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일담] 대한, 천명의 계승자 (2) >
직접 북벌에 나섰던 조선군과 달리 한양 조정은 명나라로의 요동 반환에 합의했다. 이것은 상국의 열토를 취할 수 없다는 사대 의식과, 내부적 상황으로 인해 명의 요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이 빚어낸 결과였다.
조정과 북벌군 간 인식 차이, 조선과 명의 이해 관계 등이 첨예하게 얽혀들어간 가운데 요동 반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파견된 칙사가 살해되었다(1642). 실로 우발적 사건이었지만 조명 관계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4)
4) 대한 건국 후 칙사 살해 건은 명나라의 자작극으로 규정되었으나 당시 명은 조선 조정과의 합의가 이루어진 상황이었으므로 동기가 불명확하다. 현재까지 이 사건의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어진 송산 전투에서 홍승주·조대수·오양 등이 이끄는 14만 명군이 이자원의 5만 조선군에게 참패했다.
지휘관들은 죽음 대신 항복을 선택했다. 명나라의 변경을 지탱하던 장수들이 순절치 않고 항복한 사건은 명나라 조야에 다대한 충격을 주었다.
숭정제가 이자원을 광해군의 아들로 규정, 고명과 인신을 내린 것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는 하나의 책략이었으나 이것은 명나라의 수명을 오히려 단축시켰을 뿐이다.
이호의 난을 진압하고 조선의 권력을 틀어쥔 이자원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침공했다.
천하제일관문인 산해관은 조선군에게 철저히 유린당했으며 총병 황득공은 순절했다.
이자원은 북경을 점령한 뒤 태자 주자랑-역시나 정체에 논란이 있었던-을 명 말제(末帝)로 옹립하고 태사의 자리에 올랐다.
그 뒤로도 몇년간 형식상 명나라는 유지되었으나, 이것은 신질서를 세우기 위한 과도정부에 불과했다.
대한, 민국(民國)의 성립
명(明)나라가 멸망하고 한(韓)나라가 들어선 사건은 명목상으론 선양을 통한 왕조 교체로서, 역사적으로 숱하게 있어왔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실질에 있어서는 역사의 한 발전 단계를 이룩했다 할만했다.
대한의 모든 국사는 주씨로부터 선양받은 이씨 황실이 아니라 통령이 결정하고 재가했다.
이것은 얼핏 조선초 정도전이 주장했던 재상총재제의 구현으로 보이고, 이자원이 내세웠던 논리도 그러했다.
그러나 총재론과 달리 대한의 통령제 하에선 "왕이 정치적으로 독단해서는 안되"는 상황을 넘어 정치에 간여조차 할 수 없었고,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이념을 넘어 "군림하되 지배하지 못한다"는 원칙이 공공연하게 내세워졌다.
천자는 통령을 임명하는 형식적 인사권만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2대 통령 이안세의 대에서부터는 사문화되었다. 중추원에서 선출된 통령은 "만민백관의 중지에 의해" 그 직위를 획득하였고, 천자는 그것을 사후 재가하였을 뿐이다.
한편 중추원은 현대의 의회와 달리 선거로 뽑히지도 않았고, 단순히 각지와 각계각층의 천거를 통해 임명된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을 임명하는 권한은 통령에게 있었으므로 실상 무한한 세습이 가능하였고, 일부 이익집단의 천거가 아닌 일반 대중의 선거를 통해 선출되기까지는 백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5)
5) 훗날 정약용 등은 이러한 점을 꼬집어 당시 정권이 성산 이씨 막부(幕府)에 불과하다는 거센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동아시아의 정치가 오로지 귀한 혈통을 타고난 왕공대부의 전유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통령제의 확립과 중추원의 설립은 확실한 진일보였다.
누구나 강무학교에 들면 전공을 세워 출세할 수 있고, 벌열 집안 출신이 아니더라도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으면 중추원에 나아가 공경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점차 신분 의식을 무너뜨렸다.
이러한 의식의 확산은 종래에 이르러 세습통령제마저 철폐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대한, 제국(帝國)의 성립
대한 내부에서는 그 존재감이 계속해서 퇴색되고 사라져간 황실이었지만, 심지어 완전한 민주화가 이루어진 근대 이후로도 명목상의 군주로 받들어진데에는 외부적 요인이 컸다. 6)
6) 헌법상 완전히 군주의 지위를 잃은 것은 1948년 개헌 때이다. 박상희 정권은 개헌안을 발의하며 국가원수가 대통령임을 명시했다.
황실은 이후 전통황실의 보존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유지되고 있다.
