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일담] 대한, 천명의 계승자 (1) >
······17세기는 천붕지열(天崩地裂)의 시대였다.
난데없이 닥친 소빙하기가 전세계 사람들을 기근으로 몰아넣고 있을 무렵, 동방에서는 하나의 거대 제국이 몰락했다.
대명(大明).
원을 몰아내고 새로이 수립된 화족(華族)의 단일국가는, 더이상 국초(國初)의 성세를 구가하지 못했다.
11대 가정제(1521~1567)로부터 시작되어 16대 숭정제(1611~1648)에 이르기까지, 백년이 넘도록 이어진 실정이 희망을 갉아먹었다. 누적된 관료들의 부패, 중앙과 괴리된 지방 토호, 각지에서 발흥한 반란군과 도적떼, 끔찍한 기근과 추위가 명나라를 짓누르고 있었다.
천하의 중심, 곧 중국(中國)이 흔들린다는 것은 주변 국가들에게는 위기이자 기회였다.
기존의 질서를 대체할 새로운 세력,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만주족의 발흥과 조청전쟁
17세기의 명나라는 이전 세기와는 달리, 천하 질서에 대한 도전을 격퇴할 능력을 상실했다.
현대에 와서는 왕조 교체기에 흔히 있는 새외 세력의 발흥 정도로 여겨지곤 하지만, 가장 처음 새로운 도전자로 부상한 세력은 의외로 여진(女眞), 즉 만주족이었다.
당시만 해도 명의 충실한 번국이었던 조선이나 이미 한번 도전에 실패한 후 쇄국으로 선회한 일본은 적절한 상대가 아니었다. 월남은 명의 중심지로부터 너무 멀었다.
반면 건주여진의 추장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영도 아래 통일된 만주족은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던데다 명나라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했다.
현대의 인식과 달리, 당시 이것은 조선과 명, 양자에 있어 치명적인 안보 위협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명나라는 그들의 도전에 무력했다.
순식간에 요동이 함몰되었으며, 야전을 시도하던 명군은 번번이 패배했다. 명을 돕기 위해 파병했던 조선 역시 심하(深河)에서 상당수의 병력을 잃고 말았다.1)
1) 당시 조선의 파병은 근대 들어와 남조(南朝) 중심의 역사관을 탈피하자는 움직임 아래 '외세를 도와 같은 민족을 쳤다'는 비난적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현대에는 재조지은을 앞세운 명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동정론이 힘을 얻고 있다.
심하의 전투로 조선과 후금은 사실상 전쟁 상황에 돌입했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숭덕제 홍타이지는 가도의 모문룡을 정벌한다는 명분 아래 1627년 조선을 침공했다. 이 전쟁의 결과 후금은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고 철군했다.
그러나 이것은 근대에 윤색된 것처럼, 희미해진 남북조의 연대 관계를 회복하려는 민족주의적 시도는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조선과 가도에 군사적 위협을 가함으로써 후방의 안정과 안정적인 물자 수급을 도모했다.
실제로 이 시기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대부분 따를 수밖에 없었으며, 이 상황은 병자전쟁까지 이어졌다.
뛰어난 명장이요 군주였던 홍타이지는 명을 쳐서 대릉하성을 점령한데 이어 1635년 몽골을 정복했다. 옛 원 황실로부터 내려오는 제고지보(制誥之寶)를 얻은 홍타이지는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대내외에 청이 제국임을 선포하였다.
한편 이 즉위식에 참석했던 조선의 사신 나덕현(羅德顯)과 이확(李廓)은 청의 칭신 요구도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숭덕제에 대한 절도 올리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칭제 근거 중 하나로 '조선 정벌'을 꼽았으나, 정묘화약은 어디까지나 형제관계를 규정하고 있을 뿐 청에 항복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즉위식에서 대놓고 이런 거부를 당한 홍타이지로서는 그 권위에 다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즉 병자전쟁은 홍타이지의 손상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였다.
