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Fiction(1)
“지환아, 정신이 드니?”
“아으….”
온몸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걱정스러운 표정의 낯선 얼굴들.
“여기는…?”
“병원이지, 인마!”
“아휴, 애 놀라요! 조용히 해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흘러나온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어… 나 목소리가…?”
“괜찮아. 일시적인 거랬어. 너무 무리하지 말랬잖아, 이 녀석아.”
그제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내가 꽤 멀쩡한 모습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나 교통사고….”
“괜찮아, 잠깐 놀래서 쓰러진 거래. 차주분도 아까 왔다 갔어.”
“그러게 그 시간에 밖을 왜 나갔어. 조심성 없이 얘가!”
등짝을 팡팡 때리는 손길에 아이고 소리가 저절로 나올 만큼 아파서 눈물을 찔끔거리자, 때린 상대방도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마지막 기억과 현재 상태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에 허우적대는 날 구제해준 건 타이밍 좋게 등장한 의사 선생님이었다.
“지환 군, 특별히 통증이 있는 곳은 없어요?”
“어… 네. 그런 것 같아요. 두통이 좀 있고 정신이 없긴 한데.”
의사는 그 후로도 몇 가지를 더 물어보더니, 조금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러자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두 남녀도 이 기회에 잠도 좀 푹 자고 하라며 굳이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주고 병실을 나갔다.
“이게 다 뭐야….”
“님, 정신 안 차림?”
“아씨, 깜짝이야!”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킨 내가 영문을 알 수 없어 중얼거리던 그때, 갑자기 이불 위에 나타나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고양이, 포잉이 등장했다.
꿈인 줄 알았던 그 모든 것들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빈이를 만났고 어떤 미친놈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어버렸다. 그런 나에게 기회를 주겠다 말한 요정이 있었고, 낯선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이것들이 지금 나에게 벌어진 현실이었다. 정말로 믿기 어려웠지만.
“내가 겪어보면 알 거라고 했지? 예정이랑 조금 차이가 생겼지만 어쩔 수 없나….”
“와…. 나 지금 또 꿈꾸나?”
“현실 도피하지 말고 정신 차리셈.”
다시 주섬주섬 누우려는 내 팔을 후려친 포잉. 내가 엉거주춤 일어나자,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려는 듯 한마디 던지고 그루밍을 시작했다.
“곧 그 몸의 기억이 떠오를 거니까 확인하셈.”
“그… 처음부터 궁금했던 건데 너 왜 초딩 말투냐?”
“인터넷으로 한국말 배웠음.”
“아…. 다시 배워라. 요새는 초딩들도 그렇게 말 안 해….”
깊은 한숨과 함께 두통이 가시질 않는 머리를 부여잡으니 천천히 몸의 기억이라는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공지환, 18세.
새로운 몸은 프로젝트 아이돌 그룹을 준비 중인 연습생이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는, ‘전생’이라고 말하는 게 적응되진 않지만, 죽기 전의 내가 보고 손발이 없어질 뻔했던 프로그램이었다.
“아이돌 창조…. 하.”
“풉, 이름 그게 뭐임. 네이밍 센스 어쩔.”
“아, 포잉 제발 말투 좀….”
못 들은 척 그루밍에 열중하는 망할 요정은 그렇다 치고, 이름은 그대로인데 생긴 것도, 하고 있는 일도 전혀 다른 이 세계의 내가 여전히 너무 낯설었다.
이 몸의 원주인은 곧 데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연습에 매진했겠지만, 이미 그 프로를 모두 본 나는 언래블이 4인조 그룹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 진짜 망했네.”
“그러게 잘 고르라고 했잖아.”
“그러게….”
그루밍을 끝낸 포잉은 기지개를 켜더니 내 앞에 자세를 잡고 앉았다.
“님이 망하면 나도 망하니까 지금부터 내 말 집중해서 들어.”
“응, 집중했어.”
