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화 >
"북진해야 합니다. 북진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우린 뭘 위해 싸운겁니까?"
이자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옆에 선 다른 장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위에선 3차대전으로 번지는걸 우려하고 있어."
"우리 빼고 누리는 평화가 무슨 의미가 있답니까."
"이미 다 결정된 일이야! 왜 나한테 지랄들이야? 일개 사단장이 무슨 힘이 있어서 이걸 뒤집어?"
강북이 쑥대밭이 됐다.
8개월만에 다시 한강을 넘어 휴전선에 다다랐지만, 그 위로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확전 금지라니.
"미국, 일본? 우리가 핵을 맞았을 때 뭘했습니까. 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해야합니다. 우리가 진격하면 6.25 때처럼 미군은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사단장이 버럭 소리쳤다.
그는 대머리에 흠뻑 배인 땀을 닦아냈다.
미국은 제코가 석자다. 안그래도 저쪽 여론은 전쟁 개입에 부정적인 마당이니 북진하는 순간 다시금 발을 뺄 것이다.
"용산이 딜을 받아들였어. 지금 우리가 북진하면 전후 복구 약속도 다 물거품이야."
모인 장교들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개전과 동시에 수백만 명이 죽고 다쳤다. 한국은 이러나저러나 재기불능이었다. 남은 것은 복수 뿐이다.
그러나 사단장의 설명은 달랐다.
"김정은이는 뒤졌고 위쪽에도 신정부가 들어섰으니 이만하면 합당하다고 생각했나봐."
합당?
그런건 직접 죽어나가지 않은 놈들이나 하는 소리다. 전범들을 배후에서 쑤셔서 전쟁을 일으킨게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은가. 그놈들의 꼭두각시인 신정부 따위를 인정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니까 다들 돌출 행동하지마. 특히 이 대령."
사단장은 이자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자원이만 남고 다 나가."
사단장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휴전식 전까지 교전은 최대한 회피하란 말 못들었나? 왜 계속 싸움박질 중이야? 그와중에 적군 포로는 하나도 없이 전사자만 있고?"
"휴전협정은 정식으로 조인될 때까지 유효한게 아닙니다.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지휘관으로서 내린 전략적 판단입니다."
"모든 것을 전쟁 이전으로 되돌린다는게 휴전 협정 골자야. 더이상 무익한 피는 흘리지 마."
"전쟁 이전이요?"
이미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이제 와서 전쟁 이전을 운운한다는 말인가. 누가 감히, 무슨 자격으로.
중국이? 미국이나 일본이? 러시아가? 아니면 전쟁 전부터 식물 노릇하던 한국 정부가?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겁니다. 무익한 피요? 휴전이야말로 지금까지 흘린 피를 무익하게 만들겠지요. 전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죽은 자들을 위해서라도!"
사단장은 이자원의 기세에 잠시 숨을 삼켰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번 일만 아니었으면 자네는 별을 달았겠지."
그는 서류 한장을 내밀었다.
"자네는 야전에는 잘 안맞는거 같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로의 보직 이동을 명하는 서류였다.
명백한 귀양이었다.
"내 동기가 여기 소장으로 있는데 한 몇년 있다 오는게 어때?"
한번 그리로 빠져나가면 다시 돌아올 자리는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 예편하라는 의미였다.
- 척
이자원이 천천히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았다.
사단장은 움찔했지만 이자원은 그를 쏠 생각은 없었다.
그는 권총을 사단장 앞에 탁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자원은 그가 모든 것을 바쳤던 군대를 사실상 떠났다.
그리고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몇년을 더 근무했다.
'전쟁 이전'의 상태로 복귀한 대한민국에는 실업자와 장애인이 넘쳐났다.
사회 불안과 빈곤율은 극에 달했다. 북한 신정부가 주지 않는 전쟁 배상금을 대신해, 적선하듯 주어지는 경제 원조만이 유일한 목숨줄이었다.
출산율은 끊임없이 바닥을 찍었다. 정권교체와 탄핵은 연례행사가 되었다. 정치인들은 6.25 전후에 그러했듯 이 나라가 다시 부흥하리라 외쳤지만 그들조차 그 거짓말을 믿지 않았다.
이자원은 정년을 채우지 않고 나왔다.
가족이 있었을 때라면, 전쟁 이전이라면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피곤했다.
모든 것이.
"산이나 오를까."
이자원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더이상 이 나라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몰랐다. 국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히틀러 지망생들은 많았지만 그들이라고 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세울 수는 없으리라.
미련은 없었다.
이자원은 천천히 산을 올랐다.
가족을 잃은 후로 실로 몇년만에, 처음으로 오르는 남한산이었다.