남북조를 한데 묶기 위한 '통일 전쟁'이라기보다는 명의 제1번국인 조선을 정복함으로써 명이 주도하는 질서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끝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달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통치하던 나라 역시 흩어져 역사책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빈자리에 진정한 천명을 받은 자가 들어섰다.
이자원.
이 얼자 출신의 군관은 남한산성에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일천년래 제일쾌거
병자전쟁의 초반 양상은 청의 완벽한 승리였다.
조선의 전략을 모두 파악하고 있던 홍타이지는 전격전을 펼쳐 한양까지 직도(直道)했고, 그 의도대로 인조는 정묘년 때 그랬듯 강화로 파천하지 못한 채 남한산성에 갇혔다.
각지에서 몰려온 근왕군마저 격퇴당하는 암울한 상황에서 조정은 주화파와 주전파로 갈려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두 주장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등했다.
그러나 곧 결정적인 사건이 이 갈등을 모조리 날려버리고야 말았다.
당대와 후대를 가리지 않고 각종 문인들은 그 붓끝으로 이 사건을 일천년래 가장 장쾌한 일이라 기록했다.
직접 정찰을 위해 벌봉에 올랐던 홍타이지가, 초관 이자원이 쏜 포에 맞아 파란만장했던 삶을 떠난 것이다.
이자원은 얼자 출신의 군관으로서, 그 아버지는 광해군 시절 금군별장을 지낸 이중전이다.2)
2) 그의 출생에 대해선 당대에도 논란이 있었지만, 이는 후술키로 한다.
그의 초년은 잘 알려져있진 않다. 성서탈적(聖庶奪嫡)을 통해 적모의 아래에 입적되었고, 북방에 부방하였다는 것 정도만이 밝혀진 사실이다.
다만 이자원은 청의 사정에 대해 해박하였는데, 이 부방 생활을 통해 그러한 지식 다수를 얻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자원은 담대무쌍한 영웅답게 홍타이지를 죽이는 것만이 승전의 유일한 해법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실제로 홍타이지가 포탄에 맞아 유명을 달리함으로써 청군 수뇌부는 의견이 분열되어 이전처럼 파격적인 군사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실록에 따르면 그는 이것을 대개 예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이자원은 포위된 남한산성을 빠져나와 경상도 근왕군에 합류, 청군 측의 명장 요토를 격파했다(쌍령 대첩).
이것은 병자전쟁에서 조선군이 청군에게 거둔 첫 승리였다.
이자원은 곧장 김준룡의 전라도 근왕군과 연계하여 남한산성의 구원을 시도했지만, 청군의 책략으로 남한산성은 함락 위기에 몰리고 인조는 수어청의 오사로 사망했다.3)
3) 이는 훗날 일부 문집이 발굴되며 드러난 사실이다.
이자원은 사직이 무너질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세자를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산성에 진입한 청군을 물리쳤다.
일개 군관에 불과했던 이자원은 이 사건으로 세자, 즉 훗날 고종(高宗, 1637~1641)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고 세자를 옹립한 이자원은 갑사창 전투에서 승리하며 청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군량이 끊긴 청군은 화의를 애걸하는 입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인조를 시해한 전범들까지 모조리 양도하여야 했다.
그러나 임금까지 잃는 수모를 당한 조선은 침략군을 순순히 놓아보낼 생각이 없었다.
조선의 승천
한양에 입성해 즉위한 고종은 즉각 화의를 백지로 돌린 뒤, 적의 퇴로를 틀어막고 적군을 격멸할 것을 명했다. 이 명에 따라 도원수 김자점이 북상하는 한편, 유림이 이끄는 북병이 청천강을 틀어막았다. 한편 단기필마로 북병에 합류한 이자원은 청천강에서 청군 다수를 격멸하였다(청천강 대첩).
청군은 황제와 함께 수많은 장졸을 잃은 채 귀환했다.
병자전쟁은 조선이 결코 바라지도 않았고, 수많은 상흔을 남겼던 전쟁이었으나 역사적으로는 한가지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이전까지 병자전쟁을 논할 때는 이자원의 '신묘한 무위와 웅대한 재략'이 강조되었고 실제로도 그의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근래의 많은 연구는 그보다는 조선이 오랜 전란의 세월을 거치며 축적한 군사적 자산에 주목하고 있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르후 전투, 이괄의 난, 정묘전쟁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겪어야했던 유례없는 전란의 시기였다.
