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210화 (210/213)

< [후일담] 대한, 천명의 계승자 (6) >

1892년부터 이어진 유럽 대전은 공산주의 세력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무력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세계 부르주아 국가를 철폐하고 과도기적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를 수립한다'는 목표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달성된 것 같았다.

독일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퇴위하고 신성로마제국은 멸망했으며, 러시아만이 자유 세계의 방파제로 남았다. 차르 알렉산드르 3세는 이때 서울과 연경을 방문하여 대한의 지원을 애걸했다. 이는 나선왕의 입조라 하여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20)

20) 한편 러시아 내부에서도 타타르의 멍에를 다시 걸머졌다는 비판이 있었다.

영프가 먼저 공산화된데 이어, 독일과 스페인마저 공산당이 '내부로부터의 중상'에 의해 몰락하자 전세계에는 공포의 바람이 몰아닥쳤다.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쓴맛을 보았던 대한과 번국들은 철저한 반공 태세를 유지하였다. 공산화의 공포는 이전의 구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북미 식민지의 뉴욕으로 파천한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는 이전의 경쟁자였던 대한에게 '영국의 유일한 정통 정부'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 애썼다.

한편 영국은 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서 세계혁명을 위해 각국의 공산당을 일종의 지역당으로 삼아 내란과 폭동을 사주했다. 이것은 유럽을 넘어 전세계의 기존 정권에게 크나큰 위협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압제에 시달리는 식민지인들에게는 이만한 기회가 없었다.

대리국의 통치 하에 있던 안남에서는 응우옌 끼엔푹이 이끄는 공산당이 봉기했다.  무너져가고 있던 대리국은 이를 진압할 힘이 없었다. '꿍어·꿍안·꿍람(함께 산다, 함께 먹는다, 함께 일한다)'의 표어가 온 안남을 휩쓸었다.

주나라가 병합한 신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태평천국에 호응했던 이 지역 사람들은 주나라의 폭압적인 정치에 대대적으로 반발했다.

대한의 직접 지배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각지에서 민족자결을 외치는 봉기가 잇따랐고 군비 지출은 부담스러운 수준까지 몰렸다. 이것은 코 앞의 구주나 한민족이 인구구성 대다수를 차지하던 미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추원 내부에서도 사해가 동포인데 압제를 일삼는 도덕적 수준을 개탄하였다. 대한은 벵골만 쥔 채 인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과정을 지켜보아야했다.

대한 연방의 성립과 세계대전

유럽 전역이 불타는 것을 보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던 통령 박정양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지 못한 죄로 인해 몰락했다. 독일이 무너지자 고스란히 지원금은 부도수표로 바뀌었다. 동양에서 유럽으로 향하던 막대한 수요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끔찍한 불경기가 자유세계를 덮쳤다. 경제상황이 악화하자 내부적으로는 불온세력이 들끓었다. 서울의 대학가에는 보안사에 의해 체포된 대학생들이 수도 없었다.

오쿠보 도시미치가 이끄는 구주 의용군은 사방에서 공포행위를 벌였다. 공산주의자의 준동도 심상치 않았다.

통령 직선제도 실시된 마당에 그를 재선시켜줄 국민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 집권한 이상재 정권은 필연적으로 유화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구주 공화국은 세가지 방안을 가지고 투표할 수 있었다. 첫째는 대한의 자치령으로 독립, 둘째는 일본과 통일, 셋째는 완전한 독립이었다. 이 선거는 치밀한 여론 분석과 계산을 통해 치루어졌다. 일본이 이미 군대를 모으고 있으며, 제3안이 통과될 경우 즉각 침공할 것이란 소문이 온 구주에 퍼졌다.

구주는 대한 소속의 자치공화국으로 독립하는 방안을 택했다. 대한군 출신이자 수군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도고 헤이하치로가 구주공화국의 초대 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나성공화국 역시 이즈음 독립하였다.