풍경은 쓸쓸했다. 예산 부족으로 관리하지 못한 나무들은 무슨 역병이라도 도는건지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황량한 산 속 약수터에 노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를 지나쳐가던 그때, 노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 역사를 바꾸고 싶지 않나?"
"······."
이자원은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뒤돌아보았다.
===
남자는 제법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릴 때야 형편이 썩 좋진 않았지만 머리는 영특해 육군강무학교에 입격했고, 연애를 통해 가정을 이뤘다. 이 나라에선 군인에게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 까닭에 자식 둘도 너끈히 건사할만했다. 진급도 남들보다 빨랐다.
이정도만 해도 썩 복받은 삶이라 할만했다.
그러나 그의 운은 끊이지 않았다.
군인 시절부터 쓰던 각종 전쟁사 교양서가 애호가(愛好家)들 사이에선 제법 인기를 얻었고, 입소문을 탄 덕에 여기저기 방송에도 잘 불려다니게 된 것이다. 마침 예능의 주요 흐름이 요리와 육아에 이어 역사 "썰" 쪽으로 옮겨가자 아예 고정 절목(節目, 프로그램) 여러 개를 맡아서 진행하는 중이었다.
요즘은 한창 불던 역사 유행도 사그라들고 하여 공중파와 종편을 포함해 대여섯개나 맡던 절목이 두 개로 줄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남자에겐 반가웠다.
그래서 예전부터 써보고자 마음먹고 있던 대한의 통사를 써보고자 했던 것인데 의외로 막막했다.
개별 전쟁사나 역사 일화들을 간추린 교양서 정도면 모를까 양도 방대하고 어디에 초점을 맞춰서 서술해야할지 감이 잘 안오는 것이다.
이럴때는 안되는 것 제쳐두고 그냥 머리나 식히러 가자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런 답답함 때문이었다.
아들은 좋아죽고, 딸은 귀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안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남자가 트렁크에 가득 실린 짐을 보며 아내에게 물었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준비를 많이 했어?"
산 중턱에는 식당도 많고 제법 번화한 거리가 있다. 백숙이나 한 그릇 먹고 오면 그만인데 뭐하러 그렇게 준비를 하는가.
"그래도 오랜만이잖아. 돗자리 깔아놓고 소풍 기분이나 내봐야지."
하기야 생각해보니 이곳저곳 강연이니 방송이니 불려다니면서 이렇게 가족들끼리 놀러나간지가 오래되었다. 돈이야 많이 벌었지만 중요한건 처자식과의 행복한 시간 아닌가.
남자는 내심 자신을 자책했다.
어느새 서울을 벗어나 성남으로 접어든 차가 산기슭으로 접어들었다. 도로는 굽이굽이 산길이었지만 버스도 잘 다니는 길이다. 운전 경력만 20년 넘는 남자가 이정도 주행을 하지 못할리가 없었다.
게다가 몇번이고 와본 길이었으니.
행궁 근처에 조성된 거리에 차를 대어놓은 남자가 가족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간만에 동장대나 올라가볼까?"
"에엑."
딸이 싫은 소리를 냈다. 제법 꾸미고 왔는데 등산을 하기는 싫다는 의사표현이었지만 남자는 모른 척했다.
"꼭 올라가야돼요?"
"그럼? 아빠가 옛날처럼 업고 갈까?"
어릴때 아내와 두 녀석을 안아들고 산을 오르던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는 딸내미도 귀엽고 말도 잘들었는데 요새는······.
"그건 더 싫어."
딸은 그렇게 말하더니 제가 앞장서서 올라갔다.
동장대로 가는 제3로는 녀석도 와봤던 길이니 익숙하게 접어든다.
한참 산길을 올라가자 드디어 성벽과 함께 훤히 트인 전경이 보였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여길 올라와서 성을 쌓았을까?"
남자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물었다.
맞은편에는 벌봉이 보였다. 벌봉에 보이는 거뭇한 작은 점은 아마 동장대를 바라보는 홍타이지의 동상이리라.
동장대는 그 옛날 이자원이 홍타이지를 저격한 장소다.
그 터무니없는 죽음과 그로 인해 몰아친 나비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덕분에 이곳은 상당히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있었다.
이곳 동장대에는 천자총통을 옆에 두고 환도를 들어 호령하는 이자원의 동상이 있다.
금줄까지 치고 접근을 금지해놓은 곳이었기에 남자는 그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민주화 이후 이씨 통령들에 대한 격하운동이 펼쳐지긴 했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완전히 덮어버릴 수는 없었다. 17세기의 조선, 나아가 동아(東亞)와 세계 전체의 운명을 바꿔버린 인물이었으니.
개인적으로도 그에게 끌림을 느끼는 이유는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릴때부터 이름이 같아 놀림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유명인과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모두 겪게 되는 일이다-이었으니.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 나라 대한에 수만 명은 되겠지만.
