란한 소리에도 잠에서 깨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나와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5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어제 12시쯤 기절하듯이 잠든 것 같았다. 그럭저럭 잘 만큼 잤으니 이만 씻어서 졸음을 마저 털어내기로 했다.
모자랐던 저녁 탓에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보이는 건 언제 가져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김치통과 이온 음료, 풀떼기들과 닭가슴살 시리즈의 무엇들.
밥이라도 잘 먹어야 연습 때도 힘을 낼 텐데 하는 짠한 마음이 들어 직접 아침밥을 해두기로 마음먹고, 쉬어빠진 애잔한 김치통을 꺼냈다.
“기름만 좀 덜 쓰면 되겠지.”
어젯밤 먹은 치킨은 간에 기별도 안 갔을 테니 나도 먹을 겸 다른 멤버들도 먹을 겸 전기밥솥 한가득 밥을 올리고 빨래를 대충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그냥 개어서 바닥에 쌓아놨다. 자기 옷은 알아서 찾아가라고.
씻고 나와 대충 널려있는 트레이닝복을 꿰어 입고 거실을 둘러보니, 다행히 하룻밤은 청소해둔 대로 무사히 견뎌준 것 같았다.
마침 밥도 타이밍 좋게 완료됐다고 울음소리를 내어 피식 웃고 말았다.
정작 엄마, 아빠한테도 밥 한 끼를 제대로 만들어 준 적이 없는데, 생뚱맞은 곳에서 밥을 하고 있다는 게 조금 웃기기도 했다.
들기름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참기름도 없다는 건 조금 실망스러웠다. 식용유가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거참.
설탕도 카페에서 집어온 듯한 스틱 설탕 몇 개가 전부였다.
누가 챙겨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히 잘 쓰겠다는 인사를 속으로 올리고 휘적휘적해서 완성한 김치볶음밥.
잘 볶아낸 김치 덕에 냄새만으로도 군침이 흘렀다. 여기에 바삭하게 튀기듯 만든 계란후라이를 딱 얹어서 먹어야 정석인데, 아쉽게도 냉장고에는 빈 계란 트레이만 있었다.
얘네는 도대체 뭘 먹고 사는 거지? 사내 식당 밥만 먹고 버티는 건가.
너무 많이 먹으면 몸을 움직일 때 배길 것 같아 조금 적게 하긴 했지만, 밥통 한가득 한 밥을 다 볶아놨으니 늦잠을 자는 것만 아니면 대충 한 그릇씩은 먹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아쉬운 만큼의 밥을 먹고 거실 한복판에 상을 폈다. 궁중팬 채로 상 위에 올려놓고 친절하게 메모도 남겼다.
- 6명이 적당히 나눠 먹어
어느샌가 한 시간이 후딱 흘러 거실 벽에 걸린 시계는 6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뭐야, 벌써 일어났어?”
“어, 형 일어났어요?”
까치집을 머리에 얹고 나온 건 하준이었다.
잠을 설친 건지 아니면 너무 푹 잔 건지 눈이 부어 있었고, 평소에도 낮은 톤의 목소리는 저세상으로 가고 있었다.
“저 먼저 가서 몸 좀 풀고 있을게요. 밥 먹고 오세요.”
“아냐, 같이 가. 왜 혼자 가려고 그래.”
“도망 안 가요. 그냥 떠오른 것 좀 확인해보고 싶고 그래서 그래요.”
저 형님은 아직 나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 것 같았다. 급하게 옷을 입으려는 하준을 말리고 상을 가리켰다.
“먹을 만은 할 거예요.”
씩 웃으며 말을 던지자, 그게 어이없었던지 픽 웃은 하준이 상 앞에 털썩 앉아 쌓아놨던 그릇 하나와 수저 하나를 챙겨 들었다.
“형은 경환이랑 세빈이 깨워야 하니까 좀 더 드시고 힘내세요.”
“아… 너 일부러 먼저 도망가냐.”
“…하하, 설마요.”
백경환과 강세빈은 잠에서 깨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둘 때문에 스케줄 늦을 거 같은 날에는 하준이 2시간 일찍 일어나 먼저 준비하고, 남은 시간 내내 잠에 취한 둘을 끌고 다니며 챙겼다는 인터뷰 내용도 있었다.
그건 지금같이 하루하루가 바쁜 연습생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슬금슬금 몸을 뺀 나는 하준에게 어설픈 웃음을 보이며 손을 흔들어주고는 숙소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어련하겠냐는 듯한 눈빛이 스쳤던 것 같았지만 모른 척하기로 했다. 스킬을 발동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꾸 하준의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아서 곤란한 기분이 드는 것도 기분 탓으로 넘겼다.
“포잉은 또 어딜 간 거지.”
같이 있어 준다고 하더니 어째 잘 때만 같이 있어 주는 것 같아, 포잉에 대한 원망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숨을 들이켜자 햇빛을 아직 받지 못한 새벽 공기 특유의 서늘하고 습기 가득한 냄새가 났다.
굳이 먼저 연습실에 가보려고 했던 이유는 현재 나의 수준이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걸어가는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찬 공기 덕분에 되레 머리는 더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안무는 그럭저럭 따라가는 것을 확인했지만, 보컬 레슨에서는 각자의 파트가 정해진 4분 정도의 노래만 연습했기에 내 음역대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제 나는 개별 보컬 레슨을 받지 않았다.
