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사는 세상 (5) >
해가 넘어갔다.
오늘도 강의와 훈련으로 녹초가 된 생도들은 우르르 숙사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규 일과가 모두 끝났더라도, 생도들의 공부는 끝나지 않았다.
삼삼오오 모여 호롱불을 켜놓은 채 복습에 매진하는 생도들이었다.
강무학교의 평가는 실로 엄격하여, 성적이 좋지 않은 자는 가차없이 오지로 보내지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중 만리 밖 동토(冬土)에서 근무하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꼼짝없이 그리로 가야할 팔자인가 보네."
어깨가 떡 벌어진 청년이 푸념했다.
그는 아무리 후히 봐주어도 글 머리가 좋은 편에 속하지는 않았다.
제법 꾀는 잘내는 것을 보면 아예 우둔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에는 공부가 영 맞지 않는 인간도 있는 법이다.
"병법만 배우면 되었지 왜 이런 것까지 읽어야한단 말인가?"
강무학교의 생도들은 이자원이 직접 저술한 야전교범과 네덜란드인들이 쓴 전술교본, 그리고 무경칠서 같은 전통적인 병법부터 남만 옛 장수가 썼다는 「군사학」같은 책까지 배워야 했다.
그 뿐이면 다행이련만, 보급과 포격에 도움이 된다며 산술도 익혀야했고 각종 철학 서적까지 교양으로 배우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이러니 강무학교만 졸업하면 나중에 군문을 나오더라도 어딜가나 출세길이 열려있다는 말이 나도는 것이지만, 정작 배우는 입장에서야 골 깨질 노릇인 것이다.
그나마 옛날처럼 글줄이 온통 한자로만 되어있지 않은 것이 유일한 위안일런가.
혀를 차던 사내의 눈길이 옆에서 글을 외는 동기에게 향했다.
"자네는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동토까지 날려가진 않을 터인데, 무얼 그리 열심히 하는가?"
"내 아버님은 자식이라고 봐줄 분이 아닐세."
안세는 조용히 대답했다.
강무학교에 들어온지 어언 반년.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정체에 대해 벌써 소문이 돈 탓에, 처음엔 그를 어려워하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그 사이에 섞여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안세는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아마 나를 강무학교에 입학시키신 것도 군을 확실히 휘어잡으라는 뜻일 터.'
앞으로 대한 군부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자들과 교분을 쌓아 그들을 장악하라는 의도였다.
고작 군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인망을 잃을 짓거리를 할 수는 없었다.
눈 앞의 상민 출신 생도든, 아니면 통령의 아들인 자신이든 명목상으로는 다 같은 생도였으니까.
"그런가? 어찌되었든 이번에도 나는 낙제할 모양일세. 산술이란 놈이 내 발목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으니."
사내의 푸념에 안세는 그리로 머리를 기울였다.
기초적인 삼각 측량 문제였다.
안세가 가볍게 그것을 풀어주자, 사내는 감탄하며 말했다.
"역시 자네일세! 이번에도 당분간 배움을 청해야겠군."
껄껄 웃으며 사의를 표하는 사내를 보며 안세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는 상민 집안 출신이지만 머리 회전이 빠르고 담력도 세니 아마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자다.
적어도 군에서만큼은, 그 출신을 그리 따지지 않으니.
안세가 이자를 곁에 두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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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과 서얼이 조정에 출사했다 하나, 뿌리 깊은 신분제가 쉬이 사라질리는 없었다.
여전히 양반은 양반이었고, 그 앞에 서면 괜히 몸이 움츠러들고 허리가 숙여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퍼져나간 생각 하나는 있었다.
- 배우고 공만 세우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다!
그렇기에 먹고 살기 힘든 집안에서도 어떻게든 조금의 여유만 생기면 학당에 보내는 것이 아닌가.
똘똘한 놈 하나가 장차 집안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
사내, 장길산(張吉山) 역시 마찬가지였다.
별볼일 없는 상놈 집안 출신.