어쨌든 이름이 같다는 것 하나만으로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남자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머릿속에 박힌 것 때문에 그럴 것이다.
"빨리 와! 젊은 녀석들이 왜 그리 못올라와?"
"젊은게 아니고 어린거야, 아빠!"
얼굴이 시뻘게져서 올라온 아들이 바로 정정했다.
겨우겨우 올라온 가족들은 경치를 감상할 새도 없이 그늘에 앉아 쉬고, 멀쩡한 남자만이 식구들 운동 좀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동성을 둘러보았다.
과연 천혜의 요새라는 느낌이 들었다.
수백년 전, 이곳에서는 운명적인 싸움이 펼쳐졌으리라. 조선이 청을 꺾고 처음으로 비상했던 싸움이.
그야말로 대한의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었다.
감상에 젖어있을 때 뒤통수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그곳에는 노인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앉아있었다.
노인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빤히 꽂혔다.
남자도 노인을 마주 바라보았지만 노인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 어르신.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남자는 예의바르게 그리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그제야 정신이 든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아, 내가 알던 사람이랑 조금 닮아서 말일세."
남자는 쑥스럽게 웃었다.
나름 호중(好衆, 팬덤)이 형성되어 있는 몸인지라 어깨가 으쓱했다.
그는 노인을 향해 말했다.
"전상기(電像機, 텔레비전) 나오는 이자원 박사 말씀하시는거면 제가 맞습니다. 서명이라도 해드릴까요?"
"아니 됐네."
호의를 가득 담아 말했지만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닮은 사람이랑 착각한 것 뿐이야. 자네는 그 사람이 아닐세."
"아, 예."
남자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동안 제법 얼굴과 이름이 알려졌다고 연예인병에라도 걸린건가. 그는 잠시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노인의 눈은 남자에게로 향했다가 뒤편의 가족들을 훑고 지나갔다.
웃고 떠드는 모습.
누구보다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가족이다.
남자가 머쓱함에 근처를 둘러보는 척 이곳을 떠나려할 때, 노인이 물었다.
"행복한가?"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굳이 그런 것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남들이 그러하듯 즐거울 때는 즐겁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우울하며, 자식들이 속 썩이면 화가 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통틀어서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네."
남자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행복합니다."
노인의 입가에 알듯말듯한 웃음이 맺혔다.
남자도 쑥쓰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때 저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빨리 와!"
"애들이 배고프다고 이제 내려가자는데?"
잠시 대화라도 나누고 있자니 가족들이 성화였다.
"알겠어! 지금 갈게!"
가족들을 향해 외친 남자는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노인에게 가벼운 인사라도 건네기 위해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잠시 자신이 산신령이라도 만난 것일까 고민해보았다.
"책 좀 잘쓰게 해주십시오."
노인이 있던 곳을 향해 기도를 올린 이자원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 마지막화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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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
안녕하세요, 핏콩입니다.
첫작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을 완결하며 느낀 소회가 참 많습니다.
남한산성은 프로토타입 시절만 하더라도 이렇게 어두운 소설은 아니었습니다.
나름 주인공도 맹한 구석이 있고(대포 뽀록 터진걸 보고 놀란다거나···) 이름도 아예 이자원이 아니라 한태원이었지요.
하지만 나름 준비기간을 거치면서 여러 서사를 부여하다 보니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연재 초반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자원의 모티브는 모 작품의 대통령이 아닙니다. 그보다 오래된, 제 마음속 대체역사의 근본이 된 작품으로부터 따왔지요.
바로 초등학생 시절 도서관에서 봤던 신쥬신건국사의 손월입니다.
제목은 이렇지만 딱히 환빠는 아니었던 작품이지요.
아마 지금보면 고증이나 다른 쪽에서 거슬리는 부분이 많을테지만, 당시에는 대역이란 장르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던 제게 참으로 충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다니던 x산도서관에는 언제나 7권까지밖에 없었고, 8권을 신청해도 들어오는 일은 없었지요.
어른이 된 뒤에야 연재가 중단된 작품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매우 아쉬운 노릇이었지요.
생각해보면 그 결말에 대한 갈망이 본작을 쓰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손월 장군님 들리십니까? 당신을 위한 「진혼곡」입니다...)
되돌아보면 아쉬운 점이나 후회가 많습니다. 특정 파트의 전개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그러나 우리 삶은 대체역사와 달라 다시 뒤트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모든 후회는 가슴에 묻고 차기작에서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님들의 관심과 사랑 덕분에 작가로서 너무나 즐거운 경험을 했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독자님들 덕입니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핏콩 배상
< 후기 > 끝
ⓒ 핏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