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불판 위에서 ‘한우’가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경복이가 ‘한우’를 푹 익혀 먹자, 태경이가 인상을 쓰며 한마디 했다.
“한우를 누가 그렇게 푹 익혀?”
경복이는 익은 고기를 먹으며 말했다.
“그냥 내 취향대로 먹자. 그것까지 네 허락 받아야 하냐?”
“푹 익히면 ‘한우’가 아니야.”
“익으면 왜 한우가 아닌데?”
태경이가 혀를 차며 말했다.
“푹 익으면 ‘미국산’이나 ‘호주산’이나 ‘한우’나 다 똑같아져.”
경복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익은 고기를 ‘와사비’에 살짝 찍어 먹었다.
태경이는 기겁을 하며 말했다.
“이단이다. 소고기를 와사비에 찍어 먹다니.”
“와사비에 찍으면 얼마나 뒷맛이 깔끔해지는데. 너도 한번 이렇게 먹어봐.”
태경이는 핏기가 보이는 한우를 소금만 살짝 찍어 먹었다.
“이렇게 한우의 ‘참맛’을 느껴야지.”
경복이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너는 참치 먹을 때, 김에 싸서 먹잖아.”
“김이 어때서?”
“한점 당 만 원씩 하는 부위를 김에 싸 먹을 때, 실장님이 얼마나 한심한 눈빛으로 보는 줄 알아?”
태경이는 당황하며 말했다.
“참치는 원래 김에다 먹는 거야.”
“참치 고급 부위는 간장에 살짝 찍어서 ‘참치 본연의 맛’을 느끼는 거야.”
“지가 언제부터 참치를 먹었다고 ‘훈장질’이야?”
“참치에 김은 ‘촌놈’이다”
둘이 소고기와 참치의 이단 논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빠른 속력으로 ‘한 점당 4천원’하는 1등급 한우 살치살을 빠르게 먹어 치웠다.
고기가 혀에서 녹는다는 것을 실제 느끼고 있었다.
불판에 고기가 모두 사라진 것을 보며 태경이가 분노했다.
“내가 ‘찜’해 놓은 것까지 먹으면 어떡해?”
나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이황의 소고기 ‘주기론’에 따르면 소고기가 눈에 보이니 ‘기’가 발해서 소고기가 먹고 싶은 것이고, 이이의 소고기 ‘주리론’에 따르면 소고기가 땡겼으니 ‘이’를 찾아 소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라 했어. ‘소고기 4단 7정’도 토론해봐.”
태경이와 경복이는 대답도 하지 않고 한우를 굽고 있었다.
이놈들은 역시 정답을 알고 있었다. 한점이라도 더 먹는 놈이 ‘승자’다.
펄벅이 다가와서 포도주잔을 건넸다.
“천사님. 건배할까요?”
펄벅이 나를 ‘천사’라 불러서. 회사 사람들에게는 ‘엔젤 투자자의 준말’이라고 했다.
“예. 펄벅 사장님.”
포도주로 가볍게 건배를 했을 때, 펄벅 사장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요?”
“뭔가가 떠올랐습니다.”
이제 뭐 새롭지도 않다. 나는 구석에 있는 어제 날짜 신문을 넘겨주자. 또 뭔가를 쭉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석 개발 이사가 그것을 보더니 낮게 웃었다.
“가끔씩 이럴 때가 있는데, 특히 사장님을 만나면 자주 이런 모습을 보이십니다.”
나는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연구는 펄벅 사장님에게 맡기고, 이사님이 조직을 관리해주세요. 한국말을 못 하는 펄벅 교수님이 연구와 인사까지 하는 것은 힘들어 보입니다.”
수석 개발 이사는 합병한 유버 케미칼 사장이었다.
조직 관리를 맡기기 가장 적합한 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인화 솔라의 대주주이니 믿을 수 있었다.
나의 법인카드를 수석 이사에게 주었다.
“직원들을 차별하면 안 됩니다. 생산직 직원들도 꼭 이곳에 데리고 와 ‘한우’를 사주세요.”
“마음이 깊으시군요.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회식 자리에 사장이 오래 있는 것은 좋지 않다.
대리기사를 불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엄마 몰래 북한에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뒤지는 것 아니겠지?”
경복이가 낮게 웃었다.