몇년 전 흉년 때 나라가 구휼미를 뿌리지 않았더라면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는 떠돌다가 어디 도적 무리에라도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난세가 이어지며 얼자가 통령이 되고, 상민도 천민도 군문에 들어 공을 세우는 세상이 되자 그의 운명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출신에 상관없이 생도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지원했더니 덜컥 합격해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의 동기는 통령 대감의 자제였으니, 장길산 역시 은근히 꿈에 부풀었다.
든든한 줄만 잡으면 그야말로 송두리째 인생이 뒤바뀌지 않겠는가.
그가 귀중한 외출시간까지 내어 안세를 따라나선 것은 그런 계산에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황 교수는 왜 찾아가는 것인가?"
장길산의 물음에도 안세는 묵묵부답이었다.
공부를 물으러간다기엔 아직 그들은 황종희가 하는 수업을 듣지 않고 있었다.
아직 기초교육을 마치기에도 모자랐던 것이다.
황종희는 강무학교 근처에 집을 얻어 살고 있었다.
제법 녹봉이 되는지, 크진 않았으나 정갈한 집이었다.
그곳에서는 어린아이 하나가 중년의 앞에서 천천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열살이나 되어보이는 아이였지만, 그는 순간적으로 날렵하게 중년에게 달려들었다.
- 타다닥!
짧은 걸음으로 달려든 아이는 순식간에 남자와 여러 합을 주고 받았다.
중년인은 여유롭게 그 공격을 받아냈지만, 아이 역시 그 나이치고는 제법 경지에 오른 듯 했다.
장길산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대단하군!"
그러나 안세는 별 감흥이 없었다.
강무학교에서도 무술을 배우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호신(護身)을 위해서일 뿐, 무공의 진신절기 따위를 갈고 닦지는 않는다.
그 시간에 병법을 더 익히면 익혔지.
그러니 관심없는 분야에는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는 황 교수님을 뵈러 왔습니다. 혹시 이곳이 황 교수님의 댁이 맞습니까?"
"그렇소. 이 녀석은 백가(百家)라는 아이로 황 교수의 아들이고, 나는 그 스승인 왕래함(王來咸)이라는 사람이올시다."
원래 역사에서 왕래함은 사명내가권(四明內家權)의 대권사로, 황백가에게 이를 전수하는 인물이다.
친구인 황종희가 이자원의 부름을 받아 대한으로 넘어왔을 때 그 또한 뒤를 따랐다.
천하제일의 무인이라는 이자원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야모토 무사시에게 그러했듯, 딱히 겨루어주지는 않았지만.
이자원에게 있어 무예는 수단일 뿐, 그것을 전승해야겠다거나 책을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군대의 목적은 종합적인 전투력을 갖추는 것이지, 병사 하나하나를 무술의 고수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필수적인 체력 검정 정도를 제외하고는 무예 시험은 대부분 폐지된지 오래였다.
이쪽에서도 시대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물론 개인의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에겐 여전히 의미가 있겠지만.
"저희는 강무학교의 생도들입니다. 황 교수님에게 여쭈어볼 것이 있어 이리 약속도 잡지 않고 찾아뵈었습니다."
안세가 공손한 인사를 건넸을 때, 막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외출했던 황종희가 마침 제 집으로 들어선 것이다.
"두 생도가 여기에는 어쩐 일이시오?"
황종희의 물음에 안세가 아까 말했던 용건을 그대로 밝혔다.
황종희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거렸다.
무엇을 물어보러 오는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안으로 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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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무엇이 궁금하시어 나를 찾아오셨소?"
장길산이 안세를 흘끔 쳐다보았다.
안세는 입을 열었다.
"이 나라 대한을 통치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통령 대감이시지요."
형식적으로라도 이백을 언급할줄 알았던 안세가 살짝 놀랐다.
반면 애초에 천자의 존재감 따위는 느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던 장길산은 시큰둥한 표정이었고.
"황제는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일단은 현사를 뽑아 그에게 국정을 맡긴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그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황종희가 제법 능숙한 조선어로 대답했다.
"앞으로도 그럴지 모르겠다 하심은······?"
"새로운 통령이 등극하는데 황제의 추인 따위는 필요치 않은 세상이 올 것입니다."
