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경을 넘어 별을 향해 >
별은 밤하늘에 쏟아질듯이 가득했다.
이자원은 묵묵히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남한산성은 별 사진을 찍기가 좋아 자주 놀러왔던 곳이었다.
아내는 별을 좋아했다.
아들딸은 그냥 밤에 나들이 나오는 것을 즐겼다.
그는······.
코 끝에 피비린내가 스쳤다.
"그랬지."
가족과의 추억 위에는 그가 이곳에서 치렀던 혈전이 덧씌워졌다.
처음 남한산성에서 홍타이지를 저격하고, 인조의 죽음을 입막음하고, 봉림대군의 난을 진압하고.
자신의 눈으로 유주의 죽음을 목도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의 선택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다.
별을 바라보며 조그마한 안식조차 찾지 못하는 것은.
뒤에서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호위를 위해 서있던 훈국 군사들이 수하(誰何)했다.
"아버님을 뵈러왔소."
나지막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령 대감."
"이리로 들여보내라."
이자원이 말했다.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장성한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바꾼 수많은 역사 중 하나.
원래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인간.
"잘, 찾아왔구나."
이자원이 말했다.
"소자도 한번 와본 곳입니다."
안세의 말에 이자원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곳에서 시작했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박았을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소자에게도 이곳은 의미가 깊은 곳이지요."
안세는 한켠에 서있는 위령비(慰?碑) 쪽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이름 하나에 닿았다.
이호의 난 당시 죽은 이들을 기록한 비석이었다.
그간 나라를 위해 순절한 이들을 기리는 비석은 있었으되, 이렇게 순수히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는 비는 드물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리라.
"더이상 이곳에 임금이 갇히는 일은 없겠지요."
"갇힐 임금조차 없을 것이다."
이자원의 말에 안세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한참 꺽꺽대는 광경을 이자원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꾸짖지는 않았다.
"아버님께서는 처음부터 조선에 대한 충정 따윈 없었군요."
"그래."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조선은 그 수단이었을 뿐이다.
인조의 죽음도, 고종의 신뢰도, 이 나라의 백성들도 전부.
"그렇기에 이 대한을 만들 수 있었지."
대한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조국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통치자가 선거로 선출되지도 않고, 제대로 된 대의제도도 아직 없으며, 형식적으로 황제도 존재하는 나라가 아닌가.
"만족하십니까?"
이자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님이 중간에 목적을 그만두었다면, 단지 조선의 신하로 살아갔다면 어땠을까요."
안세가 진심으로 궁금한듯이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살아계셨지 않겠습니까?"
"의미없는 질문이다."
"처음에는 권력욕 때문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랬다면 조선왕이, 그 다음엔 황제가 되셨겠지요."
안세는 한박자 쉬고 말했다.
"황제는 자금성 안에 유폐되어있고, 민의(民意)의 총체를 표방하는 통령이 다스리는 나라. 대한이라는 이름을 쓰는 이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버님이 해야할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 아닙니까."
이 시대의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목적을 위해서.
강제로 역사를 비틀어 만들어낸 나라.
그것이 대한이었다.
"엉망진창인 이 그림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다는 말입니까?"
안세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던졌다.
실로 기이할 정도의 집착이었다.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망령(亡靈)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엉망진창인 그림.
그가 알던 나라를 어설프게 베껴왔을 뿐인 껍데기.
그러나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 아닌가.
이자원의 수명 내에 마치기엔 역부족인 일이었지만,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자는 아버님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졸작을 최고의 걸작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동시대에서 가장 뛰어난 전쟁영웅.
대한의 신민을 이끌어 침노당하고 수탈당했을 그들의 운명을 바꿔낸 효웅.
하지만 그런 자라 할지라도 죽음은 평등하게 닥친다.
그렇기에 후계자가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뜻을 이어받아 더욱더 훌륭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후계자가.
"그것이 소자가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입니다."
이자원은 영원히 안세가 만든 걸작을 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집착이 현실로 이루어진 광경조차.
그의 투쟁은, 그가 죽은 후에야 결실을 맺으리라.
"······."
