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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208화 (208/213)

< [후일담] 대한, 천명의 계승자 (4) >

대한의 동정부터 따지면 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진 전란은 양국에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전쟁은 에도 막부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사회의 보수성을 강화했으며 영토의 상실로 인해 개항지마저 잃게 만들었다.

천천히 패배를 복기하고 대한군의 전력을 연구할 틈도 없이 십자군이 몰아쳤다.

반기독교 정서가 온 일본을 지배했다. 나고야로 피난했던 일부 서양인마저 추방당했다.

일본인들은 대한, 더하여 구주에 대한 증오에 몸서리쳤다. 대한은 신주를 침범한 외구로, 구주는 그 외구의 앞잡이로 인식되었다. 경신대기근으로 인한 조선인의 유입, 중원에서 추방된 가톨릭 교도들의 유입이 그러한 인식을 견고화시켰다. 금의 침략을 받은 남송이 그러했듯, 문화적·사상적으로 국난을 극복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헤이안 시대에 이어 다시 한번 일본 사회에 국풍(國風)의 시기가 찾아왔다.

총대장 아마쿠사 시로는 대한군을 따라 많은 싸움에 종군하였고 동양십자군의 전반기를 이끈 군웅이었다. 그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켰으나, 십자군에 참여한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흔히 미화되는 것과 달리 십자군의 방종은 아마쿠사 시로의 생전부터 일어나고 있던 일이었다.

구주의 요청을 받아 종군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용병대는 수백년 전 끝난 십자군이 동양에서 일어난 것에 경탄했으나, 동시에 각지에서 일어난 전쟁범죄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강압에 못이겨 개종한 얼치기 기독교인들이 신의 이름으로 적을 강간하고 살육하고 불지른-그러나 정작 '진정한' 기독교인인 그들도 저질렀던-사례가 서양인의 기록에 무수히 남았다.

그럴수록 동방의 이 기독교 국가는 자신이 정복하고자 했던 일본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심지어 구주인 자신들도 외세에 의해 강제로 심어진 이러한 이질성과 폭력성을 증오했다. 후일 사쓰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막부의 부름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자 "드디어 도이(島夷)의 땅에서 벗어나 신주로 돌아간다"는 감상을 남겼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상실한 영토는 되돌려받기 힘든 것이었다. 계묘화약이 맺어지기까지  에도 막부는 고작 두 차례에 걸쳐 구주를 공격했고 모두 실패했다. 쇼군들은 군사를 일으킬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막부에 상당한 재정 부담을 남기고 떠난 도쿠가와 츠나요시나 재위 4년만에 사망한 도쿠가와 이에노부, 8세로 요절한 도쿠가와 이에츠구의 치세가 30년 동안 이어졌다.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대에 이르러 전국시대의 상무적 기풍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이미 시기가 늦은 뒤였다. 직접 십자군의 침입을 받는 주고쿠 일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칼 대신 책에 더욱 익숙해져있었다.

실로 대한이 일본의 한팔을 꺾어두려면 이보다 적절한 때가 없었던 것이다.

구주의 확보는 왜란의 복수나 경쟁자의 제거 말고도 대한에 여러가지 이점을 제공했다. 이것은 안정적인 남방 항로 확보와 실질적 국토의 증대를 의미했고, 동정 과정에서 군사전통을 보존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어진 경신대기근에서 대한 백성의 피난처를 제공했다.

반면 잃어버린 것도 있었다. 당시 대한이 지출한 군비부담은 은 50만 냥에 달했다. 중원 번국들이 납부하던 세폐를 따져보면 충당가능한 금액이었지만 계속된 기근에도 구주에 군대를 유지해야만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비판이 가해졌다.