황종희가 말을 이었다.
"태초에는 오로지 사람만 있을 뿐 질서가 없어, 천하에 공리(公利)가 있어도 아무도 그것을 일으키지 않았고, 천하에 해악이 있어도 아무도 그것을 제거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스스로 나와 이 수고로운 일을 자처한 이를 두고 인군(仁君)이라 불렀습니다. 인군 노릇은 노고만 있고 이익은 거두지 못하니, 허유(許由)와 무광(務光)이 이를 거절하여 도망갔으며 요와 순은 잠시 올랐다가 스스로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임금들은 그러지 못했으니, 명나라가 썩어들어가고, 천붕지열의 참혹한 세상이 찾아온 것은 군주가 스스로를 주(主)요, 백성을 객(客)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천하를 자신의 막대한 재산으로 삼아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지요."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임금은 예와 도리를 배워 인군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명나라의 실태를 두 눈으로 목격한 황종희에게는 별로 현실성 없는 소리였다.
안세가 다시 물었다.
"임금의 자리는 물려받을 수 있어도 그 자질은 물려받을 수 없으니, 현명한 재상을 세워 국사를 맡기는 것이 현재의 정치가 아닙니까?"
이자원이 그것을 명분으로 권력을 빼앗아온 것이지만, 현재의 명목상으론 그러하다.
그러나 황종희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라를 경영할만한 재능을 가진 자를 일러 치인(治人)이라 합니다. 헌데 어리석은 임금이 어떻게 치인을 알아볼 것이며, 또 현명한 임금이라 할지라도 제 이익을 위해 소인을 세우지 않는다는 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허면 결국 재상도 믿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황제 일인(一人)이 세운 자이니, 공리를 위해 일할지 황제를 위해 복주(伏奏)할지는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황종희가 눈을 빛내더니 말했다.
"하지만 통령 대감은 다릅니다. 스스로 병마를 일으켜 그 자리에 오르신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황제가 세운 재상이 아니라 옛적에 일어난 인군이나 다름없지요."
이자원이 죽인 자가 좀 많을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무너져가던 명나라 대신 천하를 구했다.
나라는 이리저리 잘게 쪼개지긴 했지만, 유리걸식하던 천하 백성의 삶은 그나마 나아진 것이다.
"인군의 치세가 계속 이어지기 위해선 임금이 세습하지 않고 현자에게 선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기에, 본인은 군주가 사인(士人)이 추대한 학교의 장과 정사를 논하고 감독을 받는 체제를 생각했었습니다."
황종희가 구상한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닌 공론의 장이다.
이곳에서 국가의 대계를 결정하고 천자와 재상 등이 찾아와 교육을 받고 토론을 실시하며, 학교를 주관하는 사람은 덕행에 근거해 사인들이 추대한다.
"통령 대감을 처음 뵙고 말씀드린 것도 이 계획이었습니다."
비록 오랑캐라 하나, 중원을 정복한 인군이 자신을 직접 부르자 황종희는 잔뜩 흥분했다.
이런 계획은 오로지 천하를 생각하는 인군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기에.
황종희는 열심히 자신의 구상을 이자원에게 설명했다.
마침 대한은 예로부터 사대부의 나라로 불린데다, 지금도 수많은 학당이 설립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황종희의 말을 듣고 있던 이자원은 당시 그렇게 질문했다.
'허면 다시 자금성의 천자를 모시고 와서 학교의 장과의 협의를 거쳐 나라를 다스리라는 말인가?'
'통령께서는 겸양하시어 제위를 사양하셨을 뿐, 실질적인 군주는 통령이십니다. 다만 이 제도를 통하여 통령의 뒤를 이으실 분도 공의(公議)를 통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지요.'
황종희가 설파하는 말에 이자원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말했다.
'헌데 가장 배운 자. 공론을 이끄는 자. 사인의 추대를 받은 자가 있다면.'
이자원은 태연히 물었다.
'그냥 그자를 군주로 세우면 되지 않겠는가?'
< 그들이 사는 세상 (5)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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