“고사포야 맞겠냐?”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101동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려고 할 때, 금발의 백인 3명이 다가왔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그중 한 명이 밝게 웃으며 나에게 걸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에드워드 씨. 뉴욕에서 뵙고 처음 보는군요.”
설마. 뉴욕 크리스티의 워렌? 그 사람이 우리 아파트에 와 있다고?
“크리스티의 워렌 씨?”
워렌은 돈 많은 사람들만 만나서 그런가? 행동이나 손짓 하나에 뭔가 품격이 있었다.
“다행히 얼굴은 기억하시는군요.”
우리 둘은 가볍게 악수했다.
“능력 있는 훌륭한 대리인의 얼굴을 잊을 수 있나요?”
“아무리 연락하려고 해도, 손이 닿지 않아서 한국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연락한 모양이구나.
“조금 연락하기 힘든 곳에 있었습니다.”
“북한에 계시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TV에서 김정은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실 겁니다.”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방북해야 했습니다. 연락이 안 된 것은 유감이군요.”
“아닙니다. 남북 정치 지도자의 신임을 얻고 계신 분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머리를 끄덕이고 부드러운 눈길로 워렌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기다린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 볼까요?”
아파트 지하 주차장은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적합한 곳은 아니었지만, 나를 어렵게 만났으므로 워렌은 바로 입을 열었다.
“'절규하는 현대의 황금인간'을 1억 달러에 ‘경매 없이’ 사려 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나요?”
“그럼요. 그렇게 큰돈 이야기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워렌은 농담과 진담을 부드럽게 섞어서 말했다.
“1억 달러를 기억하시는 분이,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아서, 제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랍습니다.”
나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동양에는 ‘선공후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국가의 일을 먼저하고 나중에 개인일을 하라는 사자성어지요. 서양인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하하. 이해하기 어렵군요. 하지만 선공후사라는 것을 머리에 넣고 생각해도, 받는 것에 비해서 북한은 리스크가 너무도 큰 곳이었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매우 '다이내믹'하게 살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씨의 최근 행보를 보면 '다이내믹'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군요. 그래도 사람에게는 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쉬는 시간’이라. 그냥 던진 말 같으나, 의미가 있게 들렸다.
“어디에서 쉬어야 할까요?”
“그분께서 ‘전용기’를 보내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나는 놀라며 말했다.
“전···전용기요? 그렇게 큰 호의를 보여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워렌은 상대를 공개할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언제 가실 수 있겠습니까?”
흠. 만수르 프로젝트를 위한 땅 구매만 끝나면 딱히 할 것은 없는데.
게다가 그 '1억 달러'로 강남에 빌딩 하나를 사기로 하지 않았나?
부동산 사이트에서 확인해 봤더니. 마음에 쏙 드는 신축 강남 한복판의 건물은 3,000억 정도 필요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끼이이이이익~~
지하 주차장으로 다급하게 들어오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곧 검은색 세단 3대가 도착하였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뭐. 뭐야?
워렌도 놀라서 두발 정도 뒤로 물러섰다.
내 뒤로 경복이와 태경이가 붙었고 선 대위와 수행과 사람들도 붙었다.
나는 와락 인상을 썼다.
감히 우리집까지 들어와? 오늘은 진짜 용서 없다.
한 타임 늦게, 중년의 여인이 세단에서 우아하게 내렸다.
“고모?”
고모는 나를 보더니 ‘적반하장’으로 버럭 화를 냈다.
“북한에는 왜 간 거야!! 그리고 간다면 이야기는 하고 가야 할 것 아니야?”
아~ 고모!! 놀랐잖아요.
“외교적인 일이라, 보안이 필수였습니다.”
고모 목소리에는 아직도 화가 담겨 있었다.
“한국에 들어왔는데, 전화는 왜 안 받아?”
엄마가 하도 잔소리를 해서 일단 전화를 꺼 놓았다.
“급하게 연락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고모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왜 몰라요. 오늘 상준이 형이 고모님이 뭐 하고 있는지, 친절하게 잘 설명해주고 갔는데.
“고모님께서 사모님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서 매우 바쁘게 활동한다고 들었습니다.”
엄마와 딸이 돈 때문에 싸우니 집안이 엉망이다.
