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세계 (2) >
해가 서서히 산 너머로 넘어갔다.
아직 저녁 무렵은 되지 않았으나, 자라는 아이들이 다 그렇듯 석찬(夕餐) 기다리기 전에 배는 이미 꺼진지 오래였다.
본래라면 흉년 살림에 먹을 것 없어 냉수 먹고 속이나 채웠을 소년소녀들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마령서나 감저(甘藷) 같은 구황작물이 광범위하게 보급된지 오래이다.
어디에서나 잘자라고 맛도 훌륭한만큼 이 시대에 이만한 간식거리가 없었다.
소년이 능숙한 손길로 불을 피우고 덩어리를 구워내자 아이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우와!"
마령서와 감저, 즉 감자와 고구마는 그간 지속적인 교배를 통해 개량을 이뤄낸 덕에 알이 실했다.
물론 현대의 품종과는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이만하면 허기진 아이들의 배 정도는 능히 채울 수 있을 터였다.
허겁지겁 고구마와 감자를 뜯어먹는 동남동녀들 틈에서도 정작 구워낸 소년은 앉아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원(?)이 너는 안먹니?"
소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건넸지만 원이라 불린 소년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있다 밥 먹을텐데 뭐. 나는 배가 안고프니 너희나 많이 먹으렴."
곧 닥쳐올 끔찍한 대기근을 예고라도 하듯, 흉년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작금의 대한은 사정이 확 나아졌다 하지만 허기진 상황에서도 제 몫을 남에게 양보하는 것은 어른도 쉬이 하기 힘든 일이었다.
뒤편에 멀찍이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일행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생각도 깊고 어른스러운 아이입니다. 우리 원(院)의 자랑이지요."
검은 수단과 목에 걸린 십자가.
척 보아도 예수회 신부라고 광고하는 차림이었다.
반면 되물은 쪽은 붉은 두정갑 차림의 군관이었다.
"역적의 아들인데도 말이오?"
보안사(保安司) 정위 안익신의 물음에 가르시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은 이미 십여년 전에 끝난 사안이 아닙니까. 지금은 단지 하나님의 어린양일 뿐입니다."
"어디까지나 나이가 어렸기에 절두산에서 목이 잘리지 않은 것 뿐, 역적의 자손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오."
봉림대군 이호의 외아들 이원.
저 소년이 영명하고 인자하다는 것은 개인으로선 어떨지 모르나, 새로이 질서가 잡힌 이 나라에 있어 그리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이백이 자금성으로 옮겨지고, 왕실의 근친(近親)은 죄 목이 달아난 상황에서 반대 운동이 일어난다면 저 인품 좋은 소년을 구심점으로 할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오래 전 폐서인되어 남만사에 의탁되어 자랐다지만 반역을 꿈꾸는 자들은 어디에서든 튀어나올 수 있었다.
'역적의 씨가 어디 가겠는가.'
안익신이 혀를 찼다.
당장에라도 명령이 떨어진다면 저 소년의 목을 거두어올 수 있으나, 그렇지가 않았기에 참고 있는 것 뿐이었다.
그는 나라를 사랑했다.
천민인 그를 거두어 군관을 시켜주고, 요직인 보안사에까지 앉혀준 이 나라를.
"이미 봉림 왕자의 가족들은 이전의 인연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왕족도 아니고, 단지 쉴 곳을 찾는 자들일 뿐입니다."
봉림의 식솔들은 남만사에 의탁한지 오래였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외부에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가끔씩 보안사나 찾아올 뿐.
그나마 부인과 딸들은 바깥활동도 잘 하지 않고 기도만 하며 지내는고로 보안사도 그들에겐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원만이 요주의 대상이었다.
듣자하니 학문도 제법 잘하고 인성도 훌륭하다는 듯했으니 더욱 경계하는 것이다.
안익신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가르시아를 째려보았다.
"역적의 자식이니 관직에도 출사할 수 없는데 학문을 무엇하러 닦게 하는 것이오? 단지 한 사람 필부(匹夫)로나 자라게 하면 내가 이리 찾아올 일은 없지 않소?"
