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사는 세상 (4) >
통령부 바깥으로 나온 안세는 아버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수만리 바다를 건너야 나오는 땅이 있다.
그곳을 쥐어야 이 나라 대한의 성세가 유지될 것이다.
'내 생전엔 결과물을 보기가 힘들 것이다.'
당장 백성들을 만주나 대만으로 빼내는 것도 보통 사업이 아니니, 틀만 잡아놓는 수준이라고 했다.
'네가 해야한다.'
그리고 그 과업을 짊어져야 할 자는 바로 그였다.
모든 사람이 그를 마치 태자처럼 여기고 있었으니.
이자원조차 자신에게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공언하였지 않은가.
"최우가 최충헌에게 교정별감을 물려받은 일과 다름 없구나."
안세의 입에서 자조적인 소리가 터져나왔다.
통령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주씨로부터 이씨가 천명을 이어받았고, 다시 황실은 재상인 통령에게 나라의 통치를 일임하였다.
하지만 그런 논리로 따지자면 결국 통령을 추인하는 것은 황제여야하나, 이자원은 황제의 뜻 같은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권신들이 제 자리를 세습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구태여 이런 거추장스러운 형식을 취할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통령은 모든 신하와 백성을 대표하여 존재하는 자리라지만 그들이 뜻을 모아 추대한 것은 아니다."
오로지 틀어쥔 군대를 통해 임금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스스로 통령이란 자리를 만들어 앉았을 뿐이다.
이처럼 불안정한 체제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자원은 굳이 이런 체제를 고집했다.
뭇 권신들이 그러했듯, 선양으로 가는 길을 닦는 중간 과정도 아니었다.
그것을 원했다면, 북경을 점령하고 그의 위세가 절정에 달했을 때 직접 선양을 받았으면 될 뿐이니까.
- 너는 황제를 노려서는 안된다. 그런 자리는 세워놓은 꼭두각시에게 맡겨 놓으면 돼.
아버지가 북경의 천단에서 민국(民國)을 선포하기 전, 그에게 한 말이었다.
안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머니.'
그때였다.
안세의 눈에 서성거리고 있는 박철균이 띄었다.
"대감께선 양주(楊州)에 계셔야하지 않습니까? 통령부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안세의 물음에 박철균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통령께 말씀드릴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어떤······?"
"강무학교(講武學校)의 일을 그만두려 합니다."
본래 조선에는 강무당(講武堂)이라는 곳이 있어, 군사들의 훈련을 점검하고 지휘와 진법을 강습했다.
원래 역사에서는 전란을 거치며 사라졌다가 정조 대에나 부활했을 곳이었으나, 이곳에서는 통령에 오른 이자원이 되살렸다.
그간 훈련도감에서 신임 초관들을 교육하며 쌓인 노하우를 통해 제대로 된 사관(士官)을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안세 역시 내년부터 이자원 옆에서 배우는 것을 잠시 그만두고 여기에 들어가기로 되어있었다.
"저는 오로지 편곤을 들고 직접 전장에 나서 공을 조금 세웠을 뿐, 원체 무식하여 사람을 키우는데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앞으로 대한의 동량이 될 이들을 가르칠 수가 없지요."
박철균은 이자원을 따라다니며 숱한 승리를 따냈지만 자신의 역량은 거기서 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이라면 모를까."
군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군무부는 그간 치러온 모든 전투를 분석하여 전훈을 찾고, 교리를 정립했다.
이사룡 같은 자들마저 남만으로 가서 배움에 몰두하고 있으니, 점점 자신 같은 '조선군'이 설 자리는 없어지리라.
"차라리 황 대장 대신 동토에 가시는게 낫지 않았겠습니까."
황익의 사람됨을 익히 잘알고 있는 안세이기에, 넌지시 그리 말해보았지만 박철균은 고개를 저었다.
"그 추운 곳에 가서 무슨 고생을 하겠습니까. 이만 여기에서 끝을 내야지요."
박철균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황익처럼 허파에 바람이 들어 출병하기엔 그는 못볼 꼴을 너무 많이 보았다.
전쟁은 할만큼 했다.
"통령 대감께서 조선을 강하게 만드시리라 믿었습니다."