고모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내가 미친 '할망구'를 한정치산자로 만들려고 했더니, 네 '큰아버지 새끼'가 주주총회를 강행한다고 한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모든 재산을 물려받고 ‘그룹 총회장’이 된다고 한다.”
나는 놀라 물었다.
“뭐라고요?”
“오늘 김상준이가 왔다 갔지? 그거 너를 기만 한 거야. 오늘 당장 주주총회가 있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미소를 지었다.
“큰아버지 생각보다 대단하신 분이군요. 정말 깜빡 속았습니다.”
“그 새끼 옛날부터, 뒤통수치는 일은 선수였다.”
“고모님. 주식 싸움으로 가면 지겠지요?”
“이미 준비해 놓은 싸움일 것이다.”
나는 정색한 얼굴로 고모를 바라보았다.
“고모님이 나를 찾아온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말이겠지요?”
“그놈이 우리를 벼랑으로 밀었다.”
“그렇다면 ‘피’를 봐도 상관없겠군요.”
고모가 은은한 눈빛으로 말했다.
“네가, 본사 보안과 절반을 날린 것을 알고 있다.”
“피를 흘리고 ‘청소’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고모도 쓴웃음을 지었다.
“비싸다는 변호사를 최대한 써봐야지···.”
나는 와락 인상을 썼다.
“고모님도 대책 없다는 말이군요.”
“몸 쓰는 놈들은 있지만, 너처럼 자연스럽게 병력을 주주총회장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네가 필요해.”
나는 눈에 살기를 주고 말했다.
“빈손으로 오지 않으셨겠죠? 저를 설득할 수 있는 ‘한 번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
고모는 변호사에게 종이를 받아서 나에게 내밀었다.
“부산과 분당 백화점 주식 각 10%를 주지.”
“장난질하지는 않았겠지요?”
“지금이 그럴 때가 아니야!”
나는 읽지도 않고 바로 사인했다.
사실. 고모가 사기를 쳐도 상관없다.
어렸을 때부터 쌓아온 ‘한과 분노’를 뿜어낼 수 있는 ‘무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제가 선봉에 설 겁니다. 양보할 수 없습니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불길이 있었다. 나의 감정을 속박하던 굴레가 깨져 날아갔다.
빠구는 없다. 직진뿐이었다.
고모가 머리를 끄덕였다.
“바로 뒤에 있겠다.”
“나중에 혼자 살겠다고 뒷감당을 모두 저에게 떠맡긴다면, 제가 고모님을 어찌 대할지 모르겠습니다.”
“청와대를 움직여서 할망구를 잡았다는 것을 알아. 그런데 내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것 같아?”
“파티는 언제입니까?”
“오늘 저녁 7시. 인천. 파라마운트 호텔”
경복이가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우리 전문 분야가 나온 건가? 술도 한잔하고 한우도 먹어서 컨디션 만빵이다.”
태경이도 자신 있게 웃었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못 해도, 부수고 깨는 것은 잘하지.”
나는 워렌에게 말했다.
“약속 시간은 다시 잡아야겠습니다.”
워렌의 표정은 아주 어두워졌다. 옆에 있는 사람 중 하나가 통역사인지 대충 내용을 아는 것 같았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심각한 일에 휘말린 것 같군요.”
“옛날부터 고대하고 꿈꿨던 일이었습니다. 죄송하지만,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인천 파라마운트 호텔.
오늘의 전쟁터다.
고모들의 경호원들이 세단 9대에서 우르르 내렸다.
나와 경복이, 태경이가 수행과 사람들과 함께 봉고차 몇 대 나눠 타고 거침없이 내렸다.
모든 사내들이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오늘만을 기다렸다.
선두에 서서 아주 큰 소리로 외쳤다.
“드가자~~~!!!”
우리는 무섭게 긴장하며 파라마운트 호텔에 들어갔다.
곧 보안과 사람들이 보였다.
보안과를 총동원한 듯 백 명도 넘는 인원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이상했다.
그들은 나와 고모님을 보기 무섭게 90도로 머리를 숙였다. 전혀 앞을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야. 이 반응은 뭐지?
더 들어가면, 갑자기 뒤를 막고 우리를 포위하여 죽이겠다는 계획인가?
하지만 보안과 사람들은 이미 겁에 질려 있었다. 나를 보고 겁먹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1층에 있는 그랜드 볼륨의 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무릎을 꿇고 있는 큰아버지의 모습이었다.