초기 대한 연방은 구주와 나성을 산하에 두기 위한 체제였으므로, 한글을 표기법으로 채택하고 한민족이 주요 구성원으로 자리해야한다는 암묵적인 규약이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탈피한 나라들이 이후 대거 가맹하며 후자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다.

이시기 대한민국은 그 지도자의 명칭을 대통령으로 바꾸었다. 새로 성립된 공화국들의 행정수반들은 통령으로 불렸는데, 연방의 수장으로서 격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회맹에 가맹한 번국들 역시 연방에의 가입이 논의되었으나 왕정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 여전히 연경 황실의 신하로서 대한을 상국으로 섬기므로 필요성이 적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 불발되었다. 대한은 제국과 연방의 이중적인 체제를 통해 세계 각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팽창은 더이상 좌시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유럽은 거대한 철의 장막 너머에서 경쟁자의 체제를 뒤집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서른살의 젊은 중추원 의원 이승만은 충량한 번국인 벵골왕국을 수호하고 인도양에서의 패권을 되찾기 위해 개입할 것을 주장했다.

인도에서는 수천년간의 질서가 무너졌다. 봉건주의의 잔재를 숙청한다는 명목으로 브라만 계급이 홍위병들에게 구타와 조리돌림을 당했다. 사방에서 '반동'을 심판한다는 대의 아래 역사적인 신상을 파괴행위가 자행되었다.

이런 변화에 두려움을 느낀 것은 상위 계급만이 아니었다. 삶의 근간이 흔들리는 듯한 신성모독과 체제 격변에 여기저기서 반발이 터져나왔다.

대한이 개입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1904년 허위(許蔿)가 이끄는 원정군이 벵골을 넘어 델리로 진격했다.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 파편화된 채로 주둔해있던 인도군은 각개격파당했다. 델리를 '해방'했으나 그것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세계사회주의연방21)은 제국주의에 대한 성전을 선포했다. 오랜 경쟁자였던 대한과 영국은 다시 한번 충돌했다. 이 이념의 성전에는 국경이 없었다. 대한의 번국들과 연방 가맹국들이 참전하고, 유련에서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을 돕기 위해 파병했다.

21) 그러나 그 권역은 서유럽과 중부유럽 일대에 불과했으므로 유련으로 불린다.

대서양에서는 공산영국과 자유영국22)이 일대 수전을 벌였다. 나성공화국이 운하를 건너 여기에 참전했다.

22) 북미로 망명한 작센코부르트고타 왕조와 그 정부를 일컬음

유련은 저 대(大)보나파르트도 하지 못한 일, 러시아 원정을 계획했다. 러시아야말로 유럽 내에 존재하는 제국주의의 첨병으로서 동토 철도를 통해 언제든 연방으로 밀고 들어올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은 유련과 연대했다. 일본은 실로 천년만에 대권을 다시 거머쥔 천황이 다스리는 전제군주제 국가였으나 각자의 사정이 그들을 동맹의 길로 이끌었다. 천황의 명을 받은 대본영 육군 총장 노기 마레스케는 구주를 침공했다. 통령 도고 헤이하치로는 대경하여 연방정부에 원군의 파병을 요청했다.

세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은 7년을 끌었다. 온 천하가 두쪽으로 나뉘어 싸운 전쟁의 결말은 런던이 함락되고 유련 서기장인 알버트 잉크핀이 자살하며 조지 5세가 복위하는 것으로 끝났다.

유련은 초기부터 삐그덕거렸다. 정체성이 다른 국가들을 지휘하여 연합군을 구성한 것은 양측이 같았으나, 오히려 정치적으로 완전한 통합과 단일대오를 추구하려던 움직임은 민족주의적인 반발 역시 불러왔다.

동아보다 부족한 생산력과 인구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강대국으로서 회맹과 연방을 통솔하던 대한과 달리 영국은 유련 내부에서도 경쟁자가 존재하였다.

