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I´ll be there(1)
이후 이어진 연습, 그리고 연습.
연습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들어온 시간은 오후 7시였다.
멤버의 입원과 퇴원이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한 회사가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배려해 주었다.
나야 병원에 있다가 들어갔다지만, 다른 애들은 모두 아침부터 회사에 내내 있었는데 이게 배려라니.
그럭저럭 서 있을만해 보이는 것은 평소에도 체력이 좋은 편인 백경환과 나뿐이었다.
숙소 바닥이 김치통이라도 된 것마냥 모두가 푹 익은 파김치 같은 몰골이었다.
“오늘 치킨 시켜 먹으라고 팀장님이 카드 주셨으니까 씻고 와.”
“오오… 치킨!”
“형부터 씻어요….”
하준이 아까 잠깐 소현 팀장님한테 불려가더니 이런저런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 싫은지 모두가 서로 먼저 씻으라고 미루기에, 내가 먼저 씻겠다고 했다. 마지막에 씻는 사람이 화장실 정돈까지 해야 했기에 마지막보단 처음이 나았다.
확실히 씻고 나서 거울을 확인하니 이제는 좀 사람 같아 보였다.
저번 생에 소속사에서 연습 영상 같은 걸 올려주면, 땀 흘리는 우리 래블이들도 너무 좋아! 라고 외치던 팬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지금 이 파김치들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불쌍하다고 짠해할까 아니면 덕심 와장창일까?
이곳의 기억이 서서히 내 머릿속에 차오르고 있었다. 정말 다행인 건 한번 떠오르면 자연스럽게 각인되어서 굳이 매번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기억을 습득할 때마다 그때그때의 감정들까지 한 번에 몰려와서 조금 지치는 면도 있었다.
그런 부분들 때문에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게 아니라 조금씩 시간을 두고 흡수되는 건가 하는 별로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2년 차 연습생이었고, 지금 이 멤버들을 팀이라기보다는 경쟁자라고만 인식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날카로운 얼굴이 첫인상을 말아먹는데 큰 몫을 해서, 멤버들과의 사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나마 친하게 지낸 사람이 백경환, 김우빈, 최힘찬이라니.
경환이는 워낙 수더분하고 듬직한 느낌이라 모두와 잘 어울리는 애였지….
몸의 감정은 언래블에 대한 내 팬심을 이길 수 없었는지, 기존에 지환이가 갖고 있던 감정은 모조리 불태워졌다.
더군다나 아까 김우빈의 속마음까지 봤는데 굳이 친한 척할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몸을 씻고 나온 후에 3명이 쓰는 방으로 한 명씩 들어가 오늘 하루에 대해 짧은 영상을 남기는 시간이 있었다.
가장 처음으로 들어갔던 나는 어색하고 낯설어서 잠깐 동안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30년이 조금 안 되는 삶 동안 셀카도 몇 장 안 찍어본 내가 일상 로그라는 걸 남겨야 한다니.
생활 틈틈이 찍은 로그가 ‘아이돌 창조’ 제작진이 만든 홈페이지에 멤버별로 올라가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짧은 영상이 최종 멤버 투표에 생각보다 영향을 많이 줬다는 선배 솜뭉치들의 증언도 들었었고.
이미 회사로 돌아온 직후 짧게 인터뷰 영상을 찍었지만, 그건 정말 일한다는 느낌으로 간단하게 주어진 대답만 한 정도였다. 이렇게 리얼로 간다는 느낌이 적어서 덜 어색했었는데.
“음…. 미안해요, 여러분. 걱정 많이 했죠?”
아이돌 창조는 주 3회 방송이라 내가 사고 났던 내용을 아직은 팬들이 알 수 없지만, 이 영상을 볼 때쯤에는 그들도 방송 혹은 회사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내가 솜뭉치일 때 멤버의 사고를 알았다면 어땠을까, 뭐가 궁금할까를 생각하며 천천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약간의 사고가 있었지만 전 괜찮아요. 자, 이렇게 보여주면 믿을까요? 하하.”
잠깐 카메라를 들어 방 내부가 잘 보이지 않도록 방향을 조심하며 전신을 보여주고, 원래 자리에 다시 고정시켰다.
“회사에서도 잘 챙겨주셨고 멤버들도 엄청 걱정해서 좀 찡했어요. 특히 준이 형이 정색하고 혼내는데 진짜. 하하하…. 그 준이 형 특유 표정 있죠? 완전 화나면 나오는 차가운 표정. 근데 또 말도 딱딱하게 하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엄청 차가워 보이는데 사실…. 걱정돼서 어쩔 줄 모르는 그게 보이는 거예요.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죠.”
