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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211화 (211/213)

< 외전 - 그가 있던 곳 (1) >

새벽녘 관사 바깥은 온통 푸르스름했다.

육사 시절부터 항상 눈이 일찍 떠지기 버릇한 이자원 중령은 이 무렵이면 일어난다.

양치 도중 주인보다 늦게 울리는 알람을 터치 한번으로 가볍게 끈 후, 이자원은 빠르게 샤워와 면도를 마쳤다.

아내와 아이들은 아직 곤히 잠들어있었다. 이자원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맺혔다.

요즘 같은 시국에는 새벽별 보며 출근해 저녁별 보며 퇴근하는게 일상인지라 깨어있는 가족들을 본게 언제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관사를 나오니 정말 하늘에는 아직 별이 떠있었다.

애들 데리고 놀러나 더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이자원 중령은 부대 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워낙 빨리빨리 준비하는게 몸에 밴 터라 늦지야 않겠지만 기왕 나온거 늑장을 부릴 이유도 없다.

차를 타면야 몸은 편하겠지만 기름 한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굳이 새벽부터 운전병을 대어놓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이자원의 지론이었다.

석유 수입망도 출렁거리는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부대는 멀지 않았다.

===

"빨리빨리 뛰어라. 구보 중에 군가한다. 군가는 전우! 군가시작 하나 둘 셋 넷!"

"겨레의 늠름한 아들로 태어나!"

"조국~을 지키는~ 보람찬 길에서!!"

"으아으아!"

대대장이 직접 구보를 같이 뛰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대대장쯤되면 나이도 있을뿐더러 계급 짬이 있으니 놀고 먹기 바쁜 것이 현실. 장병들이 크게 반기는 것도 아니니 웬만한 열정맨이 아니고서야 드문 일이었다.

이자원이 솔선하여 구보를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뜀걸음 좀 없애달라는 병사들의 간곡한 청원 때문이었다. 새벽처럼 점호 받고 뛰어야하는 장병들 입장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시키지도 않을 수 없는 노릇.

대대장이 같이 뛴다고 병사들이 크게 개안하여 구보에 적극적으로 임할 일은 없겠으나, 최소한 대놓고 불평하는 일은 줄어들지 않겠는가.

"대대장보다 지치면 어떻게 하나!"

이자원의 호령에 병사들이 앓는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으로 20대가 40대보다 체력이 좋기는 하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의 경우이다. 대대장은 체력단련조차 허투로 하는 이가 아니었으니 파릇한 장병들이라고 당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고혈압과 당뇨, 각종 지병이 있는 인원들은 뜀걸음에서 제외했으나 나머지 인원도 피로한 얼굴을 하긴 마찬가지였다.

"대대장 존나 FM이야. 이 넓은 연병장을 칼같이 2바퀴를 돌리냐."

"그래도 사람은 좋잖습니까. 풀어줄 때는 풀어주고. 저번에 윤뱀 전역할땐 자차로 중국집도 데리고 가서 사줬다는데 말임다."

"하기사."

병사들이 헥헥대는 와중에도 조그맣게 숙덕거렸다.

주적은 간부라지만 저만한 간부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만 해도 낙후된 시설 탓에 대대는 시냇물을 받아쓰는 형편이었다. 겨울에 시냇물이 얼자 꼼짝없이 물 사용 통제가 내려질 판이었는데, 이자원이 직접 사단에서 급수차를 부르고 집수장의 얼음을 깨서 해결했다. 그때 시설 정비를 들어가서 지금은 거의 완료가 되었다.

그 뒤로 병사들은 이자원이 웬만큼 굴려도 원래 그런 사람이려니 하고 납득하는 편이었다.

뜀걸음을 마치고 들어오자 주임원사가 이자원에게 수건을 건넸다. 새벽공기는 찼지만 땀은 났다. 이자원은 적당히 목을 훔쳐냈다.

군대 짬밥만 30년을 먹은 하종구 원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매일 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대단하십니다."

"애들은 맨날 하는건데요. 주임원사님도 같이 뛰지 그러십니까?"

"아이고, 저는 늙어서······. 저번에 병원 다녀오고 나니 딸내미가 성화입니다."

하종구 원사가 너스레를 떨며 손을 저었다.

나름 강골로 소문난 사람이지만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가 없다. 나이가 드니 여기저기 안아픈 곳이 없는 것이다.

"그나마 군 생활 막바지에 고장나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고······ 이제 나가서 요양이나 해야할 팔자지요."