안익신의 추궁에 가르시아는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안익신의 눈에는 저렇게 감자와 고구마를 굽는 것조차 제 아비처럼 '불로써 나라를 얻으려드는 것'같이 보이리라.
"출세하는 것만이 공부의 목적은 아닙니다. 아이는 천지의 원리와 하나님의 행적에 관심이 많으니 순수히 그분을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지요."
안익신은 가르시아의 설명을 자세히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강의 뜻은 통했다.
공부라는 것이 불경외듯 교리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란 말인가.
"장차 저 아이가 머리를 깎고 승려라도 될 작정이란 말이오?"
안익신이 묻자 가르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장차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나, 지금으로선 그렇다고 합니다.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군요."
가르시아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정위 나리도 이젠 감시는 그만두시지요. 신부의 꿈을 가진 아이이니 장성하면 유럽, 그러니까 남만으로 유학을 보낼 것입니다. 이 나라에게 더이상 위협이 되지는 않겠지요."
"흥, 그거야 모르는 일."
남만에서 군사를 끌어와 내가 임금이라 외칠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 나라에선 이미 승려가 왕이 된 전적이 있으니 남만승이라 해서 경계를 낮춰서는 안되었다.
"조만간 다시 찾아올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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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반 특이한 동향은 없사오이다, 대감."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보안사의 보고를 유형원이 읽었다.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훗날의 현종이 될 자.
역사적으로 내치에서 공적은 남겼으되 대단한 효웅으로 평가받는 인물은 아니었고, 또 당시에는 아기였던지라 딱히 위협으로 느끼진 않았던 아이였다.
지금처럼 이자원의 통치가 완전히 뿌리내린 대한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했기에 큰 관심을 두진 않았다.
하지만 신부가 되겠다니.
이것은 조금 의외였다.
그가 틀어버린 역사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개인의 운명을 이끌었던 것이다.
"남만승이 되겠다는 것은 속세와 연을 끊겠다는 것이요, 생각 있는 자라면 그를 내세우려 들진 않을 것이다. 남만에서 군사를 끌어와 대한을 도모하는 것은 더욱 현실성 없는 일이니, 이만 감시를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이자원은 안익신의 보고를 읽고 짧게 말했다.
유형원이 연필로 이런 비답을 줄줄 적어내려갔다.
"속오군의 훈련은 어찌되고 있는가?"
이자원의 물음에 유형원이 급히 쓰던 글을 마무리하고 고개를 쳐들었다.
"속오군의 재정 확충은 문제없이 이루어지고 있사오이다. 하지만 농한기 두달간 병기와 진법을 익히는 것도 시간이 모자란데 다른 교육까지 시킬 필요가 있겠사오이까?"
속오군에 소집된 병사들은 진법과 병기 훈련에 더불어 한글이나 간단한 산수, 천자문 수업도 받는 중이다. 더하여 일종의 정훈 교육까지.
"꼭 필요한 일이다."
최소한의 소양은 갖추고 있어야 작전 수행에 도움이 될 뿐더러, 속오군끼리 동질감을 형성하기도 쉽다.
요동이나 요서, 연운 일대에서도 속오군 편제를 뿌리 내리고 한글 교육을 밀어붙이는 것은 그런 의도에서였다.
물론 이러한 동질화 작업에는 약간의 당근을 병행하는 것이 옳았다.
비록 국자와 국어로 출제한다지만 그 출신에 차등을 두지 않고 과거 시험을 개방한 것이 그 예였다.
또한 중추원 역시 상당수 의석이 본토가 아닌 신영토에 배정되었다.
거기에 가열찬 역사 왜곡도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으니 이것이 남북국이다.
시간이 지나 남쪽에서는 김씨가 무너지고 왕씨가 들어섰으며, 북쪽에선 대씨가 무너지고 완안씨가 들어섰으니 실상은 한 종족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고려와 금이 형제지국으로서 정답게 지낸 것이다!"