!!!!
그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완벽하게 차려입은 ‘회장님’이었다.
설마···. 할아버지?
할아버지 김산이 완벽한 모습 그대로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왔으면 와서 앉아.”
주주총회장에서 누구 하나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조용히 내 이름이 붙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이때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오늘 주총 내용이 뭐라고?”
30명에 가까운 이사와 간부들이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탁자를 있는 힘껏 내려치며 소리 질렀다.
“오늘 주총 주제가 뭐냐고!!!”
고모가 차가운 미소로 이사들의 얼굴을 쭉 살피며 말했다.
“단상에 크게 쓰여 있네요. 차기 신임 회장 선출입니다.”
할아버지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내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말이지···”
“이것은 회장님에 대한 모욕이자, 반역입니다.”
회장은 이사들과 사장단을 쭉 바라보며 한마디 던졌다.
“내가 코마 상태에 빠진 후에 ‘병문안’을 한 번이라도 온 사람은 그대로 일어나서 회사로 돌아가라. 무슨 일을 했든 용서하겠다.”
단 한 명도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이때 회장님의 부인이자 사모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50인지 TV에는 사모님의 얼굴이 보여지고 있었다. 영상통화를 연결한 것이었다.
“영감이 코마 상태에 빠졌으니, 아들이 회장에 오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로 당신 아들이에요!!”
회장은 그 말에 분노하였다.
“내가 죽지 않았는데? 아직 이렇게 살아 있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밀어내고 회장에 앉아?”
“황급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는, 다급한 일이 있었다고요!”
회장님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무슨 일? 사람을 태워 죽이려고 한 일? 그래서 정신병원에 갇힌 일?”
사모님은 절규했다.
“당신 아들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회장의 더 큰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그 아이도 내 핏줄이야!!! 바로 내 핏줄이라고!!!”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 아이에게 용서를 구했나? 아니겠지··· 당장 위급함을 벗어나려고 돈다발이나 흔들었겠지. 천박하게.”
사모님은 눈을 부릅떴다.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 모든 원흉은 그년이고. 그년의 핏줄입니다.”
“나와 결혼할 때는 참으로 대단한 법조 집안이었는데, 시대가 바뀌었어. 이제는 내 손짓에 꼬리를 흔드는 집안이 되었지.”
사모님은 눈을 부릅떴다.
“나를 모욕하는 겁니까?”
“사실을 말하는 것이야. 하지만 불쌍하게도 자네는 아직도 50년 전에 살고 있어. 그래도 함께 고생한 것이 있고, 내가 상처 준 것이 있으니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는데···. 너무 선을 넘었다.”
회장은 긴 한숨을 쉬었다.
“어찌 보면, 다 내 업보인가?”
좌중은 기침 소리는 물론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때 할아버지의 표정이 나를 향했다.
“우리 할멈과 악연이 깊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와 오랜 세월을 살았지. 감옥만은 피하게 해주고 싶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봐라.”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해 집중되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는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활짝 웃으면서 회장님을 보았다.
“그래도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뵙게 되니 기분이 좋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코가 닿을 거리까지 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놀라운 약은 잘 먹었다.”
미션으로 받은 ‘진생 심향환’. 생명을 연장해주는 약이라고 했다.
“효능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바로 정신이 들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숫자 1%가 보였고 점점 올라갔지. 100%가 되었을 때 비로서 눈을 뜨고 이렇게 움직일 수 있었다. 내 말이 믿어지나?”
저는 미션창도 보이고 그래요. 당연히 믿죠.
“그 숫자 저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한 것이냐?”
나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몸이 완쾌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잠시 생명이 연장된 것이지요.”
할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원장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몸 안에 암 덩어리가 그대로 있다고 했어.”
“잠깐의 기적이자 마법입니다.”
회장의 얼굴은 크게 어두워졌다.
“역시 그렇군. 얼마 동안 이 몸이 유지되겠느냐?”
“그것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 인생을 제대로 마무리하라는 하늘의 ‘계시’구나.”
나는 할아버지가 깨어난 것을 너무도 기뻐할 사람이 하나 떠올랐다. 바로 호주에 숨겨둔 제갈 집사였다.
그래서 바로 제갈 집사에게 전화했다.
‘제갈 집사’는 전화기만 잡고 있었는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오래된 친구분과 통화 해 보세요.”