명목상 대한의 번국들은 전주 이씨 황실을 천자로 섬기며 신속했다.
조공책봉관계를 실질적으로 주관하는 것은 통령부 산하의 예무부였지만 인신과 고명은 천자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이것은 형식적인 신속을 넘어, 대한이 중원에 간섭하는 강력한 명분이 되었다.
예를 들어 주 태조 오양을 유폐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太宗) 오삼계는 상국인 대한의 추인을 받으려 무던히 애썼다.
대한은 이러한 정변을 인정하는 대가로 오이라트와 대서국 원정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고, 상당한 경제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주나라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주나라의 외왕내제 실태를 추궁하며 태자나 폐하 등의 호칭과 묘호 사용을 트집잡을 때에도 사대 논리가 동원되었다.
주나라는 이후로도 묘호 사용을 유지했으므로 실제로 이것이 철회되지는 않았고, 대한 정부 측에서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대한이 주의 상국이라는 사실을 얼마든지 외교적 압박으로 사용했던 셈이다.
또한 월-민 전쟁에서도 천자국의 위엄을 내세워 개입하는 등, 대한의 이러한 간섭 기조는 천자국의 이름 아래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번국들 사이에서도 이런 전통적인 사대질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번국들에선 정작 대한 내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황실의 연호가 보편적으로 쓰였으며, 유한오국(有韓吳國), 유한주국(有韓周國) 등의 표현이 공사를 막론하고 거리낌없이 사용되었다.
각 번국의 조정 역시 대한 황실이 유명무실한 것은 알고 있었기에 실질적인 교섭은 통령부를 통해 이루었으나 북경에의 조공 역시 끊지는 않았다. 7)
7) 조공사절의 규모와 인선은 이전 왕조들과 비교했을 때 대거 축소되었다. 통령부에 실직을 지닌 고관들이 파견되어 협의를 진행한 것과 달리, 자금성에는 품계만 높은 번국의 종친이나 원로가 파견되었다.
대한, 황실의 운명
순종이 자금성으로 이어한 이래 황실은 조그만 일도 스스로 처리할 수 없었다. 조선의 구신(舊臣)들로 재추를 삼아 소조정이 꾸려졌지만 제사를 지내는 것 외에는 아무런 권한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묘호와 시호의 결정마저 통령부의 주관 아래 있었다.
소조정은 1670년 순종이 붕어하자 묘호를 고조(高祖)로 올릴 것을 주청했으나 통령부는 순종으로 결정하였다. 이런 격하에도 황실과 소조정은 항의하지 못했다.
실권이 없다는 사실 외에도 어려움은 존재하였다.
예를 들어 처음 북경으로 천도한 순종은 근시(近侍)하는 환관들과도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황실은 살아남기 위하여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대한 본토, 즉 조선과의 괴리는 점점 더하여갔다.
후대의 학자 박지원은 연경일기(燕京日記)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자금성에 들어 황제를 알현하였다. 황제의 연호는 경순(敬順)이며 휘는 탄이다. 황제는 (연운의 사족들도 할줄 아는) 조선어를 전혀 하지 못하여 통변을 거쳐야만 했다. 조선의 사정을 이것저것 물었지만 진심으로 와닿지 않았다.
황실의 연원은 조선으로부터 비롯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근본을 잊고 한어(漢語)밖에 하지 못하니 안타깝다."
황실은 이후 역사의 주체로 나서진 못하였으나 덕종(德宗, 1736~1762) 이후 금령이 풀리며 운신의 자유를 얻게 되자 종종 사회활동에 나섰고, 구휼과 진제에 협력하여 미담을 남기기도 하였다.
대한의 확장
17세기 들어 천하 관념은 대폭 확장되었다. 네덜란드에의 개항과 러시아와의 접촉은 단순히 중국 옆에 조선이 있고, 그 옆에 일본이 있다는 식의 세계관을 단숨에 깨부수었다.
중원을 장악하여 사실상의 막강한 세력을 쥐게 된 대한은 국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향해 끊임없는 확장을 추진했다.
이러한 확장은 17세기 후반의 경신대기근과 겹쳐 더욱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이자원의 4대 원정에 더하여 미주 개척 역시 이때 일어났다.
이 시기 진행된 4대 원정(융희 4대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황익과 신류의 나선정벌.
둘째, 오이라트 원정
셋째, 대서국 원정
넷째, 유구 해방과 구주 정벌전이다.
