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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203화 (203/213)

< 신세계 (3) >

쇼서는 긴장된 표정으로 중추원 건물에 들어섰다.

중추원은 칭제건원 후 헐려버린 모화관 자리에 있었는데, 제법 크기가 넓었다.

하기야 수백 명이나 되는 인원을 수용해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

쇼서의 눈에 다른 의원들의 모습이 띄었다.

대한의 강역 각지에서 올라온 자들이었다.

그처럼 변발한 자들은 몇 없었다. 저 멀리서 두르후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며 애써 눈길을 돌리고 있을 뿐.

쇼서는 애써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요동 한인들이 자신을 중추원에 천거했을 때는 놀랐지만, 그리고 그것이 가납되었을 때는 더더욱 놀랐지만 지금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청은 망한지 오래다.'

원래 역사에서 중원을 정복하고 마지막 왕조로서 3백년을 이어갔어야할 청은, 이곳에선 불과 3대 20여 년만에 멸망해버렸다.

그처럼 난세를 틈타 일어났다가 무너진 단명 왕조야 허다했고 그러니 적당히 힘이 빠진 허수아비 황제 따위야 지금에 이르러선 큰 위협이 되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적당히 청에 향수가 있는 자들도 대한의 신민으로 포섭하기 위한 방책이 아닐런가.

한인들이 그를 천거한 것은 청 멸망 후 제법 협화(協和)에 노력을 기울여온 점을 살핀 것일테고.

쇼서도 명 멸망 이후 현도공(玄?公) 따위를 제수받았으니 작위 하나를 들고 있는 귀족이 자신들을 대신해 사정을 살펴주길 원하리라.

'뭐, 이 나라에서는 왕공의 작위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은.'

통령 이자원도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있다. 통령의 직위가 번왕에 준한다고 하지만, 그것 뿐 아닌가.

자금성의 소조정에서야 서로 품의(稟議)하여 누구의 작위를 올리니 내리니 떠들어댔지만 궁궐 바깥에서야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다.

쇼서는 그 가련한 자들에게 동병상련마저 느꼈다.

그나마 그는 중추원 의원으로서 천하대계를 논의하는 이곳에 서있지 않은가.

'그래, 어쩌면 이것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맞지 않는 황룡포보다 지금처럼 흉배 놓인 단령이 마음은 편했다.

그가 황제로 있을 때 유일하게 내릴 수 있었던 결정은 나라 문을 닫는 것 뿐이었으나, 최소한 중추원에 있다면 그를 천거한 자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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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원에 배석한 의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인원이 300명에 달하였으니 건물이 넓다 하나 은근히 비좁기도 하였다.

"통령 대감께서 들어오시오!"

정령 쯤 되어보이는 군인이 앞장서서 우렁차게 외쳤다.

이자원이 용산의 통령부에서 몸소 이리로 행차한 것이다.

호위병력이 절도있게 먼저 들어와 늘어서고, 이윽고 이자원이 들어왔다.

이 가운데서는 그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자도 있고, 오늘에야 처음보는 자도 있었으나 모두가 한가지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서둘러 기립한 후 통령을 향해 복배(伏拜)하였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으나, 이곳에 모인 전근대인들로서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단 위에 올라선 이자원은 삼백 명의 중추원 의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로 조선과 만주, 몽골과 연운, 등주까지. 위로는 왕공제후부터 아래로는 포의(布衣)의 상민에 이르기까지 각지와 각층의 대표들이 이리 모여 통령부에 자문하고 건의상신하는 일을 맡게 되었으니 본인으로서는 감회가 깊소."

삼백명이나 배석해있니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법도 하건만, 사방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렇기에 이자원의 낮은 어조에도 그들은 통령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조선은 대한의 전신으로 지금도 국체(國體) 그 자체를 일컫는 말로 자주 쓰였으나, 공식적으로는 이자원의 북벌 이전 영유하였던 내지 팔도를 뜻하는 지역명으로 사용되었다.

"성제(成帝, 전한 효성황제) 때에 주운(朱雲)이 전각 난간을 붙잡고 상방검으로 하여금 간신 장우를 벨 것을 청하니 간언이란 마땅히 이래야할 것이요, 제갈량은 털 꼬던(結?) 선주(先主)에게 계책을 내놓아 형주의 강병을 얻게 하였으니 시무를 보좌하는 일은 마땅히 이래야할 것이오.