"북조(北朝)의 역사는 고구려와 발해를 거쳐 금나라로 이어지는데, 금이 도읍한 곳이 바로 이곳 북경이니 화북을 점유하여 이백년을 다스렸다! 연운의 백성들은 곧 이 북조의 후손이 아니겠는가?"
논리적 비약과 아전인수가 판치는 주장이었지만 대한은 이 주장을 관철시킬 힘이 있었다.
완전히 대한에 마음이 없는 자들은 주나라나 다른 번국으로 떠났고, 남아있는 자들은 대한의 통치에 순응하는 자들이다.
자신의 조상이 고려인, 혹은 조선인임을 내세워 호적을 되돌린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던 자들도 점차 새로운 질서에 녹아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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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황제시여! 자손들을 굽어 살펴주소서!"
두르후가 술을 따라 제를 올렸다.
누르하치의 봉사손(奉祀孫)으로서 건주공의 작위를 지니고 있는 두르후이니, 그가 주관하여 제사를 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두르후는 자라면서 딱히 유학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본인도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까닭에 여기저기 미숙한 점이 보였지만 다행히 이곳에는 깐깐한 선비 대신 아이신기오로 일족 밖에 없었다.
제를 올린 후 상석에 앉은 두르후가 술잔을 들어 말했다.
"우리 아이신기오로 일족은 한때 지고한 황족의 몸이었으나, 어리석은 자들이 연달아 권병을 잡은 탓에 천명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일문이 대공을 세워 다시금 만주땅의 갑족(甲族)이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두르후의 말에 둘러앉은 인간들은 은근히 아부를 건넸다.
"신세영락할 뻔한 일족을 일으켜세운 분은 건주공이 아니십니까?"
"건주공께서 적극적으로 통령을 돕지 않았다면 오늘날 대한의 성세가 있었겠습니까?"
두르후는 그 말에 의기양양히 가슴을 폈다.
그러나 티내진 않았지만 은근히 찔리는 구석이 있는 그였다.
자청해서 대한을 돕기 위해 움직인 자는 폐제 쇼서였다.
한때 철천지원수로서 조선과 피를 흘리며 싸웠던 만주족이기에, 더더욱 조선에 협력해 공을 세워야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그 말처럼 만주족들은 열심히 싸워 대한의 일부로 편입되는데 성공했다.
적어도 민간 차원에서는 알력이 있을지언정, 한양의 통령부 차원에서는 그들의 공로를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우리 만주족들도 중추원 의원을 천거하라는군!"
생각지도 못한 쾌거였다.
이는 쇼서의 공이라면 공이었지만, 두르후는 태연히 그것을 자신의 공으로 가로챘다.
조작에 항변해야할 쇼서는 이미 만주땅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태조의 직계이신 건주공을 천거해야 할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덕분에 자연스럽게 두르후는 중추원에 나아갈 것이 사실상 내정되었다.
"아직 폐제는 북경에 머무르고 있다지?"
술을 들이키던 두르후가 문득 생각난듯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죽을때까지 그곳에서 시나 읊으며 지내겠지요."
북경은 왕공의 도시라 불린다.
현 천자인 이백과 봉양공 주자랑, 몽골 번왕 아부나이에 폐제 쇼서까지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죄다 꼭두각시 임금 노릇을 한번씩 해봤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니 실상 왕공의 도시라는 이명은 조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놈들, 서로 자기네 상처나 핥아주면서 정답게 지내야할 터인데."
두르후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이미 그의 말투엔 옛 주군을 대하는 어조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시대의 격랑 속에서 그의 조국은 청이 아닌 대한으로 바뀌었고, 그가 충성을 보여야할 대상 또한 쇼서가 아닌 통령이었기에.
그것은 이곳에 모인 만주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헌데 이상한 소문이 있습니다."
"무언가?"
두르후의 물음에 옛 황족 출신인 자카나가 말했다.
"만주의 한인들도 의원을 천거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 중에 폐제의 이름이 있었다고 합니다."
"뭐라고?"
두르후는 술맛이 싹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망한 청나라의 황제를 중추원 의원으로 천거하다니.
"이자들이 돌아버린 것이 아닌가?"
두르후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 신세계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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