그러니까 내가 마지막에 남긴 가장 큰 미련이 포잉을 불러내게 된 거고, 그 결과 현재의 몸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했다.
이 몸의 원주인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포잉의 단호한 눈동자는 나에게 대답해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포잉이 직접 도와줄 수 있는 건 몇 가지 감각적인 부분이지만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행복한 삶을 살고 후회가 적은 죽음을 맞이하도록 돕는 게 그의 최종 목표라는 말도 덧붙였다.
“대충 이해는 했는데 나 음치, 몸치, 박친데 괜찮아?”
“상태창이라고 불러보셈.”
“상태창.”
이라고 중얼거리자마자 처음 선택을 강요했던 것과 같은, 무기질의 느낌이 물씬 나는 작은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아빠랑 누나도.
“진짜 엄청 걱정돼서 그러는데 이거….”
“님이랑 나한테만 보이는 거고, 속으로 생각해도 뜰 거임.”
“와, 내가 그거 생각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님은 진짜 전생에 그 흔한 판타지 소설도 안 보고 어떻게 살았음?”
허허, 하는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눈앞의 창이 보여주는 글자와 숫자를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진짜로 덕질에 매진하느라 현생(현실의 삶)은 대충 미뤄둔 나이기에, 포잉이 말하는 저런 내용의 책들은 본 적이 없었다.
내가 판타지 소설을 열심히 읽었던 건 학교 다닐 때였고, 심지어 그때는 중세풍의 세상에 엘프, 드워프, 드래곤이 나오고 하는 그런 판타지였는데.
[상태창]
이름 : 공지환
직업 : 후회가 많이 남은 연습생
Lv : 5
특성 : 미정
스킬 : 너의 목소리가 들려(1), 독종(3)
내가 모르는 세상의 한구석에서 참 많은 것들이 바뀌었던 것 같았다.
게임에서나 보던 것들이 눈앞에 떠 있는 걸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리 길지 않은 단어들의 조합을 확인하고 설명해달란 듯이 포잉을 바라보자, 포잉은 상태창을 들여다보더니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그 표정이 어쩐지 너무 귀여워 끌어안을 뻔했지만 냥냥 펀치를 잊지 않은 덕에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아주아주 망한 건 아니고 조금 망한 정도네.”
“그럼 다행인 거 아냐?”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보통 요정을 불러낼 정도인 사람들은 기본 레벨이 10에 스킬 3개는 먹고 들어가는 게 평균임!”
아무래도 이 고양이는 화가 많은 고양이인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그간 누님의 화를 풀기 위해 익힌 스킬로 포잉을 달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주 망한 건 아니라며. 포잉 네가 도와주면 잘 되겠지. 언래블이 꽤 인지도 있는 그룹이었으니까, 나만 노력하면 될 거야.”
“님은 긍정적이라 좋겠네염….”
한풀 꺾인 목소리를 내는 포잉을 살며시 품에 안고 머리 가운데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수많은 아이돌 팬 중 한 명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 아이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게.
하지만 내가 아주 길고 선명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면 지금 이 병실에 누워있는 상황이 이제는 나의 현실이었다.
누나는 종종 내게 말했었다.
어설프게 하다 말 거면 시작도 하지 말라고.
바쁜 일들로 늘 집을 비워야 했던 부모님 그리고 어렸던 나,
그런 내 곁에는 툴툴거리면서도 항상 애틋한 마음으로 보듬어주었던 누나가 있었다.
누나는 언제나 나에게 정신적인 지주였고, 내 마음이 온전히 쉴 수 있는 안식처였다.
당장 전생에서만 해도 누나 말 안 들어서 죽었으니까.
이제 볼 수 없는 가족을 떠올리자 심장이 쥐어짜지는 통증과 함께 목 끝까지 울음이 차올랐다.