"주임원사님 성격 같으면 은퇴하고 심심하실텐데. 전역하고도 군대를 못잊어서 돌아오시는 것 아닙니까?"

"아이고, 이놈의 군대. 지긋지긋합니다."

은근히 농담을 건네는 이자원에게 주임원사가 너털웃음으로 답했다.

당직사령에게 보고를 받고 서류 몇개 확인하고 나자 벌써 9시였다. 매일 아침 이 시간에는 대대장실에서 참모와 중대장들이 모인 일일회의가 열린다.

"작전장교는 이번에 주기훈련계획 있지? 알맹이가 다 빠져있던데 다시 써서 제출해."

이자원의 말에 작전장교가 눈알을 굴렸다.

"뭐야? 왜?"

이 중령이 추궁하자 옆에 앉아있던 작전과장이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물었다.

"저번에도 계획 올린거 전부 반려되었지 않습니까? 있는 훈련도 다 취소되는 분위기인데 괜찮겠습니까? 최근에 안좋은 일도 있었고······."

작전과장의 말에 이자원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군인이 훈련을 안하면 나라는 누가 지키나? 상부에는 내가 얘기해볼테니까 빨리 작성해서 올려."

휘하 간부들이 머뭇거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 혼란스러운 정국에 자칫하다 찍힐까 두려운 것이다.

최근에 별이 수십개나 떨어졌으니까. 음모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상부에서 몸을 사리는 것도 이해는 갔지만, 대대급 훈련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건 문제였다.

"군인의 본분은 언제나 국방 수호야. 저쪽 동태가 심상치 않은만큼 풀어지지 말고, 우린 우리 일이나 잘하자고."

정치인에겐 정치인의 일이 있듯 군인에겐 군인의 일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해야할 훈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특히 미군까지 철수한 마당이니.

이자원은 잠시 탁상 위에 놓인 신문을 내려다보았다.

- 북한이 오늘 새벽 서해상에서 순항미사일을 2발 발사······

이미 한국인이라면 무감각해진 뉴스다. 이 땅에 사는 누구라도 '저놈들 또 지랄이네'하며 혀 한번 차고 지나갈만한 뉴스.

이자원 역시 그랬지만······ 그래도 할일은 해야했다.

회의가 끝나자 대대장실에 놓인 컴퓨터를 켜고 온나라에 접속한다.

갖가지 서류들이 자신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다. 무슨 결과 보고서, 무슨 계획안, 무슨 협조 공문. 꼼꼼하게 읽어보고 검토 후 사인을 끝마치고 나니 커피 한잔이 고팠다.

"······."

건너편을 슬쩍 쳐다보니 책에 코를 박다시피 열중해있는 CP병이 보였다. 이자원의 입에서 웃음이 나왔다.

남들 같으면 그래도 제 일 보면서도 대대장이 뭘 시킬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텐데, 이 녀석은 처음부터 그런게 없었다.

대대장이  뭘하거나 말거나 제 책만 파고 있는 것이다.

제대하기 전까지 저 녀석 사수를 맡던 당번병은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는데, 이 자식은 눈치가 없는건지 모르는 척하는건지.

"김신우."

이자원이 불렀지만 CP병은 대답이 없었다.

"김 일병!"

"일병 김신우!"

그제야 대대장 말이 귀에 박힌건지 화들짝 놀라 일어서는 녀석이다.

"편하냐?"

"아, 아닙니다!"

김신우는 바짝 긴장한 채 기립자세로 외쳤다.

약간 맹한 구석이 있는 놈이라 부대에 겉도는 것이 마음에 걸려 CP병으로 끌어온 케이스인데, 지나치게 편하게 지내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이자원이었다.

"뭐 공부하냐?"

들춰보니 CPA 기출문제집이다.

그래도 군대 오기전까지 공부는 곧잘 했다고 들었다. 집중력이 너무 좋아 탈인 케이스일까.

"제대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공부 너무 열심히 하는거 아니냐?"

"주, 주의하겠습니다."

김 일병은 그렇게 말했다.

"주의까지 할건 없고. 공부도 좋지만 주위 신경도 좀 쓰면서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이자원은 자기계발 좀 하라고 잔소리하는 대대장에 속했다. 기왕 18개월 몸담게 됐으니 헬스를 하든 토익이나 자격증 공부를 하든 금연을 도전해보든 뭐 하나 얻어나가서 그나마 군 생활이 무의미하진 않았다는 자부심이라도 가지라는 뜻이었다.

