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무덤 안의 대가야 왕 김설주.
그리고 왕비와 아이.
수천 년 전에 벌어졌던, 사랑과 배신 그리고 비극을 보면서 우리는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용안을 뵈었으면, 일단 인사를 드려야 한다.”
“인사요?”
“무덤을 열어 주인의 영원한 잠을 방해하면,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룰이 있다.”
왕릉의 관을 열면 액막이 제사를 지내는 고고학계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
아까 밥차를 불렀을 때, 제사상도 함께 준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발굴지에 도착한 30명이 정성스럽게 제를 올렸고, 모든 향불이 다 탄 후에야, 석관 안의 물건을 만질 수 있었다.
윤 교수님의 손이 가장 먼저 간 것은, 왕의 머리 위에 있는 ‘가야금’.
왕비였던 여인이 가야금을 잘 타지 않았을까?
그것 때문에 왕비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무덤에 가야금을 넣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러서 가야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지만, 윤 교수님은 고고학자답게 한 조각 한 조각 조심해서 수습했다.
자기 손으로 가야금의 ‘완전체’를 복원하겠다는 의지가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도 원형 가야금의 소리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눈이 처음부터 노려보고 있었던 것은, 왕이 베고 있는 머릿돌이었다.
왠지 알 수 없지만, 처음부터 그것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왕의 머릿돌에는 ‘비문’이 가득 쓰여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윤 교수님께 말했다.
“왕의 머릿돌에 비문이 있습니다.”
윤 교수님도 곧 그것을 확인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가야금을 끝내고, 머릿돌을 수습하지.”
“알겠습니다.”
가야금에서 떨어진 먼지 하나까지 모두 수습한 윤 교수의 눈빛이 이제야 머릿돌을 향했다.
윤 교수는 왕의 유골을 아주 조심스럽게 모셨다. 살아있는 왕을 모시는 손길이었다.
옆에서 도와주는 조교와 학생에게도 조심해서 모시라는 주의를 강하게 주었다.
“뼈가 섞이지 않게 조심해.”
윤 교수는 왕과 왕비 그리고 아이의 뼈가 섞이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모든 뼈를 완벽하게 수습했을 때, 윤 교수는 아주 조심스럽게 머릿돌을 꺼내 들었다.
윤 교수님의 표정이 아주 밝았다.
“비문의 상태가 아주 좋아.”
머릿돌에 음각된 한자는 바로 해석할 수 있었다.
'하늘 아래 첫 가야는 예부터 문화가 융성하고'
'천하로 물산과 철기를 내렸다.'
'하지만 동적(신라)이 득세하여'
'십제(백제를 낮춰 부르는)와 함께 벌하려 했으나'
'도해인(왜인)이 간사하고'
'왕성인이 옛 기세를 잃어 왕이 외롭다.'
'천명인의 피로 외적을 막지만 위태롭다.'
'토아 7년.'
'왕성인의 타락과 불경을 참지 못한'
'태고신께서 바다를 몰고 와 왕성을 덮쳤다.'
'첫 가야는 어둠 속에서 죽어갔다.'
'천명인은 약속받은 자.'
'자손과 자손의 피가 이어지고.'
'언젠가 하늘의 때가 오리라.'
'천년의 시간을 기다려'
'나는 철인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나는 머릿돌의 해석을 읽고 온몸이 떨려왔다.
‘첫 가야.’ 혹시 금관가야가 아닐까?
나는 윤 교수님의 눈을 보고 심각하게 물었다.
“교수님, ‘첫 가야’라면 혹시 금관가야가 아닐까요?”
다시 한번 비문을 처음부터 확인한 윤 교수는 머리를 끄덕이고 있었다.
“'왕성인의 타락과 불경을 참지 못한 태고신께서 바다를 몰고 와 왕성을 덮쳤다.'라는 내용을 보면 왕성의 위치가 바닷가라는 말이었고, 바닷가에 있었던 가야라면 금관가야뿐이다.”
나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태고의 신이 바다를 몰고 와 왕성을 덮쳤다.’라는 내용을 보면 ‘쓰나미’가 있었다는 말이겠죠?”
“아무래도 지진과 함께 내륙 깊숙이 들어온 ‘해일’이 존재 했던 것 같다.”
금관가야가 어떻게 멸망했는지를 확인했다.
