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일담] 대한, 천명의 계승자 (5) >
공산주의의 태동과 태평천국의 난
1863년 찰스 막스(Charles Marx)가 영국 서기장의 자리에 오른 것과 비슷한 시기, 동양에서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막스가 서기장에 오르기 전 주장한 것과 달리16), 동양 최초의, 아니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는 다른 어느 곳보다 낙후된 농촌에서 일어났다.
16) 막스는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달한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우선적으로 촉발될 것이라 보았다. 실제로 영국은 대한보다 30년 가량 늦긴 했지만 산업화를 이룩한 유럽의 선두주자였다.
산업혁명 후 대한의 역량이 상공업에 집중되는 동안 중원 번국들은 대한의 쌀창고 역할을 해야만 했다. 대한은 번국들의 상국이자 얼마든지 군사적 역량을 투사할 수 있는 강대국이었으므로 표면상으론 공정 무역이 이루어졌지만 실상 번국 지주들을 매개로 한 수탈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강남 해안지대의 국가들은 그 부와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차츰 공업화를 이루어갔지만 내륙의 초와 촉, 대리 등과 북방의 주나라에서는 여전히 농업 중심의 낙후된 산업체제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주나라에선 지주들이 국가의 방곡령을 무시하고 쌀 수출을 일삼자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1841). 대경한 주 조정은 장군 마신이(馬新貽)를 보내 토벌했지만 이것은 악화되는 사정을 도외시한 임시방편이었을 뿐이다.
임금은 백성으로써 하늘을 삼고, 백성은 먹을 것으로써 하늘을 삼는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
민생을 지키지 못한 번국들은 곧 대가를 치뤄야 했다.
홍수전(洪秀全)은 고향인 조나라에서 노동조합의 설립을 시도했다가17) 옥살이를 한 인물이다.
17) 수십년 전 미주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도 광산조합을 토대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는 옥에서 반고가 지은 한서(漢書) 왕망전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망이 시행한 정전법(井田法)은 사적인 토지 매매를 금지하고 공동 소유와 공동 경작을 요체로 하는 것으로서, 홍수전은 이를 두고 "백성의 근본은 농업이니 이것이야말로 백성을 주인 삼는 법"이라 평했다.
홍수전은 옥에서 나온 뒤 조나라의 유화책에 돌아선 노동자들에게 실망해 대리의 광서로 옮겼는데, 이곳에서 그는 농민 중심의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였다. 극심히 빈한한 농촌의 사정과 풍운산(馮雲山)의 탁월한 선전 선동 실력에 힘입어 순식간에 1만 3천 명에 달하는 동조자가 모여들었다.
1850년 7월 소작농 3천여 명이 수출을 위해 주강(珠江) 일대에 조성된 쌀창고로 달려가 불을 질렀다. 그들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선포하고 주석으로 홍수전을 추대했다.
대리 왕실은 급히 군대를 풀어 진압하려 했으나 농민 봉기는 객가와 장족을 구분치 않고 광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일부 기록에서는 이미 이때에 홍수전은 수십만을 이끌었던 정황이 관측된다. 더하여 양수청이 이끄는 일단의 태평천국군이 진압군을 패퇴시켰다. 이제는 광서의 중심인 계림(桂林)까지 위험한 지경이었다.
대리국은 끝내 수백년간 발동되지 않았던 회맹군의 파병을 요청했다. 번국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인접한 조군과 초군이 출동한 것을 시작으로 줄줄이 각국의 진압군이 대리 경내로 진입했다.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인해 태평천국은 존속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몰렸다. 상주(象州)에서 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데다 근거지인 계평(桂平)에서도 일곱 차례나 패배한 홍수전은 피난을 결정했다.
각 병사가 은자 5냥과 쌀 한 되만 지닌 채로 홍수전은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장정(大長征)을 개시했다.
대장정
이미 귀주로 향하는 길목에는 초나라 장군 좌종당(左宗棠)이 포위망을 펼쳐놓고 있었으나 태평천국군은 책사 나대강(羅大綱)의 책략에 따라 화력을 집중한 덕에 간신히 돌파할 수 있었다.