포상휴가도 적극 쥐여주고 연등 시간도 주고 해서 대대 내에 제법 면학 분위기가 형성되긴 했는데, 김 일병은 그 중에서도 좀 지나친 편이었다. 너무 지나쳐서 대대장 말도 잘 못알아들으니.

"할머니는 잘 계시냐?"

이자원이 묻자 김 일병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예. 저번 휴가 때 뵀는데 건강하십니다."

평소에는 어리버리한 놈이 이럴 때는 똘망똘망하고 말도 또박하다.

저번에 면담했을 때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조손가정에서 자랐다고 들었다.

저출산 탓에 팔다리 달린 남자라면 다 군대로 끌려오게 된지 오래다. 이정도 사연이야 이상한 것도 아니다.

할머니 부양해야할 놈이 군대에 왔으니 공부라도 해서 나가야하리라.

"······열심히 해라."

이자원은 믹스커피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는 종이컵에 입술을 갖다댔다. 씁쓸한 맛이 올라오는 것은 비단 커피 때문만이 아니니라.

이 나라는 자신에겐 보금자리를 주었지만, 누군가에겐 피할 수 없는 굴레를 걸었다.

마치 천형(天刑)과도 같은 벌이었다.

- 후두둑

딴생각을 하던 이자원은 전투복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다.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예의 신문지로 대충 닦아내자니, 김 일병이 입을 열었다.

"대대장님."

그의 시선은 이자원이 대충 말아쥔 1면에 꽂혀있었다.

북한의 대남 도발을 다룬 그 파트였다.

"전쟁······ 나겠습니까?"

"글쎄."

이자원이 중얼거렸다.

몇년 전 대만이 무너졌다. 공포에 미쳐버린 일본은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핵개발에 착수했다. 3차대전은 코 앞으로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일도 없었다.

일전에 나라가 온통 뒤집어졌을 때도 김정은이가 오판하는 것 아니냐고 다들 잔뜩 경계했지만, 매번 벌이는 대남 도발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용산이든 여의도든 모든 혼란상이 지나간 이제 와서 뭐가 터질리는 없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끓는 물에 담궈진 개구리처럼 위험의 수위는 점점 높아져가고 있는데도.

"설마 전쟁이야 나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자원 역시 그렇게 말했다.

냉정한 현실 파악이라기보단 희망사항에 가까웠다.

전쟁 따윈 날리가 없다.

전쟁이 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테니까.

이 나라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이자원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저 전역할 때까지는 안났으면 좋겠습니다."

김 일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자원은 역시 웃음으로 답했다.

"전역해도 예비군으로 와야돼, 인마."

연천에서 대대적인 포격전이 벌어진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

외출과 휴가는 전면 통제되었다.

북한의 수상한 동태가 신문지상을 뒤덮었다.

그의 부대는 전방이었으므로 긴장은 더했다.

이자원은 부대 근처에서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던 형을 만났다.

"밀항해라."

서론도 없이 그는 이자원에게 종이 쪼가리를 슥 밀어두었다. 별 특징없는 시외버스 표처럼 보였다. 그러나 QR코드 같은 것은 찍혀있지 않았다.

"오다가다 면식 생긴 놈이 인천에서 사람 배달을 해. 하룻밤에 아무도 모르게 스무명쯤 나고 든다. 그걸 타고 일본으로 건너와."

"······."

이자원은 표를 받아들고 침묵했다.

"전쟁이 나든 안나든 이리로 피신해서 나쁠건 없을거다. 내가 신분도 만들어주지."

둘 다 집을 나온 이래 변변히 소식을 주고 받진 않은 사이였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고민이 이어지다가, 이내 끊겼다.

"이건 아닌것 같다."

이자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병사들 휴가랑 외출도 다 금지 떨어졌다. 아버지 임종마저 못본 애도 있어. 나랑 내 가족들만 살자고 도망가면 걔네들은 뭐가 돼?"

"그딴게 중요하냐?"

형은 그렇게 되물었다.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꼬나문 그는 이내 표를 탁 빼앗아 일어났다.

"다음에는 또 언제 볼지 모르겠군."

이자원은 뒷모습을 보고 잠시 번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스렸다.

그는 옳은 일을 했다.

고민은 사라지고 자부심이 그 자리를 채웠다.

나랏밥 먹은 의리를 지켰다. 대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지켰다.

이자원은 대한민국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켰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정체성을.

< 외전 - 그가 있던 곳 (1)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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