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이 사는 세상 (3) >
황갑(黃甲)을 걸친 원문필이 등채를 휘두르자 조군이 일제히 산을 타고 올라갔다.
적은 한때 광동과 광서의 경계인 운개대산(雲開大山) 일대에 본거지를 두며 집요한 약탈을 펼쳐왔지만, 지속적인 토벌로 북쪽의 남령 산맥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목책과 녹각이 얼기설기 세워져있고, 잔뜩 굶주린 도적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퍼펑!
호준포(虎?包)에서 쏘아진 산탄이 어설프게 세워진 목책을 뚫고 뒤에 서있던 도적들을 관통했다.
제대로 저항할 틈도 없이 조군이 그들의 가슴팍을 창으로 찔렀다.
"놈들은 불리하면 산채를 접어 도망갈 것이다. 퇴로는 막아두었는가?"
이정국이 지원을 끊었다지만 도망오는 자들까지 막진 않을 터. 오히려 사천의 손가망과 싸우느라 전력이 부족할테니 두팔벌려 환영하리라.
하지만 원문필은 그렇게 놓아둘 생각이 없었다.
"복명이라니."
명나라라는 이름은 원문필에게 증오와 불쾌감만을 안겨다 주었다.
아버지는 온 인생을 바쳐 충성했던 바로 그 명나라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관점에서 명은 더이상 존속할 이유가 없는 국가였다.
그러니 이 광동의 깡촌까지 기어들어와 복명의 기치를 올리는 이들은, 죽어도 상관없는 바보들일 뿐이다.
"도망가지 않는군."
그렇다고 항복하지도 않았다.
그간 토벌해온 적들은 조금만 형세가 불리하면 백기를 올렸다.
대개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도적이 된 유민(流民)들이었기 때문이다.
원문필은 그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거나 군문에 들게 하여 호구지책을 마련해주었다.
자연 소문을 들은 자들도 줄줄이 항복했고, 조왕 조대수의 덕을 칭송하며 생업을 얻어 도적의 산채를 떠나갔다.
명나라가 결코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대인, 산채를 함락했습니다."
부하가 원문필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싸움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문필은 천천히 산을 올라 진채를 둘러보았다.
대명(大明)의 깃발이 휘날리는 곳 아래에 시신들이 어지러이 놓여있었다.
"이자들은 도대체 무어란 말이냐."
원문필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미 시대는 완전히 뒤바뀌었거늘 원래 자신이 몸담고 있던 나라에 목을 매다니.
실로 제정신이라곤 볼 수가 없었다.
"흥."
원문필은 코웃음을 쳤다.
이미 사라진 나라를 되돌리려 하는 것은 충절이 아니라 광기어린 집착일 뿐.
"이따위 도적 산채에서 나라를 칭하고 황제와 육부상서를 둔들, 그것이 본래의 명나라와 무슨 털끝만한 상관이 있겠는가."
원문필은 어설픈 면류관을 쓰고 죽은 시체를 짓밟았다.
주원장과 그 자손들은 씨를 많이도 퍼뜨린 까닭에 영락한 종친들도 적지 않았다.
주씨 성이나 쓸 뿐, 아마 명이 망하기 전에도 작위 하나 못받은 떨거지였으리라.
그렇게 불길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채를 둘러보던 원문필의 시선이 어디론가 향했다.
"······."
원문필의 표정이 굳었다.
"대인?"
부하들의 부름에도 그는 저벅저벅 그리로 걸어갔다.
"결국 그대는 실패했군."
얼굴의 반쪽이 일그러진 시체.
원문필은 그자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남한산성에서 조우한 적비는 그의 부하들을 쓰러뜨리고 원문필마저 궁지에 몰아갔다.
그러나 그는 원문필을 죽이지 않았다.
단지 걸음을 바삐하며 성을 나가려 들었을 뿐.
'이 지옥도를 만들어놓고 어디를 가는 것이오?"
'나에겐 아직 해야할 일이 있다.'
"명이라는 나라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썩을대로 썩었고, 충성할 이유라곤 하나도 없는 나라였다.
적비가 명나라에 목을 맨 것은 애국심 따위가 아니라 집착 때문이리라.
아마 누군가의 죽음을 헛되이 여기지 않기 위한 집착.
혀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빌어먹을."
원문필은 시체의 눈을 감겼다.
망한 나라를 되살리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실패했다.
"그곳에선 안식을 찾았기를 바라오."