나선정벌
1651년 영고탑사령관 변급이 흑룡강에 침입한 러시아 탐험대를 격퇴했다. 사로잡은 이들을 통해 러시아의 동진을 파악한 이자원은 이것을 저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청과의 전쟁부터 활약한 명장 황익이 주장을 맡았다. 만주와 몽골에서 끌어모은, 5천에 달하는 병력이 북진을 시작했다. 나선정벌의 시작이었다.
북류대하(北流大河, 예니세이 강)까지 진출한 황익은 동토 남쪽의 러시아 거점들을 모조리 들이쳐 오이라트와의 연계를 끊었고, 에벤키 등 소수부족들에게서 신속을 받아냈다.
이미 영고탑을 장악해 동만주 경영에 나서본 적이 있던 대한은 이런 식으로 거점을 확보하고 주변부를 신속시키는 방식으로 효과적으로 북류대하 이동을 복속시켰다.
이로써 안보적 위협을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초피 확보를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 또한 취할 수 있었다.
1660년 황익이 중추원 의장으로 물러나자 대신 신류가 동토총독에 임명되어 이러한 기조를 이어나갔다. 신류는 허서리 송고투를 보내 톰스크를 불태웠다. 천자의 땅을 침범한 자에게는 죽음 뿐이라는 내용의 비석이 폐허가 된 톰스크에 세워졌다(나선정벌비).
감숙을 침공했다가 오삼계에게 대패한 오이라트는 러시아와의 연계마저 거의 끊기자 위기에 몰렸다.
이어서 대한과 주나라의 토벌전이 시행되자 그들은 허무하게 카자흐로 밀려났다.
서나라 정벌
서나라 고조 장헌충 사후 진행된 내전에서 우세를 점한 것은 손가망이었다. 사천의 생산력과 중앙 조정을 그대로 이어받은 행정력은 운남, 귀주, 광서에만 의지한 이정국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정국은 그의 군사적 역량으로 이를 돌파하려 했으나, 1665년 조나라 대장군 원문필이 운개대산을 건너 공격을 감행하자 더 버티지 못했다.
이자원은 통령부의 명의로 이정국에게 서신을 보내어, 대한의 정삭을 받들고 천자의 신하가 될 것을 강요했다.
이정국은 황제로 내세웠던 장헌충의 막내아들 장주랑을 폐위하고 대리국왕(大理國王)에 책봉되었다.
한편 대한의 번국들에 포위된 형국이 된 손가망 역시 더 버틸 수는 없었다.
이릉과 자귀에서 싸움을 벌여 초왕 좌몽경을 패퇴시킨 손가망이었으나 대한의 수군이 장강을 거슬러오자 대세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제호를 폐한 뒤 촉왕에 책봉되었다.
유구 해방과 구주 정벌전
1658년 박철균이 이끄는 1만 명의 대군이 유구를 덮쳤다.8)
8) 박철균은 당시 사직하고 낙향해있었으나 이자원의 강권으로 재기용되었다.
당시 유구는 사쓰마의 지배 하에 있던 속국이었으나, 대한이 아마미(奄美)를 점령하여 사쓰마와의 연계를 끊은 뒤 나하에 대군을 상륙시키자 곧 유구국 중산왕의 명의로 일본에의 해방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유구 국권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꼭두각시에서 대한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유구왕 상질(尚質, 쇼 시츠)은 '대한속국 유구국왕'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유구의 국체를 보존하고자 하였으나 북경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감히 천조의 번리를 탈취하였다는 죄로 사쓰마 역시 침노를 받았다.
유구를 점령한 박철균은 사쓰마를 들이쳐 카고시마 성을 함락했다. 시마즈 미츠히사(島津光久)는 훈련도감과 교전하여 대패했다.
한편 아마쿠사 시로를 비롯한 수만명의 키리시탄들 역시 대한군에 종군해있었다.
대한에 피난한 1세대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2세대를 막론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십자가를 일으켜세운다는 종교적 열의가 그들을 지배했다.
에도 막부는 중앙의 위엄을 확고히 세울 시점을 파악하며 잠시 방관하고 있었다.
박철균의 원정군은 당초 사쓰마를 쳐서 번주를 참하였을 뿐, 막부에는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음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사태는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대한뿐 아니라 중원 전역으로 퍼져나간 가톨릭, 신생 번국들 내에 존재하는 불만 세력의 일소, 그리고 흉년에서 벗어나려는 대한인들의 피난 등 여러 목적이 겹친 결과. 전쟁은 사쓰마의 징벌이라는 명분이 무색하도록 확대되었다.
바야흐로 일본의 17-18세기를 풍미한 동양십자군이 그 서곡을 알렸다.
< [후일담] 대한, 천명의 계승자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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