그 바람처럼 조선은 병자호란의 참상을 이겨내고 솟아올랐다.
나라의 위상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당했다.
백성의 삶은 나름 풍요로웠고 국토는 넓어졌으며, 임금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죽어라 싸우던 오랑캐들은 대한의 신민이 되었고, 황제가 된 임금은 한양이 아닌 북경에 거하며, 그가 배운 사서삼경 대신 남만의 학문이 주류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대한은 조선을 이은 나라가 아니라, 조선을 뒤엎고 만들어진 나라였다.
"세간에서는 종종 통령 대감을 일러 진정한 조선의 충신이라고 하지요. 스스로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으면서도 주인을 위해 양보했다고요."
금방이라도 찬탈을 벌일 것 같았던 이자원은 오히려 임금을 황제로 만들었다.
일반적인 역적의 행동이라고 이해하긴 어렵기에, 통령을 칭송하는 수많은 이들은 제멋대로 그렇게 믿어버렸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통령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지요. 그분에게 모든 행동은 수단일 뿐입니다."
박철균은 품에서 쪽지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에는 연필로 무언가가 적혀있었다.
그는 그것을 안세에게 건넸다.
"강무학교의 교수 중 황종희(黃宗羲)라는 남인(南人)이 있습니다. 그자에게 많이 배우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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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은 하나라와 상나라, 동주와 후한, 조위와 서진, 북위, 수, 후량의 아홉 왕조가 도읍했다 하여 구조고도(九朝古都)라 불린다.
말 그대로 중원왕조의 근본이나 다름없는 곳이지만, 지금 낙양의 풍경을 둘러보고 있는 오삼계에게는 아무런 정취도 일어나지 않았다.
"에잇, 퉤!"
입에 먼지가 들어간 오삼계는 침을 탁 뱉었다.
"인근의 땅은 지력(地力)이 다하였고 천년 영화는 간데없이 쇠락한 옛 도시에 불과하구나. 당장 제남으로 돌아가 사실대로 말씀을 올리겠다."
오삼계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주왕의 후계자인 오삼계가 직접 이곳에 온 것은 최근 주나라 조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천도론(遷都論) 때문이었다.
- 낙양은 중원의 뿌리이니, 마땅히 중화의 후예인 우리 주나라가 도읍해야 할 곳이다!
주왕 오양이 어디서 무슨 추동을 들었는지 현 수도인 제남(濟南)에서 낙양으로 옮기자며 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산동의 중심이며 대운하가 지나가는 제남과 달리, 지금의 낙양은 상징성 말고는 수도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땅이었지만 부왕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오삼계가 직접 시찰을 온 것이다.
오삼계의 명령에 낙양에 막 도착한 수행원들은 바로 돌아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며 오삼계가 무심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부왕께서 칭제를 하고 싶으신 모양이다."
"예?"
수행을 위해 따라온 장군 진왕정(陳王廷)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는 명나라 시절 군관 출신으로, 태극권에 능하여 진식태극권(陳式太極拳)이라는 유파까지 창립한 인물이었다.
"대한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외왕내제(外王內帝)라도 할 모양이지."
주나라는 명목상으론 대한의 번국이지만, 그 분봉된 영토의 크기와 화북을 쥐고 있다는 상징성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중화의 적통을 자부하고 있었다.
직접 제호(帝號)를 쓰는 것은 아니나 오삼계를 내부적으론 세자가 아닌 태자로 칭하고, 왕에 대한 존칭을 폐하로 한다거나 육조가 아닌 육부를 쓰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낙양으로 천도하면 동주(東周)의 재림이라는 선전을 할 수 있을 터이니."
대한에는 도읍을 국토의 중앙으로 옮기고, 감숙이나 옹량으로의 출병을 쉽게 하기 위해서란 명분을 내세우겠지만 핑계일 뿐이다.
칭제의 명분을 천도에서 찾는 것이다.
거기다 제남은 화북에서 그나마 생산력 높은 동부에 위치해있었지만, 연운이나 등주와 가깝다.
대한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낙양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분봉받을 적에 부왕 폐하를 상왕으로 모시고, 내가 주왕이 되었어야 했는데."
