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207화 (207/213)

< [후일담] 대한, 천명의 계승자 (3) >

이 시기 여러 차례의 외정이 이루어졌지만, 실상 대한이 기울인 국력과 관심에 있어서는 사쓰마 정벌과 이어진 동양 십자군보다 크게 벌어진 전쟁은 없다.

나선정벌이나 오이라트 원정, 그리고 대서국 정복은 어디까지나 각 번국이나 현지 부족의 협력 아래 비교적 소규모로 이루어졌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대한이 일으킨 병력만 해도 10만이 넘어간, 실로 대규모 원정이었다.

이러한 원정이 단순히 막부의 도발과 예기치 못한 충돌로 이루어졌다는 기존의 사관은 상당히 궁색한 변명일 것이다.

사쓰마를 정벌한 박철균의 원정군은 번주를 참하고 나서도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물러나지 않았다. 보급은 본국과 유구에 의존했다. 일본의 영토를 노릴 마음이 없다는 주장은 이 시점에 이르러 거짓으로 드러난 셈이었다.

막부는 신주(神州) 66주의 보호자로서 이러한 '침략'을 늦었지만 단호히 물리칠 의무가 있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徳川家綱)는 그 품성이 너그럽고 인자하였으나 조치만큼은 강력했다. 통령부에 서신을 보내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으로 시마바라의 난을 진압할 때 그러했듯, 전국의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한편 전운은 구주 뿐 아니라 대한에서도 감돌았다. '감히 천자의 번국을 취하고도 이를 숨겼던' 일본에 대한 성토와, 왜란의 복수를 강조하는 움직임이 잇따랐다.

여기에 막부 측의 국서가 도착하자 끓는 기름에 불이 붙듯 열기가 타올랐다.

세간에 알려진 국서의 내용은 대강 이러했으니 '홀란도는 일본의 속국인데 함부로 통교하다니 괘씸하다, 서토 임금은 즉각 군대를 물리고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실제 국서는 이것보다 온건한 내용이었으나 조보에는 이러한 내용이 실리지 않았다.

왜란 당시 피해가 극심했던 영남에서는 통령부를 향해 만인소가 올라왔다.

「······선조대왕조에 왜란을 당하여 우리 종사가 절단이 날뻔하였고, 천지의 신명에 힘입어 겨우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끌려간 사람과 입은 치욕은 이루 말할 수도 없고, 영남에는 아직까지 그 일을 이야기하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통곡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천하사방을 정벌하여 당당한 중국(中國)이 되었는데 오로지 좁은 굴혈에 기댄 왜적들만이 복배하지 않고 있습니다.

통령께서 영단을 내리시어 삼군을 몰아 섬으로 건너가고, 여러 나라에서 그러하였듯 옛 왕조의 후손에게 왕권을 회복하여주고 계절존망(繼絶存亡)의 도를 세우신다면 어찌 저 왜적들인들 공손히 머리를 숙이지 않겠습니까?」

내상 출신의 일부 중추원 의원만큼은 원정을 극렬 반대하였으나, '사소한' 투쟁은 통령부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결국 1658년 8월의 국무회의에서 일본 침공이 결정되었다.

통령부는 일본이 조선을 삼키지 못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전장을 과도하게 확대하지 않고, 우월한 수군력으로 일본 본토의 지원을 차단하며, 점령지를 재빨리 안정화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한 이자원은 우연히 미리 동원되어있던 삼남의 군대를 원정군으로 편성하였다.

동월 27일 대마도는 순식간에 함몰되었다.

대마도주 소 요시자네(宗義真)는 가독을 상속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제도를 정비하고 은광을 개발하며 토지를 개간하는데 의욕적으로 앞장섰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이 빛을 보기도 전에 그는 조선군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왜란에 앞장선 조상의 죄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 독립적 역사를 영위해온 대마도는 이제 경상도의 일개 현으로 전락했다.

대마도를 점령한 조선군은 하카타를 향해 파죽지세로 나아갔다.

대양선(大洋船, 갈레온)과 판옥선을 합쳐 4백여 척에 달하는 대함대가 하카타 만에 입성했다. 치쿠젠 다이묘 쿠로다 미츠유키(黒田光之)는 막부의 지원군이 이르지 않은 상황에서 용맹히 맞서싸웠으나 패주했다.

조선군 본대는 안정적으로 상륙했다.