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에선 침묵이 흘렀다.
풀벌레 소리만이 찌르륵 울려퍼질 뿐, 멀찍이 떨어진 수행원들도 굳게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자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쉽지 않은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앞으로 계속될 원정과 확장, 번국체제의 유지, 대한의 이름 아래 묶인 이질적인 민족들, 비대화된 군부, 패권에 대한 도전, 그리고 경신대기근까지.
어떤 것은 이자원의 수명 내에 닥치겠지만, 어떤 것은 이자원이 죽을 때까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자원은 그가 앞으로 겪게 될 문제를 천천히 풀어놓았다.
원래 역사를 통해 보았을 때, 언젠가 닥치리라 예상할 수 있는 일들.
이 시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설명하는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아들은 조바심 내지 않고 끝까지 들어냈다.
안세는 이자원이 그것을 어찌 아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유가 아니라 수단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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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는 이야기가 끝나자 곧장 인사를 올린 후 걸어내려갔다.
이자원의 손이 그 등을 향했다가, 스르르 떨어졌다.
"아들을 잘 키웠군."
뒤쪽에서 그런 말이 들려왔다.
호위병력은 저 아래 멀리 떨어져있으니, 그들은 아니었다.
이 나라에서 감히 통령에게 몰래 접근할 수 있는 자는 암살자 밖에 없겠으나, 자객이라면 말을 건네는 대신 문답무용으로 칼을 휘둘렀을 터.
그렇기에 이자원은 그자의 정체를 눈치챘다.
"노인장이시오?"
그 물음에 예의 노인이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이자원은 놀라지 않았다.
남한산의 산신령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이자원을 이곳에 날려보낸 장본인이니 이정도 기술 정돈 부려줘야 하리라.
"'아들'로서 키운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안세는 자신을 대신할 수단이었다.
그에게 정을 보여준 적은 드물었다.
이자원은 싸늘한 눈길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목적을 이루었나?"
"그렇소."
이자원이 말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함락되지 않을, 강한 나라를 만들었다.
알맹이도 자신이 세운 후계자의 손에 차차 채워지리라.
그러니 대한민국의 재건은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의 손으로.
노인은 이자원의 확신어린 얼굴을 바라보더니 측은하게 말했다.
"만족스러워 보이진 않는군."
노인의 말에 이자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자원이 물었다.
"노인장은 무엇 때문에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이오?"
이제까지는 궁금해하지 않던 사안이었다.
그에겐 이유보단 수단을 얻었다는 사실이 중요했으니까.
이자원의 물음에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거창한 이유는 아닐세."
그가 말했다.
"그냥 밥 한그릇 얻어먹은 값이었을 뿐이야."
"밥?"
이자원이 눈을 찌푸렸다.
그가 노인에게 밥을 샀을리는 없으니 다른쪽에서 얻어먹었다는 뜻이리라.
이자원은 무언가 알것 같았다.
실로 오랜만에 병자호란의 기록을 떠올린 이자원이었다.
- 온조(溫祚)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여 그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는데, 반드시 그 신(神)이 있을 것입니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인조는 예조의 요청으로 백제 온조왕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영험을 얻기 위해서였다.
"내게 제사를 지내던 이들은 이것을 기원하더군. '저 오랑캐들을 물리칠 힘을 얻게 해달라'고 말일세."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나를 보냈다는 말이오?"
이자원의 물음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남한산에 오른 자들 중 그들의 소원을 이룰만한 사람은 자네 밖에 없었으니."
노인은 그렇기에 이자원을 병자호란 한복판, 남한산성으로 날려보냈다.
이자원은 그들의 바람대로 홍타이지를 죽이고 청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자원이 이곳에 온 결과, 조선은 사실상 멸망했다.
남한산성에 있던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결과였음이 틀림없었다.
"인조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제 나라를 보존하는 것이었겠지. 그러나 내게 빈 소원은 단지 청을 물리칠 힘을 달라는 것이었네. 목적과 수단을 착각한게야."
노인은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않은 이자원이었지만, 노인은 말을 계속했다.