"수길 공이 본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히 할 만한 술법이 없으면서 한갓 쓸데없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이웃 나라를 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군량과 무기를 천릿길에 운수하여 우리의 생령을 못살게 하였다"는 격조선론의 교훈은 관점에 따라 대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대한은 구주를 완전히 영토화하는데에도 실패하였다. 텐메이 대기근을 틈타 일어난 9차 십자군은 6개월 간의 전투 끝에 나가토를 공파하였다. 대경한 에도 막부가 필사적인 토벌에 더해 협상에 나서며 계묘화약이 체결되었지만 이것이 구주의 대한 할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자이후 막부는 조선인이 섭관이나 관령을 맡으며 실권을 장악했고, 그 직할령에선 대한의 군정이 실시되었지만 실상 이러한 통치에는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일본과의 신주통일론(神州統一論)이 횡행하였고, 한편에선 뿌리내린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가톨릭 문화와 더불어 구주인만의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근대 들어 이것은 내전까지 촉발하였고, 1919년 대한 연방과 함께 구주공화국이 성립되기까지 수많은 진통을 겪는 원인이 되었다.

아이누 전쟁

백년에 걸쳐 일어난 동양십자군과 달리 그 기간이 짧았으며, 역사의 중심부에서 멀었기에 그리 주목받진 못하지만 북쪽에서도 대한의 침공이 이루어졌다. 1669년 아이누(亞夷累) 시베차리의 족장 샤쿠샤인이 일본의 마츠마에번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자 대한은 적극적으로 이를 지원했다.

막부는 구주를 견제하는데 여념이 없었음에도 마츠마에 야스히로를 지휘관으로 하여 이를 토벌케 하였다.

건국공신 거이커르 소소쿠의 차남이며, 연해주 주둔군 참령을 맡고 있던 뇨혼이 아이누를 지원하기 위해 북해도로 건너갔다.

동만주의 기병이 마츠마에 야스히로와 막부의 토벌군을 휩쓸었다.

1670년이 되면 대한과 아이누 연합군은 도남 12관(道南十二館) 중 10관을 함락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이백년 전 코샤마인의 봉기 이후 최대의 성과였다.

그러나 곧 조선에 든 대기근으로 대한의 지원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일본은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정작 막부는 구주 공략에 정신이 팔려있었으나, 북해도에선 고작 11살에 불과한 번주 마츠마에 노리히로(松前矩広)가 친정하는 강수까지 펼쳐졌다.

샤쿠샤인은 뇨혼의 권고에 따라 정면대결을 회피했다.

대한과 일본 양국 간의 관심사에서 벗어나있던 북해도는 그 뒤 7년간이나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끝내 1677년 시베차리 뿐만 아니라 아이누 대부분을 석권한 샤쿠샤인은 도남 12관을 모두 함락하고 마츠마에 가의 거성인 후쿠야마 성 공략에 나섰다. 대한에서 건너온 포병이 공성을 도왔다. 마츠마에 야스히로는 전사하고 번주 노리히로는 히로사키로 도망쳤다. 북해도는 오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후 아이누는 유구와 같이 통령부 산하의 아문에 의해 다스려졌다가13) 1884년 행정통합령으로 자치권을 잃고 대한의 한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

13) 민심을 고려해 아문의 수장인 사무(事務)는 현지인으로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유구아문의 사무를 맡았던 채온(蔡溫, 사이온)이 대표적이다.

미주 개척

1670년과 1671년의 대흉년, 즉 경신대기근은 대한에 심각한 타격을 안겼다.

다변화된 쌀 수입 경로와 충실한 정부재정에도 불구하고 각지에서 아사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만주와 연운, 대만, 구주 등으로 인구를 유출시킬 수 없었다면 그 구제책마저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수십년 동안 적극적으로 사민 정책을 펼쳐왔던 대한은 이 대기근으로 인하여 그 필요성을 더욱 실감하였다. 당국의 관점에서 대한의 중심지인 조선은 기후적으로 너무나 취약한 지역이었다.

마침 항해술과 지리학의 발전이 눈부시게 이루어지고 있던 대한은 신대륙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서양 각국들은 앞다퉈 이 신천지에 진출하였으나 태평양과 인접한 서부 지역은 미답지나 다름없었다.

진시황 시절 서복(徐福)이 불로초를 찾으러 갔다가 정착했다는 비옥하고 넓은 땅에 대한 소문이 온 대한을 휩쓸었다.

기력있고 담대한 자들은 잦은 흉년에 시달리는 조선땅을 떠나 배에 몸을 실었다. 1680년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바다를 건너 미주(美州) 서부에 도달했다. 장희재(張希載)14)가 이끄는 1차 선단은 상륙지에 나성(羅城)을 쌓아 거점으로 삼았다.