전쟁 이후 대한은 초강대국으로서 완전히 패권을 장악했다. 중서 지역에는 대한의 번국들이 들어섰다. 그간 중구난방이던 도량형과 국제표준은 대한을 기준으로 맞추어졌다. 23)

23) 기년법만큼은 달랐다. 그 편리성과 보편성으로 인하여 오래전부터 내부적으로 써오던 서기가 공표되었다. 개국년법, 단기, 연호 등의 표기법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세계대전으로 대한은 완전히 경쟁자를 꺾고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패권은 이때에 확립된 것이다.

한편 세계대전의 참혹한 실태는 인권 의식의 상승을 불러왔고, 전쟁으로 인한 내부적 단결은 국민국가를 탄생시켰다. 전쟁에 참여한 각국 국민들의 정치적 권리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번국 왕조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왕실의 권력을 하나둘 내려놓았다.

대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상재가 무려 4선을 역임한 이후 대통령의 연임은 2선으로 제한되었다. 24)

24) 9~10대 대통령을 지낸 박상희가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사위인 김종필을 내세워 정권을 연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때의 개헌 탓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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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글을 써내려가던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로했다. 눈두덩을 문질러가며 잠을 쫓고 있자니 전산기(電算機, 컴퓨터)에 써진 글자가 들어왔다.

대한의 역사-말 그대로 '대한'이란 나라의 역사-에 대해 통사(通史) 형식으로 정리해 교양서나 내보겠다고 마음먹은지는 오래되었지만, 막상 쓰다보니 너무 중구난방인 것 같았다.

"어디보자······ 적당히 쳐낼 부분은 쳐내고······ 중간중간 세계사 중심으로 서술된 부분은 내용에 맞지가 않으니 국내에 끼친 영향으로 바꿔야겠군."

창 밖으로 어슴푸레하게 동이 터왔다. 벌써 밤을 샌 것이다.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이 남자의 성격이었다.

마누라는 그런 자신을 보고 불평을 늘어놓기는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와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던 남자의 눈에 이름 하나가 띄었다.

이자원.

동아의 천명을 쥐고도 다른 길을 택한 남자.

그의 치세는 일견 이해하기 힘들었다.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황제가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생전에 어떤 민주적 신념을 위해 통령 체제를 세운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뒤로 백년 넘게 세습제가 이어졌으니.

그나마 비슷한 것이라면 일본의 막부정일까. 하지만 막부와도 결이 달랐다.

조선에서 태어나 평생을 조선에서 자랐을 사람이 그동안 동아에서 수천년 이어져온 길을 따르지 않고 다른 길을 택했다.

이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요소였다.

학계에서도 나름의 해석이 분분하지만 남자는 무엇 하나 마음속으로 납득할만한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이자원은 1682년 사망했다. 향년 71세였다. 이후 그의 아들인 이안세가 중추원에서 통령으로 선출되었고, 20년 넘게 집권하며 나라를 안정시켰다.

번국의 반항을 조기에 억눌렀으며 참정권을 확대하고-어디까지나 식자층에 한해서지만-선대에 깊게 이루어지던 정경유착도 끊어냈다. 본격적으로 해양시대를 연 것도 그의 시대에서였다.

이자원의 의지는 아들을 거쳐 대대로 전해져내려갔다. 통령이었던 이인경이 나름대로 국민의 요구에 따른-물론 정말로 순순히 따르진 않았다 당시의 중추원 직선제는 치열한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것도 그때부터 내려온 어떤 유조를 참고한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모든 제국들이 그러했듯 내부에서 파국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대한은 그렇게 연착륙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초강대국이 되었고, 지금도 세계의 패권을 움켜쥔 채로 각지의 분쟁에 개입하고 있다.

여전히 어딘가에서는 분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 나라만큼은 평안하다. 누구도 대한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 않으니.

만약 전란의 시대에 대한이 승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저 지구 반대편에서 총질을 하고 있는 나라들 꼴이 되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남자는 피식 웃었다.

설마하니 그렇게까지야 되었겠나.

< [후일담] 대한, 천명의 계승자 (6)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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