태평천국군은 수많은 사상자와 낙오자를 감수하고 귀주의 밀림을 지나쳤다. 각지의 마을들은 중앙 조정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초공에 나선 진압군에 비협조적이었지만 딱히 태평천국에게도 협력을 베풀지는 않았다.
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 귀주 북부 준의(遵義)에 다다른 홍수전은 양수청과 소조귀, 풍운산 등의 간부들과 의논하여 서북으로 향할 것을 결의했다(준의 회의).
촉 환왕 손가경은 태평천국군이 사천으로 진입하자 대경하였다. 회맹군은 촉 측의 별다른 반대없이 태평천국군을 추격할 수 있었다. 회맹군의 추격을 받은 태평천국군은 대도하에서 잠시 시간을 지체했다. 대도하는 폭이 약 1리에 달하는 큰 강으로 이곳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다리인 노정교(瀘定橋)는 촉군의 방해로 끊어진지 오래였다.
여기에서 명장 석달개의 용맹이 발휘되었다. 석달개가 300명을 이끌고 목숨을 걸고 회맹군을 저지하는 사이 태평천국군이 뼈대만 남은 노정교에 나무판을 깔아 복구하였다.
태평천국군은 여러 차례의 위기를 겪으며 사천을 빠져나가 섬서의 보안(保安)에 도달했다. 홍수전은 이곳을 임시 수도로 삼고 혁명의 끝없는 전진을 약속했다. 이후 도읍을 연안(延安)으로 옮겼으며 1864년 진압될 때까지 13년 동안 섬서와 신강 일대에서 항전하며 공산주의의 불꽃을 태웠다.
대한의 대응
주나라는 혜종 오세번 시절 낙양으로 천도했던 탓에18) 섬서에 들어앉은 공산당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사방에 태평천국의 손길이 뻗쳤다.
18) 태조 오양을 유폐하고 왕위에 오른 오삼계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감행된 일이었다.
심지어 낙양의 국자감(國子監)에서도 공공연히 태평천국과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유인물들이 뿌려질 정도였다. 지식인 계층마저 낙후되고 부패한 주나라에 질려있었다.
다시 한번 마신이가 파견되었지만 농촌으로 숨어들어 유격전을 펼치는 태평천국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마신이는 "옛 유적 이자성을 보는 것 같다. 섬서는 온통 공산 비적의 땅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주 왕실은 천도까지 감행해가며 벗어나기 위해 애써왔던 대한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은 크림 전쟁의 영웅인 육군 부장 신관호(申觀浩)와 2만 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진압을 도왔다. 신관호는 단순히 비적을 토벌하여 죽여 없앤다는 개념보다는 공산주의가 자라날 토양을 갈아엎는 방식을 주장했다.
유명무실하던 방곡령이 부활하고 지주들에 대한 토지개혁이 약속되었다.19) 항복하는 자는 죄를 묻지 않되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면 즉각적으로 총살당해 적의 근거지 인근에 던져두었다.
19) 물론 지켜지지는 않았다.
농촌 깊숙한 곳까지 뻗어있던 태평천국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어 1864년이 되면 수도인 연안 한 곳 밖에 남지 않았다. 홍수전은 대한군의 유화책을 가리켜 이렇게 한탄했다.
"저 나라는 해로운 나라다!"
결과적으로 주나라가 자체 모순의 개혁에 나서지 않으며 대한의 유화책은 기만전술이나 다름없게 되었으니 홍수전은 일견 그것을 예언한 것일지도 모른다.
8월 대한군은 최후의 보루인 연안을 함락했다. '해방구'가 하나씩 줄어드는 광경을 보며 아편과 여색에 탐닉했던 홍수전은 마지막까지 향락을 누린 뒤 자살했다.
10년 넘게 이어진 태평천국 운동은 그 활동 범위가 대리, 촉, 주 등 몇몇 번국에 한정되었지만, 태평천국을 긍정하거나 그에 동조하려는 움직임은 사방에서 일어났다.
대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산업화의 모순은 유럽이나 중원 번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한은 그 선두주자였던만큼 오래전부터 문제를 겪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성산 이씨 통령 체제에서는 여기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한의 산업을 주도하는 상단들은 중추원을 통해 제대로 된 노동권의 확립을 저지했다.