차마 뱉을 수 없어서 꾸역꾸역 삼키고 있는 감정들이 한계치 근처에서 간당간당했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먼저 떠나기까지 했으니, 나라는 존재는 가족에게 가슴 속 커다란 대못이 되었을 텐데.
심리적인 통증에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지만, 다행히 포잉은 고개를 돌려 모른 척해 주었다.
“…포잉, 기억을 좀 더 쉽게 떠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해?”
“키워드가 될만한 걸 강하게 생각해보셈.”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 슬픈 생각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포잉의 말대로 현재 나의 가족에 대한 생각에 집중하자,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그들에 관한 기억이 밀려들어 왔다.
“하아…. 아니 난 왜 매번 이러냐.”
“?”
“그냥 여기 지환이도 참 그렇다 싶어서.”
이전의 공지환도 가족을 애먹였는데, 지금의 공지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노래하는 게,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았을 뿐.
부모님은 어릴 때 모두 돌아가셨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누나가 외가의 도움을 받아 ‘공지환’을 키웠고, 그 공지환, 그러니까 ‘나’는 아이돌이 되겠다는 허무맹랑한 꿈 때문에 누나와 크게 다툰 후 가출하듯 집을 나왔다.
그 후 누나에게는 비밀로 하고 막내 외삼촌의 도움을 받아 지금의 기획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공지환은 빛을 내보기 전에 스러질 위기에 처해있었다.
“혹시 이거 난이도 조절 다시 할 수…?”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셈.”
“그래…. 어림도 없지, 허허.”
아이돌 창조를 다시 떠올려본 나는, 비슷한 포지션을 담당하다 결국 평가에서 떨어졌던 연습생을 기억할 수 있었다.
마스크나 발성은 괜찮다는 평을 받았지만, 재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1차 평가에서 제명된 연습생 중 한 명.
‘내’가 연습실에서 나오던 중, 방송사 직원들과 회사 사람들이 심각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던 걸 듣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한 편씩 방송이 진행되면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 날이 더 많아졌고, 그만큼 자신감은 점점 더 바닥으로 추락했던 ‘나’. ‘나’는 이미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괜히 눈에 띄어서 한 소리 듣게 될까 봐 빠르게 자리를 피하려다가도, 곧이어 언급된 자신의 이름에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러게 왜 그걸 들어가지고.”
“뭐임?”
“아냐, 그냥 좀 불쌍해서.”
“님이 남을 동정할 상황이 아님.”
“이젠 남이 아니라 나잖아.”
아까 병실을 지켜준 남자가 매니저였고, 여자가 팀장이었다는 것까지 기억해냈다.
그들도 돌아가는 상황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테니 마음이라도 추스르고 푹 쉬라고 했던 것 같았다.
“어림도 없지.”
“??”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포잉을 끌어당겨 안고 다시 자리에 눕자, 조금 심란한 얼굴이던 그가 못 이기는 척 등을 돌려 내 품에 안겨 주었다.
땍땍거리긴 해도 귀여운 구석이 있는 요정인 것 같았다.
“포잉, 근데 넌 나한테만 보이는 거야?”
“응. 왜?”
“그냥. 좋아서.”
“이상한 인간.”
못 이기는 척 내 팔 위에 자신의 앞발을 올려둔 포잉이 고마웠다. 그대로 끝날뻔했던 나한테 기회를 준 것도, 이제 이 세상에서 내가 아는 나를 기억하는 것도 이 난폭한 고양이 요정뿐이었으니까.
눈을 감자 무수히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내 기억과 지환이의 기억.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차를 본 순간, 모든 것을 놔버린 텅 비어버린 지환이의 마음까지도.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게 이루어지도록 포잉이 온 것이라면, 이 세계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한 가지였다.
언래블이 이 세상 누구보다도 빛나도록 만드는 것.
나는 언래블의 제5의 멤버가 되어 직접 애들의 앞날에 꽃잎을 깔아주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내가 가진 꿈이자, 또 다른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추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