오삼계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어차피 자신에게 넘어올 왕위라고는 하나 당장 임금 노릇을 하는 것과 수년, 어쩌면 수십년을 기다려 물려받는 것은 다르다.
이렇게 한번씩 오양이 실책을 벌일 때마다 오삼계는 머리가 아파왔다.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천도라니."
대한이 가져간 연운 16주에서는 망명객들이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었다.
대한은 옛날 장헌왕(莊憲王, 세종 이도)이 제정했다는 국자(國字)로 모든 문서를 표기케했고, 혼동의 여지가 있을 때에만 한자를 병기하게 했다.
국어 역시 조선어였고, 새로 치루어지는 과거는 이 '국어'를 '국자'로 쓰는 것만 인정했으니 연운의 사족들로서는 실로 불리했던 것이다.
대한은 아예 이런 자들에게 주나라로 넘어갈 것을 장려했다.
당장 화북 자체의 구휼과 진제만도 힘든 판에 챙겨야할 자들이 더 늘어난 셈.
강남을 윽박질러 쌀을 수입하려 들었지만 그마저도 녹록치만은 않았고, 오로지 재정을 절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대한 비용이 드는 천도라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오삼계가 딱 잘라 말했다.
"허나 국왕 폐하께서 끝까지 강행하신다면 태자 전하께서도 막을 방법은 없지 않겠사옵니까."
"그게 문제다."
오삼계가 혀를 찼다.
실상 이 나라는 자신이 만든 것이었다.
이자원 밑에서 구르며 진강에서 도르곤과 싸웠고, 청을 멸망시켰다.
자신의 공적이 아니었다면 아버지 오양이 항복했다 한들 번왕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홍승주 밑에서 식읍 따위나 조르고 있었을 것이다.
태자가 된 후에도 그랬다.
옹량으로 나오는 장헌충을 때려잡아 다시 파촉의 산골짜기로 기어들어가게 한 것도 그였고, 대한과 발맞춰 오이라트를 견제한 것도 그였다.
아버지는 그저 제남의 왕궁에서 편히 후궁들과 놀아났을 뿐이다.
'제길.'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오삼계는 속이 뒤틀렸다.
입관 후 명나라 척족 전홍우가 진원원(陳圓圓)이란 기녀를 오양에게 진상한 적이 있었다.
- 예전부터 오 장군의 높은 명성을 듣고 이 아이와 맺어주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제라도 첩으로 받아주십시오.
오삼계가 도적들을 토벌하는 사이 아버지 오양은 새로 얻은 이 첩에게 푹 빠졌고, 주왕의 자리에 오른 다음에는 귀비 자리까지 내려주었다.
전홍우가 노리던대로 주나라에서도 권세를 얻어 승승장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뿐이면 다행이련만, 완대성 같은 간신과 손잡고 은근히 오양의 후계에 간섭하려 드는 것이 문제였다.
"그놈들은 내 의형이 대한의 통령이란 사실을 잊어버린 모양이로구나."
"그런듯 하옵니다."
오삼계가 눈을 번득이며 묻자 진왕정이 대답했다.
그가 이자원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것은 대한에서는 딱히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었지만-당연히 사실이 아니었기에-주나라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나와 형님은 복숭아 나무 아래서 멸청(滅淸)을 결의하고 침식까지 함께 한 사이다. 외왕내제든 국본인 나에 대한 음해든, 결코 두고 볼 분이 아니니라. 모두 이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라."
오삼계가 나지막이 내뱉는 소리에 장수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태자는 그 모습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군부는 자신이 꽉 잡고 있는데다, 대한이 자신의 뒤에 있다는 엄포까지 놓았으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안심이다.
'누구든 연로한 아버지를 꼬드겨 일을 벌이려 든다면 그 목을 보전치 못할 것이다.'
돌아가 간신들과 드잡이질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짜증이 치밀었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오삼계가 이때까지 상대했던 인간에 비하면, 그야말로 코웃음나오는 놈들인 것이다.
"채비를 마쳤으면 말을 돌려라! 제남으로 돌아간다!"
< 그들이 사는 세상 (4)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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