어차피 회사는 24시간 출입할 수 있었고 연습실은 9시 이전에라면 누구든 사용할 수 있었다.
사실 김치볶음밥을 할 때 스킬 하나를 발동시켜보았다.
하준과 영빈을 대상으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발동시켜놨고, 스킬이 이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지 지켜볼 참이었다.
경비 아저씨에게 꾸벅 인사를 건네고 제일 작은 연습실을 찾아 들어가 기억을 더듬어가며 목을 풀기 시작했다.
노래방도 잘 안 가던 내가 정확한 음을 잡아 발성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미리 적응시켜놔야지 싶었다.
그래서 고른 곡은 얼마 전 종영했을 드라마의 OST였다.
사극풍의 판타지 드라마였던 것 같은데, 드라마를 보지 않은 나도 OST는 들어봤을 정도로 여러모로 인기였다고 들었었다.
“제목이… ‘오직 그대’였나.”
주연 배우와 아역 배우 모두 연기를 꽤 하던 사람들로 기억했다. 성인 역을 맡은 배우가 OST를 직접 부른 드라마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었다.
사실 기억나는 노래가 전부 언래블의 곡이거나, 아직 발표되지 않았을 곡들뿐이었다.
어제 타임 패러독스인가 무엇인가를 겪은 나로서는 미래의 곡을 미리 불렀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사실에 겁이 났고, 그나마 기억하는 노래를 더듬다 보니 나온 게 이 곡뿐이었다.
이왕 다시 살아난 거 온갖 능력을 다 갖추고 태어나고, 로또 번호도 기억하고 살았으면 좀 좋아?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노래를 부르다 보니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다.
호흡이 딸려야 할 부분이 지나고 평소에 낼 수 없었던 음역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노래가 끝난 뒤에도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멍해졌다.
지환이가 원래 이렇게 잘했어?
기억 속의 ‘나’는 늘 노래에 감정을 담지 못해서 혼이 나고 발성이 뚜렷하지 못하다고 핀잔을 받았다. 소위 겉멋 든 노래를 부른다고, 가수 때려치우라는 폭언을 들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국 마음속 깊숙이 숨어있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언래블의 수록곡 중 하나를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누군가 있는 연습실에 사람이 들어오지는 않을 테고, 설사 들킨다 해도 아직 나오지 않은 곡이니 음원도 없겠다, 혼자 흥얼거린 거라고 대충 둘러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언래블의 앨범에는 듣기에는 편하지만 따라 부를 땐 어려운 곡이 수두룩했다. 수많은 솜뭉치들이 언래블을 기만자라 부르며 쏟아냈을 눈물이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한강만큼은 될 것 같았다.
물론 나도 그 팬 중 하나였다.
타이틀 곡과는 분위기가 다른 수록곡이 꽤 많았고. 그중에서도 풋풋하고 아련해서 한 적 없던 짝사랑의 기분을 느끼게 하던 ‘졸업식’이라는 노래를 나는 꽤 좋아했었다.
차마 남들 앞에서는 부르지 못할 노래라 혼자만 자주 흥얼거렸던 수많은 애환이 담긴 곡이었다.
방에서 사진을 편집하며 이 노래를 흥얼거릴 때면, 누나가 방문을 열고 들이닥쳐서 애들 노래 망치지 말고 혼자 있을 때 부르라고 나를 사정없이 구박했었더랬다.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쓰린 추억이네.
하지만 왠지 지금이라면 정말 잘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서, 당장 이 노래를 불러야 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사명감이 차올라 입이 미친 듯이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혼자 있는데 뭐 어때 하는 안일한 마음과 어제 일을 떠올려보고 조심하라는 마음의 싸움은 결국 욕망이 승리하는 뻔한 결과를 가져왔다.
급격하게 텐션이 높아진 나는 노래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오늘은 딱 이거 한 곡만 불러보고 몸 풀러 가야지, 하고 자신을 다독였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말 못 하고 숨겨둔 이야기,
오늘 딱 하루만 내게 허락해 줘.
더 많은 욕심은 내지 않을게.
우리가 오늘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면
다음은 언제일지 기약할 수 없잖아.
저기에서 우리를 부르는 친구들은 잠시만 모른 척하자.
내가 서툴게 하는 말이라도 웃지 말고 들어줘.
너를 잃고 싶지 않아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내가 너를 너무 많이 좋아해서
그래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그리고 그 하지 못했던 이야기는 영영 하지 않게 될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때문에 내 등 뒤로 식은땀이 또르륵 흘러내리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거 무슨 노래냐?”
“…안녕하세요, 실장님”
“응, 그래 안녕. 방금 부른 노래, 처음 듣는데 누구 거야?”
왜 팀장님도 아니고 실장님이 지금 이 시각에, 이 자리에 있는지 한낱 연습생인 내가 알 방법은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난 망한 것 같았다.
“그냥 생각나서….”
“꽤 본격적이던데. 네가 만든 거야?”
아무 말 못 하고 쩔쩔매던 나는 정윤 실장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것 같아, 울고만 싶어졌다.
조심성이라고는 먹고 죽을래도 없는 이놈의 주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