14) 중추원 의장을 지낸 장현의 당조카로, 당시에도 촉망받던 무관이었다.

이후 미주토인의 복속과 계속된 인구유입으로 1800년 대한령 미주의 인구는 백만 명에 달하였다. 거산대령(巨山大嶺, 로키 산맥) 이서가 모두 대한의 영토로 복속되었다. 이후 대한령 미주는 홍경래의 난, 영국 식민지와의 전쟁(중부대평원 분쟁)을 거쳐 나성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산업혁명

대한의 성세는 외부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계속되었다. 대한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그러한 내치의 정점이라 할만했다.

수학자 최석정(崔錫鼎)이 그리스와 송나라의 문헌을 참고해 기초적인 설계를 고안한 이래, 증기기관의 제작과 개량은 국시로 지정되었다. 1675년 통령 이자원은 이렇게 유시했다.

"우리나라는 세종조부터 수차(水車)의 쓸모를 알고 여러 차례 설치와 관개를 시도하였으나 천문과 지리에 맞지 않아 번번히 폐하였다. 그러나 증기기관은 석탄만 때면 시기와 땅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사람의 힘은 우마를 당하지 못하고 우마의 힘은 장차 기관을 당하지 못할 것이니 앞으로 온나라가 이것의 개량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바로 몇년전 참흉한 기근을 당한 대한에 있어 증기기관이 제공하는 동력은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였다. 인구의 대대적인 유출과 감소로 인한 인건비 상승은 기술혁신을 강요했다.

통령부의 지원과 민간에서의 요구는 세계 최초로 상용화된 증기기관의 발명을 이끌었다.

1735년 동래 출신 무인 최천약(崔天若)은 통령부에서 제공한 기록15)을 참고하여 착통(搾筒, 실린더)과 따로 연결된 응축기에서 증기를 압축시키고 나들개(피스톤)를 증기압력으로 움직이는 방식을 고안했다.

15) 일설에는 이자원이 남긴 기록이라 한다.

이로써 종래에는 1마력을 내는데 약 7관(22.5kg)이나 들었던 석탄이 단 1근만으로 같은 동력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천창(天創, 최천약의 호)식 증기기관은 광산에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증기선에도 장착되는 등 본격적인 산업용 기관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최초로 증기기관을 발명한 대한은 그 기술우위와 산업발전을 통하여 더욱 압도적인 패권을 휘두르게 되었다.

세습통령제의 몰락, 민권의 시대

17세기의 통령은 자신이 임명하는 중추원의 선출을 통하여 그 집권에 정당성을 부여하였으며, 나아가 임기없는 종신 통령직을 영위하였다. 나아가 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집안이 이 자리를 독점했다.

이자원과 이안세를 거쳐 성산 이씨 일문은 군부와 중추원을 양손에 쥐고 사실상의 군주로 군림했다.

그러나 확대되고 있던 민권 사상은 이러한 세습통령제를 더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박지원은 통령을 학식도 없으면서 마을의 호장 노릇을 하려는 이선생에 빗댄「오얏선생전」을 써 우회적으로 꼬집었으며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이러한 실태를 비판하였다.

특히 정약용은 같은 책에서 일부 가문과 이익세력의 천거로 이루어지는 중추원을 개혁하고 백성들의 선거를 통해 중추원을 구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25세 이상의 남성에게는 모두 투표권을 주어 통령에게 '천거'할 사람을 뽑고, 통령은 범죄나 도덕적 결격 사유가 없는 한 반드시 이를 수용하라는 골자의 내용이었다.

통령부는 오얏선생전과 경세유표를 모두 금서로 지정했지만 오히려 이것이 더 퍼져나가는 결과를 낳았다. 천안 삼거리에서 시작된 중추원 제도 개혁 운동은 한달도 되지 않아 서울로 번졌다. 강무학교 생도들은 수업을 거부했다.

1819년 통령 이인경은 강경 진압을 포기하고 요구를 수용했다.

그해 6월 대한 전역에서 투표가 실시되었고 새로 구성된 중추원에서 이인경은 재신임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통령직을 유지했지만 그것을 세습하지는 못했다.

진정한 의미의 대한민국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 [후일담] 대한, 천명의 계승자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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