"자네 역시 그 목적이란 것에 너무 집착했어. 그 탓에 스스로의 바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네."
"진짜 자네가 바랐던 것은 무언가? 강대한 나라인가? 한국의 부활인가?"
이자원은 흠칫했다.
노인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자원은 눈을 감았다.
"나는 틀리지 않았소."
"어떤 점에서?"
눈꺼풀에 덮인 시야는, 더이상 별이 보이지 않았다.
노인의 은근한 표정 역시도.
"전쟁이 일어나기 전, 제안을 받았소. 가족들과 일본으로 망명하라는 것이었지."
애국심이라는 단어는 사전에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군인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매일 무언가가 깨지고 날아다니는 생활은 지긋지긋했다.
다행히 공부는 곧잘 했기에, 육사에는 단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는 달리 누구보다 밝고 활달했던 여자를 만나, 딸과 아들을 낳았다.
화목한 가정이었다.
그의 인생에서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행복이었다.
이사는 자주 다녀야했지만 생활은 제법 안정되어 있었고, 자식 키우는데 등골은 휘었지만 그 와중에도 혜택은 많았다.
그가 제안을 거절한 것은 애국심이 아니라 의리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가정을 이루고, 유지할 수 있게 해준 나라에 대한 의리.
전운(戰雲)이 무르익는 와중 이자원은 가족을 처가가 있는 부산으로 보냈다.
그것이 실수였다.
"이 나라에 지킬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믿었던게, 실수였다고?"
웃기는 소리다.
이자원은 결코 그런 이야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눈을 부릅떴다.
그 눈에는 핏발이 형형하게 서있었다.
"나는 이곳에 대한을 재건했소. 이 나라야말로 내가 세운 위령탑이야. 목적을 착각했다니. 이것 외에 나에게 무슨 목적이 있단 말인가?"
피를 토하듯 외치는 이자원의 시선을 노인이 가만히 맞받았다.
여느 인간들과는 달리, 그는 이자원이 노려보는 시선에도 주눅들지 않았다.
"그것은 망령이 할 법한 이야기지, 사람이 할 이야기는 아닐세."
그는 손가락을 들어 산성 한 곳을 가리켰다.
"저곳이 원래 군관 이자원이 묻혔을 곳이라네."
이름없는 훈련도감 초관으로, 쓸쓸하게 홀로 죽어갔을 본신의 무덤.
이자원은 미처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는 본신의 운명마저 뒤틀어버렸던 것이다.
"아내와 자식을 병으로 잃고 전란의 와중 쓸쓸하게 죽었지. 그만한 무용을 가진 자가 싸우다 쉽게 죽었을리는 없으니, 아마 자포자기한 결과일 것이야. 시신은 동료들이 마지못해 거두어서 묻었네."
누구도 슬퍼하지 않고,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이다.
본신의 죽음은 그러했다.
"최소한 자네는 이런 운명을 바꾸었어. 아내가 생기고, 자식이 생기고, 자네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지. 그 사람들이 전부 자네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진심으로 그리 여겼다는 말인가?"
노인은 이자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측은함이 묻어있었다.
노인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돌아섰다.
"앞으로 자네가 이곳에 찾아오더라도 나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네. 그저 일을 벌여놓은 죄가 있어 들렀을 뿐이니."
그때였다.
막 노인이 발걸음을 떼려할 때, 뒤에서 이자원이 불렀다.
"노인장."
"무슨 일인가?"
노인이 슬쩍 돌아보며 묻자 이자원이 입을 뗐다.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오?"
"글쎄."
노인은 말했다.
"자네의 원래 가족과 만날 일은 없을걸세. 그 세계와 이쪽 세계는 다르니."
"그런가."
이자원은 잠시 밤하늘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쪽 세계에서 죽은 사람과는 만날 수 있다는 뜻이군."
이자원은 더이상 노인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산을 내려갔다.
높고 가팔랐던 남한산성을.
< 역경을 넘어 별을 향해 > 끝
ⓒ 핏콩
작가의말
본편 끝. 후일담 시작.
이자원 과거 외전을 써야할지 말아야할지...고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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