회장님이 몇 마디 했고 제갈 집사의 울음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다시 쾌차하시다니···. 하늘이 무심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
“자네도 무탈한가? 크게 다쳤다고 들었어.”
“죽을 뻔했지만··· 막내 도련님이 도와주셔서 겨우 목숨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막내 도련님이라면. 성열이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예. 제게는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막내 도련님이라··· 재미있군.”
제갈 집사는 정색하고 말했다.
“회장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회장은 머리를 끄덕이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이사들을 쭉 둘러보고 말했다.
“나의 피가 흐른다고, 모두 앞에서 ‘공표’했다. 그것에 대해서 다시 말을 하는 놈이 있다면 입을 찢어 버릴 생각이야.”
“도련님을 욕하는 것은, 회장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호주에서 도련님을 조사해 보았는데, 정말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이런 표현을 쓰기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초인’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그놈의 능력은 진짜인가?”
조금 생각하던 제갈 집사가 말했다.
“회장님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할아버지는 이미 죽음에서 돌아온 ‘기적’을 경험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몸으로 느꼈지.”
“우리 인화 그룹의 새로운 기둥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회장님은 살짝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놈이··· 비자금을 욕심냈을 텐데.”
“저도 당연히 그럴 것으로 생각했는데···. 비자금은 할아버지 돈이라며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를 너무 찾지 않아, 호주에 버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기본은 된 모양이군.”
“그 나이에 그렇게 돈에 담백하기 어렵습니다.”
회장의 눈빛이 부회장 김도영을 향했다.
“사람이 ‘기본’을 하기 쉽지 않지.”
“한국으로 돌아가면 막내 도련님을 잘 살펴보고 싶습니다.”
“그래. 자네가 잘 지켜봐.”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매일 빵만 먹었더니, 입맛이 없군요.”
회장은 낮게 웃었다.
“자주 갔던 남원 추어탕 집이나 가세.”
“지금 제 입에 얼마나 침이 고였는지, 이야기해도 믿지 못하실 겁니다.”
제갈 집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나는 머리를 깊게 숙이고 말했다.
“오늘의 일은 모두 할아버지께 맡기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원한이 클 텐데··· 나의 말에 따라줘서 고맙다.”
“강해지면, 언제든지 복수 할 수 있습니다. 강해질 것입니다.”
“모두를 이길 수 있겠나?”
“왕좌는 하나뿐입니다.”
할아버지는 낮게 웃었다
“아직 왕이 살아 있다.”
“왕좌의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왕국을 잘 키울 자신이 있느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언젠가 왕국을 잡아먹을 겁니다. 그리고 왕국을 발판으로 ‘제국’을 만들 겁니다.”
할아버지가 크게 웃었다.
“사내라면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나는 머리를 깊숙이 숙이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큰아버지는 겨우 부회장직을 지켜냈고, 80%의 사장단이 교체되었다.
큰아버지는 손발이 잘린 ‘반신불수’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뭐라도 할아버지에게 뜯어내지, 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느냐고?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진정한 유산 분배의 시간이 올 것이다. 그때 가서 주시는 것을 받으면 된다.
그때까지 나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야지, 좀 더 큰 것을 받을 수 있었다. 삼킬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큰 것을 줘도 의미 없었다.
그리고 먹으려면 ‘큰 것’을 먹어야 한다.
말은 안 했지만, 주력 계열사 하나 정도는 삼켜야 하지 않겠나?
할아버지께 ‘인생을 마무리할 시간’을 선물로 드렸으니, 보상은 확실할 것으로 생각했다.
만수르 프로젝트를 할 예정이니. IH 석유화학 정도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IH 석유화학은 고모님이 손에 쥐고 있는 계열사이니, 큰아버지의 주력 계열사인 전자나 자동차를 빼앗아 고모에게 주고. 나는 고모님에게 IH 석유화학을 받는 방법을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이미 IH 석유화학 주식 3%를 가지고 있는 ‘대주주’지 않나?
서우 건설을 고모님께 넘기고 백화점과 IH 석유화학 주식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만수르 프로젝트로 ‘원유’를 얻고, IH 석유화학으로 원유 ‘정제’ 사업을 한다면 인화 그룹의 ‘새로운 강자’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천하 삼분 지계’.
‘대전략’은 이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