멸망의 이유는 '쓰나미'
거대한 해일이 밀려와 금관가야를 덮친 것이었다.
'첫 가야는 어둠 속에서 죽어갔다.'
그것도 야간에 ‘재앙’이 벌어져, 왕도인은 대피도 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나의 손바닥이 밝게 빛났다. 그래서 다급하게 손을 숨겼다. 윤 교수님과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는데, 나는 자연스럽게 플래시를 만지며 넘어갔다.
나는 몸을 돌아서 밖으로 나가며 웃었다. 그리고 자신 있게 미션창을 띄웠다.
<<황금인은 그날의 재앙에 관해서 확인하라.>>
<<금관가야 멸망의 이유를 확인하세요.>>
<<금관가야의 멸망을 확인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시간을 돌리는 손'을 드립니다.>>
손바닥을 펴면 아직도 손에서 따듯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의 돌리는 손'을 어떻게 쓰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래서 농담으로 이야기했던 피부과 이야기를 떠올렸다.
시간을 돌리는 손으로 정말 젊어질 수 있을까?
거울을 보며 나의 얼굴을 만지려고 하다가, 만에 하나 있을 부작용을 생각하여 참았다.
내 얼굴은 너무 완벽하지. 그럼. 작품은 함부로 손대면 안 돼.
그래서 주변을 살피다가 얼굴이 크게 '아픈' 경복이나 태경이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미 크게 망가진 놈들로 실험을 해 봐야지.
둘 중의 누구를 치료해 줘야 하나···. 흠 멀리서 보니 막상막하다. 보기에 둘 다 가망 없이 산소 호흡기를 낀 얼굴.
좀 가까이에서 확인해야 누가 더 ‘임종 직전’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에게 시선을 두며 천천히 다가가다가
어??? 이쪽으로 유물을 나르고 있던 조교와 부딪쳤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조교가 떨어트리려고 했던 유물을 잡았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람 크기의 큰 검이었다.
순간 강한 바람이 확 불었는데,
휘이이잉~~
검에 붙어 있던 녹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가야 왕의 운검'이 순간 옛 모습을 드러냈다.
검에 돗새김 되어 있는 '가야의 혼은 하나다.'라는 한자.
가야를 연합왕국이 아니라, 백제나 신라 같은 중앙집권 국가로 바꾸고 싶었던 대가야 왕의 야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의 손에서 나던 빛이 사라졌다.
'시간을 돌리는 손'은 과거의 물건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앞으로 수많은 유물을 발굴할 것이니 유용하게 쓰이리라 생각했다.
나는 경복이와 태경이에게 가서 말했다.
“너희들의 아픈 얼굴을 치료해 주고 싶었는데, 미안하다.”
나의 말에 태경이가 눈을 크게 떴다.
“뭔 개소리야? 나의 완벽한 얼굴이 왜 아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강남에 피부과 차리는 것은 물 건너갔다.”
“미션 성공했어?”
“그래. 그래서 저기 왕의 운검을 고쳤다.”
“‘시간을 돌린다는 것’은 유물을 상태를 좋게 만드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윤 교수님과 학생들이 모여 갑작스럽게 불어온 바람과 갑자기 깨끗해진 '대가야 왕의 운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경복이가 김빠진 얼굴로 말했다.
“우리집에 고장 난 데스크 톱이나 고쳐라. 10년간 모은 야구 동영상이 있다.”
나는 낮게 웃었다.
“이제 추억은 놓아줘. 그놈들은 최선을 다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한 번만 살려줘.”
“선수 이름 보내라. 쓸 만하면 생각해 볼게.”
“다들 ‘메이저리그’ 선수야.”
“꺼져. 내 취향 아니야.”
“개새끼.”
어느 정도 발굴이 마무리되었을 때. 기자회견이 진행되었다. 나는 앉기 싫었으나 기자들에 의해서 거의 강제로 앉혀졌다.
기자의 질문이 들어왔을 때, 대답하기 어려우면 나는 윤 교수님을 바라보았고. 그러면 교수님이 나 대신 청산유수로 답변을 했다.
솔직히 내가 가야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물어봐.
기자회견까지 끝나고 긴급 1차 발굴이 완료되었다.