상하와 장졸에 상관없이 다양한 전쟁 경험이 축적되었고, 다시 이것이 고스란히 계승되며 천하의 지배자인 명도 당해내지 못했던 청을 격파하는데 이르렀다.
실상 병자전쟁은 조선의 상하군민들이 이러한 군사적 자산을 깨닫고 상당한 자신감을 얻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로 조선이 군사 행동을 빈번히 일으킨 기저에는 이러한 자신감이 깔려있었다.
가도 토벌과 동만주 정벌, 팔참 수복 등, 조선은 계속해서 군사를 일으켰고 모두 승리했다.
이중 대부분은 청을 겨냥한 것이었음에도 숭덕제 사후 내홍에 빠져있던 청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호거와 도르곤의 대립, 도르곤과 범문정의 대립, 심양 조정과 아민의 대립 등이 청의 발목을 잡았다.
모든 국가대계가 위정자의 정치 투쟁의 장으로 변모한 까닭이었다.
반면 조선은 고종의 통치 아래 순조롭게 내정과 확장을 이어나갔다.
결딴날 뻔했던 사직을 다시 일으켜세운 고종의 권위는 조선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고종의 독선적인 왕권 강화책은 후일 숱한 폐단을 불러일으키긴 했으나 개혁 정책을 수월하게 수행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가도를 통한 대명 교역, 개항을 통해 받아들인 신지식과 무기, 대동법 시행으로 줄어든 부담, 널리 보급된 고구마와 감자 등이 그 한 예였다.
더하여 고종은 얼자 출신인 이자원을 중용하여 훈련대장에 삼았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군권을 그에게 몰아주었다.
그 덕분에 고종이 죽은 뒤에도 이자원은 이러한 신임을 앞세워 북벌에 나설 수 있었다.
북벌과 사대 관계의 해체
인조 사후 조선의 국시였던 북벌은 그 아들 고종의 대에서도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에게 있어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목표였다.
이것은 순종(純宗, 1641~1670)의 즉위 후 병조판서 이자원이 간한 말에서 알 수 있다.
"군부의 원수를 갚는 일인데 어찌 입을 것, 먹을 것을 아낀다는 말입니까? 하루라도 빨리 오랑캐를 섬멸하는 것이 백성을 돕는 것입니다."
김육을 위시한 일부 대신의 반대에도 1641년 북벌이 감행되었다.
삼군문 등 경군 1만, 북병 1만 5천, 삼남의 속오군과 가도 병력 2만 5천을 합쳐 5만 명에 달하는 대병이 압록강과 팔참을 넘어 심양을 향했다.
몽골을 정벌하던 도르곤이 황급히 귀환했으나 이미 연산관과 요양이 연거푸 뚫리고 난 뒤였다.
도르곤이 이끄는 최후의 팔기군은 심양 남쪽 요야(遼野)에 진을 쳤다.
평탄하고 이렇다할 장애물이 없는 요동 평야는 기책이나 병법을 쓸 수가 없어 청에게 유리한 전장이라 여긴 까닭이다.
그러나 순수히 힘과 힘으로 맞붙은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청군을 대파했다.
매죽헌집(梅竹軒集)의 표현에 따르면 "혼하가 피로 물들고 시체로 물길이 막혔"으며, 청의 마지막 효웅 도르곤은 붙잡혀 이자원의 손에 처형당했다.
흥경으로 도망쳤던 강덕제(康德帝)가 제고지보를 바쳐 항복함으로써 청은 사라졌다.
청의 멸망은 단순히 인조의 복수를 완수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지 않았다.
조선은 이로써 천명을 다툴 실력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챈 자들은 한양의 임금이나 대비, 조정 대신이 아니었다.
북벌군에 참여했던 장수와 병졸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명장 이자원.
새로운 시대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 [후일담] 대한, 천명의 계승자 (1) > 끝
ⓒ 핏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