이곳에 모인 여러 의원은 학문과 실무에 밝으므로 통령부에 간할 일이 많으리라 여기니, 앞으로 기탄없이 이를 상신토록 하시오."

이자원의 말이 끝났지만 사방은 고요했다.

그때 뒤에 서있던 군인들이 느닷없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박장대소라는 사자성어가 있을 정도이니 손뼉을 치는 행동은 인간의 본능으로서, 그 자체는 그리 어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의례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적어도 이 시대 동양인들에겐 익숙하진 않았다.

하지만 의원들은 직감적으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이자원의 말에 대한 찬성 혹은 인정을 뜻하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 짝짝짝짝!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그들은 황급히 군인들을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눈치를 살피던 몇몇 사람들도 뒤늦게 동료들의 행동에 합류했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이윽고 이자원이 말했다.

"오늘은 개회(開會)를 선포하는 자리이기는 하나, 각기 상신할 내용이 있을 터이니 발언권을 얻어 순서대로 고하도록 하시오."

의원들은 약간 얼빠진 표정이었지만 속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일신의 영예를 위해 여기에 온 자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역시나 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천거된 이들이 아니겠는가.

맨 처음 나선 자는 대구부의 의원 허응선이었다.

"통령 대감의 치세가 이루어지며 성덕을 펴시는고로 날로 신민의 생활이 나아지니 강태공이 다스리던 시절이 이때와 같을까 싶사옵니다······."

그는 정명 전쟁이 끝나자 군인을 관두고 낙향하였는데, 품계도 크게 오른데다 그간 훈국에서 인맥과 공훈을 쌓은 덕에 지역의 유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여러 고향 양반들의 천거를 받아 중추원에 나온 터였다.

"헌데 올 한해 동안에는 홍수, 가뭄에 풍변, 지진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간 여러번의 구휼에도 영남에는 굶주린 자들이 많사옵니다."

자칫 통령부를 음해하는 이야기로 들릴까 싶어 허응선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대한은 예전의 조선에 비해 확실히 안정된 나라였지만, 그래도 흉년이 들면 무슨 천기가 어지럽혀진 까닭이라고 떠드는 자들이 꼭 튀어나왔다. 보안사의 임무 중 하나도 그들을 잡아가는 것이었고.

북경을 점령한 이자원은 금의위와 동창에서 온갖 자료와 인력을 확보해 한양으로 가져왔는데, 이들이 기존 훈련도감에서 정보 임무를 맡던 자들과 통할되어 자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고종황제 이래로 역사(役事)에 참여한 이들만 구휼곡을 받아가는 것이 관례가 되었으나, 고아나 과부 있는 집안은 노역에 참여하기가 힘든데다 더러는 탐학한 몇몇 수령들이 짜고서 역사를 시키고도 품삯을 주지 않는 일이 빈번하옵니다.

통령 대감께서는 모쪼록 이런 사정을 살펴주십시오."

북벌을 준비할 때만 해도 어떻게든 백성의 노동력을 쥐어짜내야 했으니 구휼조차 노역의 대가로 베풀어졌다.

하지만 십수년에 걸쳐 전국 곳곳에 공사가 벌어지며 대부분의 보나 저수지도 손을 보았고, 염전이나 광산도 개발이 된 터였다.

무엇보다 경술년이 오면 작금의 구휼책으로는 굶어죽는 사람이 사방에 넘쳐날 터.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응선은 이자원의 동의에 힘을 얻어 말을 이었다.

"반면 장사치는 흉년이 와도 생업이 막히지 않고, 오히려 창고에 강남 쌀을 가득 쌓아놓아 비싼 값에 되팔고 있사옵니다. 마땅히 부상대고(富商大賈)들에게 세금을 크게 매겨 구휼로 나가는 재정을 충당해야할 것이옵니다."

그러자 송상과 만상 등이 모인 쪽에서 반발이 터져나왔다.

"나라에서 수입해오는 분량은 따로 있고, 우리 같은 상고가 있기에 들여오는 쌀의 양도 늘어나는 것이오이다! 세금을 중히 매겨 이문이 박해지면 다른 상품을 찾지, 무엇하러 무겁고 보관도 힘든 쌀을 사오겠소이까?"

"통령 대감, 모쪼록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이자원은 말없이 그들의 논쟁을 지켜보았다.