원문필이 읊조렸다.
살아서는 망집에 사로잡혀있던 자였으니, 그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 뿐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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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판 엘세라크는 긴장된 표정으로 통령부에 들어섰다.
이미 몇 차례나 바쁘다는 이유로 통령과의 직접 접견은 무산된 터였기에, 한달 넘게 벽란도가 아닌 한성에 머무르고 있는 그였다.
이번에야말로 확답을 받아내겠다는 심정이었다.
"외무부상서를 통해 이미 전달을 드렸을줄로 압니다만, 최근 만지(Mangi)의 나라들이 대만을 침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들었소."
이자원의 태평한 말에 엘세라크는 간신히 말을 꺼냈다.
"우리 네덜란드와 조선은 십년 넘게 이어온 맹방이고, 만지 국가들은 조선의 봉신이 아닙니까. 조선은 봉신을 단속할 책임이 있을텐데요?"
"유럽의 봉신 관계와는 조금 다르오. 우리는 각 번국의 상국이긴 하지만,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소. 귀국은 이런 특수한 사정을 감안해주었으면 하오."
그러나 전통적으로 중원의 황제국들은 제가 필요할 때마다 이런 원칙을 깨곤 했으니, 실상 면피용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월과 민 왕실은 강남의 수적 출신으로 그 시절부터 귀국과 충돌해왔으니 자국이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노라고 하소연해왔소. 그 말처럼 귀국의 전선들이 월, 민을 선공한 적도 있지 않소?"
"그것은 저들이 우리의 교역을 방해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나라의 경덕진(景德鎭)은 예로부터 아름다운 자기를 만들기로 유명했다.
이 도자기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으나, 그간 명에 막혀 조선을 통해 수입하던 네덜란드는 아예 오와 직접 교역을 트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이자원이 남명을 정벌할 적에 경덕진의 장인과 설비를 대부분 뜯어다 조선으로 가져가긴 했지만, 대만에서는 오가 더욱 가까웠으니 그쪽으로도 수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월과 민에 물어 그 사건에 대한 경위를 따져보기로 하겠소."
엘세라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사건에 대한 시시비비부터 가리자면 왔다갔다 하느라 족히 1년은 넘게 걸릴 것이고, 그때쯤 대만은 저 남중국인들의 침공에 못이겨 함락된지 오래리라.
"그간 조선에 베푼 우리나라의 온정을 봐서라도 사정을 살펴주십시오!"
"그것은 거래였을 뿐이오."
이자원이 가볍게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네덜란드는 소극적인 일본 대신 다양한 교역품을 지니고 적극적으로 개항한 조선을 선택했다.
조선이 네덜란드 덕에 상당한 군사적 우위와 부를 이룬 것은 사실이나, 네덜란드 역시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대만이 함락되면 주민들은 전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하겠지요. 그리고 대만에는 조선인도 상당수가 정착해있습니다."
"아직까지 조선인 거주지가 약탈당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소. 아무래도 생명과 재산을 빼앗기는 것은 홀란도인들 뿐일 것 같군."
엘세라크가 다양한 방법으로 이자원을 설득하려 들었지만, 그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주 교역선을 다시 일본으로 돌리겠다는 협박이라도 해볼까? 아니, 이건 자충수다. 이자는 분명 우리가 절대 그러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배짱을 부리는거야.'
네덜란드가 대한에서 철수하는 것은 곧 중국 전역에의 접근권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한은 다시 영국이나 포르투갈을 끌어들이려 할 것이고, 십중팔구 네덜란드는 혹 떼려다 혹 붙이는 꼴이 되리라.
'바타비아에서 온 원군도 패했으니······.'
엘세라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해전은 주로 본국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나, 동인도에서도 긴장이 고조되었으니 더이상 함부로 병력을 빼낼수는 없다.
월과 민의 침공은 격화되고 있었다.
남편과 자식 잃은 네덜란드인들의 통곡이 하늘을 찔렀다.
엘세라크는 VOC 본사에서 날아온 훈령을 기억했다.
- 최악의 경우 대만을 포기하라.
"강남 수적들은 사람됨이 사나워 쉽게는 멈추지 않을 것이오. 오로지 우리 대한의 위엄에는 복종할 뿐이니, 그 군대가 주둔한다면 다를지도 모르겠소만."
이자원은 엘세라크와 VOC의 계산을 꿰뚫어본 것처럼 말했다.