그러나 중추원 직선제가 도입되고나자 그간 도외시되었던 사회적 불만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인경 사후 들어선 박규수 정권은 이러한 요구들부터 해결해야했다.
1862년 진주의 소년공이 장애를 얻고도 변변한 보상금조차 받지 못한 채 해고되어 죽자 몰락양반 출신 노동자 백낙신과 홍병원 등의 주도로 창고를 불태우고 내상 사주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임술노동항쟁).
통령 박규수는 기마포졸들을 동원해 이를 진압 및 해산하였지만 세를 넓혀가는 태평천국을 보고 강경 일변도로 나설 수는 없음을 깨달았다.
주나라의 위기는 대한에도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임술노동항쟁 이후 설치된 민정이정청(民政釐整廳)은 실태를 면밀히 조사하여 통령부에 일단의 해결책을 보고하였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근대적 사회복지 보고서인 민정이정절목(民政釐整節目)이다. 민정이정절목은 궁핍, 질병, 무지, 불결, 나태를 사회의 오악(五惡)으로 명명하여 이것을 제도적으로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통령부는 이것을 중추원에 제출하였고 공산당의 기세를 본 중추원이 이를 채택함으로써 노동자의 연금이나 건강 및 의료보험 제도 등의 사회보장제도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후로 홍경래의 난 이후 금지되었던 노동자의 단결 및 교섭권이 일부 회복되었고, 노동운동은 19세기 내내 계속되었지만 태평천국과 같은 공산혁명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대경쟁과 그 후예
한편 대한은 영국과 19세기부터 대경쟁(大競爭, The Great Game)이라 불리는 전략적 경쟁을 벌였다.
19세기 대한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북류대하 이동을 모두 점령하고, 러시아를 번국으로 삼았으며20), 남쪽으로는 보르네오(현 보르네오 공화국)와 말레이(현 말레이 공화국)21)를 병탄하였고, 벵골로의 침투 역시 가속화되었다.
20) 여기에는 논란이 있다. 이 시기 대한은 러시아를 확고한 번국으로 규정하였지만, 정기적인 조공 사절이 오고 가지는 않았으며 러시아 내부에서는 이를 상하 관계가 있는 동맹 정도로 인식하였다. 명나라에 조공한 적이 있는 국가들을 모두 명의 번국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21) 말레이 반도 중 사성(獅城, 싱가포르)은 대한령으로 남았다.
인도 내전을 시작으로 하여 세계를 놓고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었다. 미주에서는 영국 장군 앤드루 잭슨이 중부로 확장책을 펼쳤고, 대한은 여기에서도 영국과 충돌했다.
한편 대한의 '번국' 러시아는 지중해 진출을 향한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이즈음 개통된 동토 철도를 타고 대한에서 수많은 물자와 병력들이 도달했다.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막대한 병력과 자금을 지원했지만 러시아는 신승을 거뒀다. 무너진 자존심과 유럽을 휩쓴 황화론에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사회 전복 현상까지 일어났다. 프랑스는 파탄난 재정을 안고 몰락했다. 염세적 분위기가 양국을 지배했다.
전설적인 프랑스의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大보나파르트)의 조카인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小보나파르트)는 의회에 나가 공공연히 왕정을 비난했다. 명맥만 남아있던 부르봉 왕조는 이때에 이르러 무너졌다.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는 강력한 경쟁자의 존재로 말미암아 대개 실패로 점철되었다. 사회의 모순을 국가적 영광으로 가릴 수 없게 된 영국에서는 공산 혁명이 발발했다. 신생 공산 영국 정부는 대한에게 잠시 유화적 입장을 취했지만 국민감정과 더불어 태평천국 토벌 소식이 알려지며 대경쟁은 냉전으로 진화하였다.
대한은 세계의 절반을 반공(反公)의 대오 아래 끌어들였고, 영국은 국내를 추스리며 공산주의라는 마약을 서서히 퍼뜨려나가기 시작했다.
대한과 영국의 패권을 다투던 대경쟁은 이제 이념의 전쟁으로 진화하였고, 이것은 이내 한 차례의 세계대전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 [후일담] 대한, 천명의 계승자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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