스킬 덕에 잠시 볼 수 있었던 민하준의 진심이 떠올라 무의식중에 웃고 있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아, 이거 준이 형이 알면 안 되는데. 또 막 잔소리할 거예요. 아, 그리고 세빈이가 사탕도 하나 줬구요. 아이고, 이건 회사에 비밀이었는데. 여러분 비밀 지켜줄 거죠?”
내가 래블이들 로그를 볼 때 가졌던 감정을 떠올리니 생각보다 말은 술술 나왔다. 몇 가지 잡담을 조금 더 하다가 5분을 넘긴 것을 보고 마무리 인사를 했다.
“오늘 이야기들은 여러분들이랑 저만 아는 비밀인 거예요. 아셨죠? 저 어디 안 가고 여기 꼭 잘 있을게요. 자, 약속! 하하, 그럼 저 이만 갈게요.”
새끼손가락을 거는 듯한 모션을 취해주고 영상을 종료시켰다.
정작 카메라 앞에 설 때는 긴장했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었다. 나 의외로 실전 타입인가?
다른 사람들도 차례대로 일어나 씻으러 가고 자기 짐을 챙기러 방에 들어가고 하는 사이, 먼저 씻었던 나는 거실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우리 애들과 같은 숙소에 있어서 행복한 건 행복한 거고, 지금 숙소 몰골이 말이 아닌 건 별개니까.
숙소는 제법 큰 방 두 개에 주방 겸 거실이라고 볼 수 있는 공간이 조금. 화장실도 하나 있었다.
방에는 이층 침대가 2개씩 들어가 있었는데, 그 안은 차마 다시 떠올리기 힘들 정도였다.
주기적으로 청소해 주시는 분이 온다고 알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 모양인 걸까?
천 조각 같은 게 바닥에 굴러다니길래 대충 걸레인 줄 알고 주방부터 거실까지 닦고 있었는데, 백경환이 내가 들고 있는 걸레를 보더니 한마디 했다.
“그거 걸레 아닌데, 지환아.”
“…큼. 오늘부터 걸레 해요.”
“미안하긴 했나 보다? 공지환 네가 청소를 다 하고.”
아까부터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던 힘찬이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다행히 기분이 좀 괜찮아진 것 같은데.
“아니, 뭐 그냥…. 야 저리 가, 거기 안 닦았어.”
괜히 멋쩍어져서 바닥만 박박 닦으며 사방에 잔소리를 시전했다.
물도 제대로 안 닦고 나와서 사방을 돌아다니는 놈들, 닦은 데 안 닦은 데 구분 없이 다 밟고 다니는 놈들까지.
“세빈아, 머리 말리고 누워!”
“김영빈!! 너 물기 제대로 닦으랬지!!”
이쪽에서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강세빈의 머리끝에서 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저러다 감기 걸리지 라는 생각을 하며 외치는 동시에 하준이가 영빈이한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묘해진 분위기에 모든 멤버들이 나와 하준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고, 조용히 지켜보던 영빈이 한마디 덧붙였다.
“잔소리쟁이가 둘이 됐네.”
아, 급격하게 누나가 보고 싶어진다.
* * *
작은 소동이 지나가고 드디어 치킨이 배달되었다.
한창 많이 먹을 나이의 남자애들 7명에게 치킨 3마리는 턱없이 적은 양이었지만, 기름진 음식을 금지당한 시점이기에 이것도 그저 감사했다.
모처럼 세빈이도 활짝 웃는 얼굴로 닭 다리를 들고 있었고, 힘찬이는 그런 세빈이가 웃겨 죽겠다며 이런 걸 찍어야 한다고 카메라를 뜯어오려다 하준에게 등짝을 얻어맞았다.
신나는 치킨 파티가 끝나자 모처럼 주어진 여유시간 동안 침대와 함께 보내거나 음악을 듣는 등, 개개인마다 조금 풀어진 시간들을 보냈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백경환과 김우빈이 뒤처리를 하는 동안 갑자기 모자를 찾아 눌러쓴 민하준이 나한테도 모자를 내밀었다.
“나가자.”
“형, 저 안 나간다고 실장님이랑 약속하고 왔는데….”
“미리 다 말했어. 너랑 얘기 좀 한다고.”
보지 않았지만 나머지 멤버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멤버들 없이 나눠야 하는 얘기인가 보다.