이제 윤 교수님은 대규모 발굴팀을 이끌고 이 주변을 발굴하겠다 선언했고, 문화재청에서도 이곳을 '국가 중요 유물 보호지역'으로 지정한다고 했다.
그날 밤 고령 골프장 근처에 있는 숙소에 방을 잡았다.
너무도 피곤했기에 샤워하고 눕자마자, 아주 깊은 잠이 들 수 있었다.
꿀맛 같은 잠을 자고 있을 때, 찌이이이이잉~
귀걸이를 한 귀가 아프다는 느낌이 왔다.
귀걸이가 한 귀가 아프면 큰 재앙이 일어나는 증조인데···.
머릿속으로 좆 됐다는 생각과 함께,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눈조차 뜰 수 없었다.
꿈속.
나는 금관가야의 왕성에 사는 ‘왕성인’이였다.
능력 있기로 유명한 무역선 선장이기도 했다.
이곳 철소에서 생산한 고품질의 미늘쇠를 왜국에 팔기 위해서 어제부터 만만의 준비를 다 했다.
몇 번이나 확인하여, 완벽하다고 생각했으나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최근 괴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보름 전부터, 해변으로 ‘기이하게 생긴’ 죽은 물고기가 밀려오고, 바닷새들이 멀리 사라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는 바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거품이 솟구쳐 올라. 왕성은 한동안 악취에 고생해야 했다.
‘좋지 않은 증조.’
왕의 무당들이 굿을 했으나 신의 목소리는 없었다.
그저 바다 신이 노했다는 이야기만 했고 ‘공양’을 받치라는 말만 했다.
버러지 같은 놈들.
귀족들의 눈치를 보는 왕은 어떠한 결단도 내릴 수 없었다.
바로 그날 밤.
나는 끝내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나의 배, 해봉호로 나왔다.
나와 함께 왜국을 100번도 더 왕복한 배. 해적도, 폭풍도 함께 견뎌낸 튼튼한 놈이었다.
배에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었다.
!!!!!!!!!!!!!!!!!!!!!!!!!!!!!!!
천지를 흔드는 진동. 엄청난 지진이었다.
어!!어!!!어!!!!!!
보름달 아래 있던 ‘왕궁’이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수백 채의 집이 위아래로 흔들리다가 땅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이때 배가 갑자기 미친 듯이 요동쳤다. 바닷물이 빠르게 빠지며, 내 배도, 급류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먼바다로 밀려왔다.
썰물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바닷물이 빠져, 육지에서 보면 마치 바다가 사라진 것 같았다.
순간 귀가 찢어지는 소리.
먼바다에서 지옥의 귀신들이 한꺼번에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뒤를 돌았다.
내 눈에 보인 것은, ‘벽’이었다.
바닷물이 성벽보다 높은, 아니 산과 같은 높이로 우뚝 서서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뱃머리의 밧줄을 꽉 쥐고 있는 것밖에.
배가 해일에 휩쓸려 미친 듯이 앞으로 나갔다.
배 아래로 무너진 금관가야의 왕성이 보였다.
엄청난 파도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금관가야의 주산인 팔명산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공포에 휩싸여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배는 팔명산과 부딪치며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씨발 꿈!!!
욕 한마디 뱉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도 생생해서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귀걸이가 왜 금관가야 재앙의 날을 보여주었을까?
지금의 나에게 하는 경고는 아닐 것이다. 천년도 넘은 옛날의 일이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이 오지 않았고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오늘의 태양이 다시 떴다.
이번 발굴에 고생한 선후배들에게 과비로 천만 원을 기부하고, 20명에게 장학금도 주었다.
이래야 나중에 학교에 출석하지 않았는데, 점수를 많이 준다는 이야기가 없을 것이라고 교수님이 이야기했다.
이 정도 약은 꾸준히 쳐 놔야. 나중에 말이 없다.
뭔가 입에 넣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최근 발굴한 모든 유적을 내가 다 처음 발견했으니, 대학원생들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이제 조교도 나를 보면 머리를 숙였는데, 각종 발굴로 박사를 딸 수 있을 엄청난 논문 주제를 던져줬기 때문이었다.
뉴욕 크리스티 워렌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용기가 곧 출발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정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곧 비행기를 탈 것이니까. 초대한 사람이 누구인지 말씀해주세요.”