한쪽에는 삼남의 향반 세력, 한쪽에는 도성과 서북의 상인 세력.

지금 싸움을 관망하는 다른 지방, 다른 계층의 의원들 역시 제 기반의 현안이 있을 터.

정당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

세월은 쏜살같이 빠르게 흘러갔다.

3년의 수학을 마치고 강무학교를 졸업한 인원들은 각자 임지로 향할 준비를 시작했다.

"동토에서는 아직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던데. 그리로 가는 놈들은 좆됐군."

"황 대장이 왕작을 한사코 거절한다지."

"담비는 많이 나니 제법 돈은 되겠지만은, 그 추운 땅에서 토인 부락이나 다스리는 왕이 무슨 재미가 있다고 덜컥 수락하겠는가?"

졸업생들은 그리 떠들어댔다.

하지만 정작 초임 근무를 시베리아에서 하게 된 생도들조차 사직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한의 강역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넓어졌고, 그만큼 사관의 위상도 올라갔다.

자신들이야말로 나라의 동량이라 생각하는 자부심이 있었으니 눈 딱 감고 몇년만 참고 오겠다 마음먹은 것이다.

애초에 의무복무 기간이 있으니 함부로 군문을 나설수도 없지만.

장길산이 곁에 있던 안세에게 물었다.

"자네는 훈련도감이지?"

"그래야지."

훈련도감은 이 나라 군부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

나라의 숙원이었던 북벌을 완수하고 전성기를 이끈데다, 통령부터가 이 훈국 출신이었으니까.

물론 순수히 전투력 자체만 감안하더라도 훈국을 따라올만한 군영은 없었다.

안세가 장차 군부를 완전히 휘어잡기 위해선 이 훈련도감에서 경험을 쌓아나가는 편이 좋았다.

"자네 아버님 은택이라 말하고 싶지만, 성적도 자네가 제일 좋았으니 할말은 없군."

장길산의 말에 안세가 대답했다.

"자네도 훈련도감에 들어갈 성적은 되었을 터인데."

"내가 고르지 않았네. 훈국은 이젠 원정에는 별로 참여치 않고 도성의 경비를 맡고 있으니, 아무래도 공적 쌓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더 빨리 출세하려면 변방으로 나가야겠지."

말은 그리하지만, 사실상 출세 속도는 나가서 전공을 쌓나 군의 중핵인 훈국에서 경력을 쌓나 비등할 터였다.

출세욕보다는 일신의 무용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겠다는 공명심 때문이리라.

"대만(大蠻)으로 갈텐가?"

동토를 제외하면 계속 분쟁이 벌어지는 곳은 대만이었다.

만이들이 사는 큰 땅이라 하여 대만이라 부르는 것이다..

VOC는 순순히 돈이나 챙겨서 철수했지만 아직 대만 곳곳에는 사람 잡아먹는 야인들 부락들이 그득했다.

"그런 놈들과 싸워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자네에게 곧 유구 원정이 있을거란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팔참으로 가야겠더군."

안세는 이자원에게 유구를 칠 것이란 말을 직접 들은 당사자였다.

거기에 더해  지금 중추원 의원을 지내고 있는 아마쿠사 시로도 매일같이 중추원에 나가 십자군을 외치고 있다지 않은가.

"마귀의 하수인, 이교도 막부 아래서 신음하는 유구를 구하자!"

당연히 대부분의 의원들은 십자군 운운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천자국을 자임하는 대한이니, 전통적인 번국 유구를 구하자는 주장은 나름 힘을 얻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진실로 대한이 유구 왕실이 빼앗긴 땅을 되찾아줄리는 없었다.

오히려 지금 남아있는 왕권마저 상실한채 허울뿐인 왕작만 지니게 될 공산이 컸다.

이자원의 목적은 유구를 집어삼키는 것이었으니까.

어쨌든 그것을 위해 장길산은 몸소 팔참의 항왜군영에 지원한 것이다.

"아무래도 파병을 한다면 그쪽에서 주로 초모(招募)치 않겠는가?"

장길산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신임 참위들은 멀리는 수만리 밖까지 부임한다.

반면 같은 도성 내 훈국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안세 입장에서는 시간이 상당히 남아있었다.

상당히 먼 곳까지 갔다와도 될 정도로.

< 신세계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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