원래 역사에서 1661년 정성공이 대만을 정복하자 수백에 달하는 네덜란드 남자들이 고문, 학살되고 여자들은 첩과 노비로 전락했으며 네덜란드가 공들여 대만에 건설해두었던 요새와 마을도 모조리 빼앗겼다.
지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VOC가 이런 예상을 하지 못할리가 없다.
엘세라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덜란드는 대만을 지킬 힘도, 대한을 압박할 카드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백기항복 뿐이다.
"VOC가 철수하더라도 회사와 네덜란드인들의 재산권만큼은 보장해주십시오."
"물론이오. 홀란도인들이 귀화를 원한다면 그것도 인정하겠소. 아국은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것이오."
"거기에 더해 대가로 100만 굴덴을 지급해주십시오. 그간 VOC가 대만을 개척하기 위해 들인 비용과 이자 정도는 받아야겠습니다."
"알겠소."
대만의 인프라와 백성을 통째로 사는데 그정도면 싼값이다.
대만에 슬슬 욕심을 내고 있던 월과 민은 불만을 품겠지만, 그간 신나게 약탈해 돈은 챙겼으니 그들에게도 손해는 아니었다.
"홀란도는 맹방인데 이리 하루아침에 배신해도 괜찮겠습니까?"
통령의 종사(從事)를 맡아보고 있는 안세가 물었다.
그는 이제 지학(志學)의 나이를 넘겼는데, 슬슬 소년 티가 벗겨지고 헌헌장부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괜찮은 상대이니 그리한 것이다."
대한은 네덜란드를 버릴 수 있어도, 네덜란드는 대한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니 털어먹을 수 있을 때 털어먹고, 뽑아먹을 수 있을 때 뽑아먹을 뿐.
"십수년 쌓아온 우의를 저버리는 모습을 보았는데 다른 남만 나라들이 우리를 믿겠사옵니까?"
"지금 드러난 그림은 홀란도가 멀리 떨어진 제 영토를 지키지 못해 우리에게 판 것 뿐이다. 그 뒤에 숨겨진 공작을 눈치챈다 한들, 저들은 당한 놈이 바보라 비웃겠지."
영원한 동맹 같은 것은 없다.
유럽 국가들은 이미 이를 여실히 알고 있고, 이제 잘게 나뉘어진 중원 국가들도 슬슬 깨달으리라.
"내가 월과 민을 사냥개로 부려 대만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나라가 패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원이 천천히 말했다.
그의 뒤에는 거대한 지도가 걸려있었다.
육지로는 시베리아와 몽골, 연운까지 뻗어있고, 바다로는 등주와 주산, 해남, 그리고 이젠 대만까지 차지한 나라.
통령의 방에 들어서는 자 모두 그 지도에 알 수 없는 벅차오름을 느낄 정도였지만, 이자원만큼은 예외였다.
"더욱 뻗어나가야 한다."
그의 손가락이 남쪽으로 향했다.
언제까지 오는 배만 맞이할 수는 없다.
서해와 남해 일대에는 조선소가 세워져 갈레온이 착착 건조되고 있었다.
연해만을 돌아다니고자 했다면 판옥선이나 사선 따위로도 충분했으리라.
"유구는 오래 전부터 천자국을 섬겨왔었지."
쭉 내려온 손가락이 섬을 짚었다.
"근래에는 왜구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으나, 명의 천명을 이어받은 상국으로서 마땅히 해방시켜야 할 것이다."
유구를 이용해 명과 일본 간의 무역을 끊어놓고, 그 중계무역으로 돈을 번 이자원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안세는 구태여 반박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그 위쪽으로 올라갔다.
"팔참의 왜인들은 구주(九州)로 돌아가 고향을 수복하는 것이 소원이라지."
아마쿠사 시로는 가톨릭이 융성한 새로운 낙원을 만들자며 사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예수회의 선교 역시 대한을 뒷배 삼아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으니, 아마 종교적 호응이 겹치면 파급력은 상당하리라.
"완전히 아주(亞州)의 바다를 틀어쥐려 하시옵니까."
안세가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그러나 이자원의 움직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큐슈를 짚었던 손가락은 계속 넓은 바다를 지나쳐 지도 바깥을 벗어났다.
확실히 존재하지만, 아직 이 지도에는 담기지 않은 곳이다.
마지막 목적지는 이곳이었다.
< 그들이 사는 세상 (3)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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