신풍(神風)은 불지 않았다.

아마쿠사 시로가 이끄는 한갈래 키리시탄군은 나가사키의 시마바라로 향했다. 난 이후 이곳은 막부의 직할령으로 전락했다.

아마쿠사 시로는 땅에 입을 맞춘 후 말했다.

"우리는 약속의 땅에 다시 돌아왔다."

박철균이 이끄는 사쓰마 원정군 본대는 하카타의 대한군에 보조를 맞추어 북상했다. 코쿠라의 오가사와라 타다자네(小笠原忠真)는 카츠야마 성에서 석달 넘게 항전하며 막부의 지원군을 기다렸다.

막부의 중신이자 쇼군의 숙부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가 이끄는 12만 군대가 일촉즉발의 위기에 빠진 큐슈를 구하기 위해 칸몬 해협(関門海峡)에 집결했다.

수군참모부 총장으로서 직접 종군한 노장(老將) 강진흔이 해협을 가로막았다. 일대 해전이 벌어졌다.

훗날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는 이 싸움의 경과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예로부터 조선은 수군을 장기로 삼고 일본은 육군을 장기로 삼았다. 병법은 이길 수 있는 곳에서 싸우는 것이다. 외구(外寇)가 침입하여 한시가 급한 때에 국서를 보내어 시기를 잃은 것은 크나큰 실책이다. 칸몬 한 싸움에서 수백척 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신주가 자랑하던 무사들은 한 사람도 큐슈에 발을 대지 못하였다······."

미리 원정을 계획하고 있던 대한의 상황, 그리고 케이안의 변 등 쇼군 집권 초기에 정국 불안이 잇따라 소집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일본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러한 평가는 상당히 박한 것이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가 한탄한 것처럼 막부의 원정군은 일부 병력을 제외하면 도해에 실패하였으며, 이것은 구주의 상실을 불러왔다.

동정(東征)의 종결, 십자군의 시작

허무하리만큼 구주가 함몰된 원인으로는 주로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문치 정책이 꼽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래의 상무적 기풍이 그의 치세에 이르러 약화되고, 사무라이들이 칼보다는 붓을 드는 상황이 되었기에 송나라처럼 문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오랫동안 상황에서 일본이 군사 전통을 간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쇄국책과 더불어 네덜란드의 무역 중심이 대한으로 이동한 사건 역시 새로운 군사적 혁신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구주가 함몰됨으로 인하여, 다시 그 위에 십자군이 개시됨으로 인하여 일본은 새로운 전란의 시대에 빠져들었다.

아마쿠사 시로는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한 후 조선으로 넘어와 장군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시로는 단순히 대한군의 일개 번장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었다. 종교적 신념을 위해 몇번이나 목숨을 걸었던 그의 무용담은 온 동아(東亞)에서 그를 대체불가능한 가톨릭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부젠 점령 후 동정이 종결되자 대한이 그 뒤로 대군을 주둔시키는 일은 없었다.

전쟁 중에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니 계절존망이니 하는 명분을 내세워 막부를 흔들던 대한군이지만 구주를 확실히 장악하자 더이상의 진격은 의미없다고 판단하였다. 9)

9) 여전히 대한 수군이 머물며 기나이(畿內) 일대에 포격을 가하기도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위협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아마쿠사 시로만큼은 교토로 진격하여 일본 전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뽐내었다.

장기백(長崎伯)으로서 다이묘와 같은 지위에 오른 그는 대한과 번국들을 돌며 십자군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신생 국가로서 내부의 불만 세력을 해소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을 뿐더러, 대한을 등에 업은 예수회가 세를 뻗치고 있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던 번국들은 여기에 적극 협력했다. 10)

10) 명대엔 북경 인근에서만 이루어졌던 포교는 대한 건국 이후 위로는 막북, 아래로는 형주의 시골까지 이루어졌다. 일부 사제들은 공신의 반열에까지 올랐으므로 번국들은 제재할 방도가 없었다.

그 협력이라는 것은 국내의 가톨릭 교도들을-혹은 정적들을-모조리 구주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종교적 열의에서든, 아니면 자국의 탄압에 의해서든 수많은 사람들이 구주로 향했다. 이 숫자는 연간 수만 명에 달하였다. 11)

11) 주나라에서 1685년 예수회를 우회적으로 겨냥한 사교금령을 내렸을 때는 기록상 무려 10만 명이나 되는 가톨릭 신도가 유입되었다고 한다.