“형, 나가는 김에 이것 좀.”
혼자 세상 태평한 백경환이 치킨 박스와 재활용 쓰레기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든 나는 슬리퍼를 발에 꿰어 신고 터덜터덜 하준을 따라나섰다.
박스를 내려놓고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공원에 도착하자, 하준이 벤치에 앉아 자기 옆자리를 툭툭 쳤다.
“진짜 더 안 쉬어도 괜찮냐.”
“네, 진짜 괜찮아요.”
민하준과 나란히 앉아있다는 사실에 긴장이 바짝 돼서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나 그냥 포기시키라고 들었나? 무수히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사이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잡아먹냐?”
“아니, 그냥… 제가 잘못한 게 많으니까.”
“잘못한 줄은 알고?”
“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가는 동안, 제법 시원한 바람도 함께 스쳐갔다. 관리가 안 된 낡은 그네가 삐꺽 소리를 내며 흔들거리고 있었고, 나는 그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면을 바라보던 하준은 몸을 틀어 나를 바라봤다.
솔직히 정신없이 레슨 받느라 몰아칠 때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민하준이 원래 내 최애였다. 최애와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눈 마주치고 말할 거라고 꿈에라도 생각해봤어야지.
“지환아, 넌 이게 얼마나 간절하냐.”
“…?”
덤덤한 목소리로 묻는 하준의 의도가 짐작되지 않아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스킬을 사용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스킬을 쓰면 치사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꾹 눌러 참았다.
“나랑 영빈이가 전에 있던 회사에서 만나 같이 여기로 온 거 알지?”
“네.”
“영빈이가 저번 회사에서 엎어지면서 그만두려던 거, 내가 억지로 여기 끌고 왔어. 꼭 걔랑 데뷔하고 싶다고 하면서.”
늘 단정하고 단단해서 누가 찔러도 쉽게 찔리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이었다. 워낙 다정다감하게 생겨서 성격이 무를 거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실상은 자기 세상이 확고해서 타인이 선 넘는 걸 용납하지 않고 단칼에 쳐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게 내가 언래블의 팬으로서 보아온 리더 민하준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는 조금 지쳐있었고, 그보다 조금 더 버거워 보였다. 마치 철없는 사고뭉치 동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평범한 20살짜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냥 크루 형들이랑 있을 걸 그랬나? 언더에서 활동이나 계속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지난 3년 내내 달고 살았어.”
“아….”
하준은 연습생 생활을 하기 전에 15살 때부터 힙합이라는 장르에 심취해있었고, 그래서 아는 형들한테 알음알음 장비 다루는 법을 배우며 스스로 곡을 쓰고 랩도 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공연을 본 작은 기획사가 힙합 아이돌을 만든다고 꼬셔서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고.
“근데 내가 영빈이 끌고 여기 왔잖아. 그래서 진짜 이 악물고 하고 있거든? 이게 마지막이라고 엄마랑 약속도 했고.”
당장 입을 열어서 너는 데뷔할 거고 진짜 잘 될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예전에 쓰던 활동명이 뭔지 알아?”
“D.P요. Done is better than perfect….”
“오, 아네? 너 나 별로 안 좋아해서 관심 없는 줄 알았더니.”
“아니에요, 그냥 사람이랑 친해지는 게 전 좀 힘들어서….”
“그래, 내가 평소에 말이 좀 날카롭지. 후, 고쳐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
“괜찮아요, 형은 빈말은 안 하잖아요.”
내 최애가 너라서 네 예전 곡들도 다 찾아서 들었어! 라고 내적 자아가 소리치는 것 같았다.
안돼, 지금은 나대지 마라. 진짜…. 지금 말실수하면 다 때려치워야 할 거 같으니까.
조금 신기하게도, 스킬을 켜지 않았는데 하준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웃기지? 어린 게 어디서 본건 있어서 저 문장에 꽂혀서 저걸 좌우명도 아니고 이름으로 썼다는 게.”
“에이, 멋있죠. 저 형 랩도 영상 몇 번 봤어요.”
“야, 창피하니까 말하지 마.”
제법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나도 민하준도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끝까지 가자, 지환아. 우리 중 누가 어떻게 되더라도 일단 시작했잖아.”
“…네, 형.”
“대신에 개인으로 데뷔하고 싶은 거면 지금이라도 팀장님한테 말하고.”
“네?”
“우리 중에 누가 남든 누가 떠나야 하든, 결국은 팀이야. 난 팀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거고. 그래서 묻고 싶었어. 넌 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게 민하준이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