나의 심각한 목소리와 달리 워렌의 대답은 가벼웠다.
“전용기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전용기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고 했으니, 다시 한번 궁금증을 목구멍으로 집어삼켰다.
공중파 3사 정규 뉴스에서 대가야 왕릉이 발견되었다는 다는 뉴스가 계속 보도되었다. 그와 발맞춰서 백여 곳의 인터넷 뉴스도 함께 쏟아졌다.
멀리 BBC, 알자지라에서도 한 페이지가 나올 정도였다.
왕과 스파이 왕비가 한 무덤에서 나왔다는 것은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태경이는 다급하게 말했다.
“물 들어온다~ 지금 달려야 해!”
태경이는 골든보이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 혼자서 미친 듯이 편집하며 고생하고 있었다.
내일 전용기를 타야 하는데 시간을 맞추기 불가능해 보였다. 당연히 혼자 하면 힘들지.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나의 눈에는 모든 것이 가능한, 서울대 놈들이 잔뜩 있었다.
하루 일당 150만원. 동영상 편집 및 자막 작업. 알바를 모집. 지원자들이 폭주했다.
서울대 얘들은 목표를 주면, 잠도 자지 않고 달렸다.
게다가 인간들이 아니었다. 카메라로 찍은 내용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가, A 장면과 한참 떨어진 Z 장면을 기억하여 붙이는 놀라운 능력자들이었다.
그 많은 양의 필름을 어떻게 기억하고, 그런 방식으로 장면을 이어 붙일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방송국 PD는 전교 1등이 아닌, 전국 1등이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단 하루 만에 골든보이 콘텐츠가 완성되었다.
'대가야 왕과 신라 스파이의 슬픈 천년의 사랑.'
왕릉에서 나온 부장품도 대단했지만, 대가야 왕과 왕비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뉴저지에서 살다 왔다는 서울대 학생의 완벽한 영어 자막에 외국인들도 쏟아지듯 들어왔다.
댓글에 한글보다 외국어가 더 많았다.
나는 약속보다 넉넉하게 알바비를 지급했다.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는데 ‘돈’이 최고!
골든보이 콘텐츠까지 잘 마무리하자. 갑작스러운 야근을 잘 마무리하고 아침에 퇴근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경복이가 시계를 보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워렌이랑 약속한 시각이 얼마 안 남았다. 인천공항까지 멀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빨리 출발하자. 시간이 촉박하면 내 운전이 거칠어져.”
우리는 윤 교수님께 인사를 하고 급하게 현장을 빠져나왔다.
원래 집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가려고 했는데, 대전에서 큰 사고가 나서 몇 시간이나 시간을 낭비하였다.
“야! 집에 갈 시간 없겠다. 인천공항으로 가자.”
다행히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남기고 도착했다.
우리는 다급하게 워렌과 약속한 장소로 이동.
태경이가 조금 걱정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도. 설마 북한 가는 거 아니지?”
아직 정확한 목적지를 모른다.
“워렌이 어디 가는지를 나에게 안 알려줬어···.”
“좀 불안한데?”
“하지만, 최소 북한은 아니야. 워렌은 미국 사람이잖아. 미국 사람은 북한에 못 가. 그리고 정은이 형이 전용기 보낼 정도로 부자는 아니더라.”
이때 약속 장소에서 워렌이 서 있는 것을 확인했다.
“워렌 씨”
우리는 반갑게 워렌에게 다가갔다.
그는 예술을 다루는 뉴욕 크리스티 사람답게, 완벽한 뉴욕 패션으로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워렌은 발굴 현장에서 막 도착한 우리를 보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에드워드 씨. 평소와 모습이 너무도 다르군요.”
발굴 현장에서 바로 와서 너무도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현장에 있다가 바로 공항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행기를 타는데 따로 드레스 코드는 없지만···. ‘품격’이라는 것이 있어서 조금은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품격이요?”
워렌이 시계를 보면서 이야기했다.
“VIP 라운지로 가시지요. 일단 샤워부터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VIP 라운지에서 깨끗하게 샤워를 했다.
워렌과 함께 온 여성이 밖으로 나온 우리를 바라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제 이름은 ‘안나’입니다. 에드워드 씨의 ‘품격’을 올려드리는 데 도움을 주라는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나는 우리 패션을 확인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꼭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에드워드 씨. 당신의 품격을 위해서 얼마까지 지급할 용의가 있습니까?”