한편 대한 측의 지원도 이어졌다.

대한의 구주 지배는 무척이나 불안한 것으로서, 명목상 아시카가의 후손을 받들어 다자이후에 막부를 차리고 항복한 구주의 다이묘들에게 후백(侯伯) 같은 작위를 내려 충성을 받는 대신 자치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점차로 이들을 개역(改易)할 마음을 품고 있던 통령부는 아마쿠사 시로가 일으킨 십자군을 그 포석으로 삼았다.

다이묘들은 일견 무모해보이는 이 십자군 전쟁에 강제로 협력해야만 했다.

주고쿠 일대는 그 뒤 백년 동안 전쟁터로 화했다.

십자군의 경과와 결말

1658년부터 1783년까지 백년 넘게 이어진 동양십자군은 직접 일본의 침공을 받아 격퇴해낸 3차(1672~1674)와 4차(1728) 십자군을 제외하면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1662년 2만 명을 이끌고 조슈를 침공한 이래 아마쿠사 시로는 제갈량의 육출기산에 빗대 육출풍전(六出豊前)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수많은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화력이나 병력을 앞세워 단숨에 구주를 쳐부순 대한군과 달리 십자군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구주, 혹은 해외의 지원자들에게만 기댄 것이었다.

불의의 일격을 허용한 막부는 주고쿠 일대에 축성을 허용했고 다이묘들은 제 영지를 지키기 위해 끝없는 요새화와 군비 증강에 매진했다. 훗날 이들이 막부를 타도한 것은 이러한 역량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1680년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쇼군의 자리에 오르자 다시 한번 십자군의 열기가 끓어올랐다. 주고쿠 대신 시코쿠를 통한 교토 진공이 화두로 떠올랐다.

1687년 아마쿠사 시로는 그의 인생 최후의 십자군을 일으켰다. 7만에 달하는 십자군이 오이타를 떠나 시코쿠 남부 사다미사키 반도(佐田岬半島)에 상륙했다.

이번 전쟁에서 십자군은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관문에서의 도발로 인해 시코쿠 진공을 예상치 못했던 막부가 당황한 사이 십자군은 북상해 도사 다이묘 야마우치 도요마사(山内豊昌)를 패퇴시켰다. 시코쿠는 무주공산이었다.

그러나 기나이의 병력들이 토쿠시마 번을 통해 시코쿠로 진입하자 전선은 지지부진해졌다. 아마쿠사 시로의 독선적인 종교재판과 개종 강요로 인해 점령지에서도 잇키가 잇따랐다.

결국 3년에 걸친 시코쿠 전쟁은 월나라 왕자 안탕군(雁蕩君) 정극장(鄭克藏)의 무용담만을 남기고 끝났다.

한편, 이 싸움에 종군한 조선인 출신 병사 손처경은 귀환치 않고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는 스스로 예수의 아들이라 칭하며 이제는 역으로 탄압받게 된 키리시탄들을 이끌었다. 끝내 그는 토벌당했지만 사이비 교주의 이름만은 남겼다.

시코쿠 진공이 실패한 뒤 십자군은 오랫동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철군한 아마쿠사 시로는 구순의 나이까지 십자군과 교토 점령을 외쳤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이후 구주의 주도권을 이끌게 된 사람은 사제의 몸으로 다자이후 막부의 실권을 맡은 이원 안드레아였다. 12)

12) 봉림대군 이호의 아들로, 유럽에는 '현명왕' 등으로 소개되었지만 엄연히 그는 폐서인된 평민이었다.

이원의 집권으로 이후 구주는 내정을 다지는데 전력했다.

한편 에도 막부 측에서의 구주 공격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경신대기근의 와중 구주를 침공한 막부군은 제해권 장악에 실패한 채로 축전(筑前) 공략을 시도하다 십자군의 역습을 당했다.

대한은 많은 육군을 두지는 않았으나 대함대를 두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막부는 번번이 쓴맛을 봐야했다.

이러한 대치 상황은 텐메이 대기근(1782~1788)을 틈타 일어난 제9차 십자군으로 1783년 계묘화약(癸卯和約)이 맺어지기까지 계속되었다.

< [후일담] 대한, 천명의 계승자 (3) > 끝

ⓒ 핏콩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