나는 블랙카드를 내밀었다.
“언 리미티드.(무제한)”
우리 셋은 워렌과 함께 온 안나의 손에 이끌려 면세점 ‘이곳저곳’을 끌려다녔다.
나는 주로 양복류로 이것저것을 몸에 걸쳤다. 뭔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세련된 미국 뉴요커 느낌. 돈 많고 세련된 상류층 사업가 코디였다. 한국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경복이는 노타이. 카디건, 머플러. 은퇴하여 사업체를 운영하는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 사업가의 모습이었다.
태경이는 소화하기 어렵다는 체크무늬 양복.
“돈을 좀 더 써도 되나요?”
“물론이죠. '언 리미티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명품점으로 넘어가서 체크무늬 양복에 어울리는 손가방, 구두, 알 없는 안경을 샀다.
오~ 공부 잘하는 애 같이 생겼다.
안나가 태경이를 보고 놀라며 말했다.
“아이비리그의 젊은 교수님 같네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렇죠? 아이비리그···.”
나는 머리를 돌려 경복이에게 물었다.
“아이비리그가 뭐야? 챔피언스 리그, 마스터 리그, 챌린지 리그. 뭐 그런 건가?”
경복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멍청한 놈아. 모를 때는 그냥 머리를 끄덕이며 웃어.”
아메리카 리그.
내셔널 리그.
아이비 리그······
내가 아는 ‘리그’는 그것뿐.
우리는 말끔해진 모습으로 인천공항의 제법 깊은 게이트로 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탑승객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제 보이는 전용기 게이트.
인천공항에서 거의 오픈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사람들 몇 명이 사진을 찍으며 구경하고 하고 있었다.
뭔데? 뭔데?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거대한 비행기.
사람들의 말로는 '아랍 에미리트 왕실 비행기'라고 했다.
이때 구경꾼 중, 눈에 띄는 ‘미인’이 우리를 보면서 아는 척을 했다.
아. 한때 우리 셋의 마음을 빼앗았던 그녀.
구모련······
“그 괴산 교회 오빠들은?”
태경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구모련?”
괴산의 새로운 개척교회가 생겼다. 우리는 교회에 개미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전학해 온 그녀의 미모에 이끌려 우리 셋은 뭐에 홀린 듯 모두 교회에 다녔다.
그때 그녀는 우리의 ‘신’이자 ‘구세주’였다.
“오빠들. 공항에는 무슨 일이야? 나는 남자 친구랑 ‘싱가포르’ 놀러 가기로 했어.”
“아 그래?”
남자 친구가 어깨에 힘을 주며 나타나 말했다.
“누구야?”
“아는 고향 오빠들.”
구모련의 눈길이 우리를 위아래로 바라보았다.
“오 좀 깔끔해졌네. 괴산 느낌은 전혀 없어.”
땡큐. 아나.
거지 같은 모습으로 만날 뻔했다.
이때 게이트에서 워렌과 기장이 그리고 승무원 10여 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에드워드 씨. 이번 비행을 맡은 캡틴 허쉬 번입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랍 에미리트 ‘만수르’ 왕자께서 에드워드 씨를 위해서 비행기를 보내셨습니다. 두바이까지 아무런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구모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가 그녀에게 말했다.
“혹시 아랍 쪽 안 가냐? 가는 길에 내려줄게.”
태경이도 한마디 했다.
“남자 친구가 가난해 보이는데, 이번 한 번만 일등석 전용기 태워 줄까? 언제 이런 거 타 보겠냐?”
경복이도 감정을 담아 한마디 했다.
“싱가포르라고 했나? 우리랑 가는 길이 좀 틀려서 같이 못 가겠다. 나중에 전화해. 시간 맞으면 돌아갈 때 태워 줄게.”
우리는 구모련에게 진한 비웃음을 남기고 뒤돌아서 전용기 게이트로 들어갔다.
남자 친구가 나를 알아보고 말했다.
“어? 골든보이 아니야?”
그러자 구모련이 말했다.
“골든보이가 누군데?”
나는 아랍 에미리트 왕실 전용 비행기에 올라탔다.
어디서 진한 석유 냄새가 났고, 나의 얼굴에 하나 가득 미소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