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한산성부터 시작하는 빙의생활-197화 (197/213)

< 그들이 사는 세상 (2) >

임안(臨安).

명대에 항주로 불리던 이 도시는, 다시 송나라 시절의 이름을 회복해 월나라의 국도(國都)로 군림하는 중이었다.

월나라의 세자 정성공은 대만에서 사로잡은 호인(胡人)들을 앞세우며 당당히 성 안에 진입했다.

"세자 저하가 이리 용맹하시니 실로 종사의 홍복입니다!"

숙부 병조상(兵曹相) 정지봉이 형을 쳐다보며 칭찬을 건넸다.

하지만 월왕 정지룡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당당한 일국의 왕이 되었으니 경박하게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성공은 특히 가려뽑은 여인들을 아버지 앞에 선보였다.

"호희(胡姬)들을 진상하겠사옵니다."

원래 같으면 여색을 마다하지 않을 정지룡이었지만, 나이가 차차 들어가며 예전만큼 왕성하지 못한 탓도 있어 그보다는 다른 쪽으로 관심이 쏠렸다.

정지룡은 적당히 신하들에게 포로들을 분배한 뒤 아들 정성공을 불렀다.

"민나라에서는 왕이 직접 친정하였더냐?"

"예, 아바마마."

정성공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민왕 시랑은 그보다 세 살이 많았지만 전쟁 경험은 더 많은 숙장이었다.

정지룡은 수적 두목 시절 시랑을 제법 중용했지만, 정다웠던 관계는 깨진지 오래였다.

"본래 내 밑에서 부장 노릇이나 하던 자가 운좋게 분수 넘치는 자리에 올랐다. 나보다는 너와 나이가 비슷하니 그자의 상대는 장차 네가 맡아야 할 터. 어찌 꺾어볼만 하더냐?"

정지룡의 물음에 정성공이 답했다.

"그간 복건을 틀어쥐고 제법 군사를 조련한 모양인지 빈틈은 보이지 않았사옵니다. 힘으로 취하는 것은 근시일 내엔 어려울 듯 하옵니다."

정지룡이 혀를 끌끌 찼다.

월이나 민이나 따지자면 그 영토가 일개 성에 불과한 나라들이다.

복지부동하는 강남의 신사(紳士)들을 윽박질러 군대를 키우기에는 중앙정부의 힘과 권위가 턱없이 부족했다.

침략해오는 적을 막는 것이라면 모르되, 이 호족들은 원정 따위에 헛되이 여력을 소비하고 싶어하지 않으리라.

"그러니 대만을 취해야 한다. 저 큰 땅을 얻어 힘을 기른다면 언젠가 민왕, 그놈을 몰아내는 것도 헛된 꿈은 아닐 것이다."

대한이 VOC에 대한 보호를 거둔 것은 어디까지나 약탈에 한정된 사안이었지만, 정지룡은 대만을 얻어도 좋다는 신호로 파악했다.

원래 제 영토가 되었어야 할 복건을 부당하게 빼앗겼다 생각하는 정지룡으로서는, 어떻게든 배신자 시랑을 몰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성공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미 아바마마께선 북경에서 장차 분봉 열국과 우호할 것을 맹세하셨는데, 전쟁을 일으키면 상국이 가만 있겠사옵니까?"

정성공의 지적에 정지룡이 찔끔했다.

확실히 코 앞 주산(舟山)에 대한(大韓) 수군이 주둔 중이니 민왕의 구원 요청을 받으면 하루만에 임안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제길, 이래서 내가 놈들이 주산을 가져가는 것을 반대했거늘."

그러나 일개 수적인 정지룡이 절강에서 왕 노릇하는 것도 그 대한의 덕이니, 정지룡이 따질 계제는 아니었다.

정성공은 마음 속으로 그것을 깊이 느끼고 있었기에 아무말 않고 가만히 있었다.

'굳이 민나라를 노릴 필요가 있겠는가.'

정성공은 야망있는 사내였지만 괜히 위험을 무릅쓰고 강남일통 따위에 나설 생각은 없었다.

이곳 절강만 하더라도 그 물산이 풍부하고 재부가 넘치니, 굳이 대한에 찍힐 일을 벌일 필요가 무에 있을까.

오히려 슬금슬금 이빨을 드러내는 북쪽의 승냥이에게서 나라를 지키자면 강남 국가들이 힘을 합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오왕(吳王) 홍승주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

"옛정을 생각하여 쌀 10만 석을 반값에 팔아달라?"

홍승주는 표정을 험하게 구긴 채 주나라에서 온 사절을 내려다보았다.

사절 완대성(阮大?)은 살살거리며 말했다.

"화북에 백성은 넘쳐나나 소출이 모자라 곡가가 널뛰는 판이옵니다. 우리 전하께서 오왕은 한때 같이 싸움에 임한 전우(戰友)이니, 당연히 도와주리라 하셨사옵니다."

"아쉽지만 강남의 사정도 좋지 않소. 제값을 다 주고 사가겠다면 모를까, 실로 터무니없는 제안이니 거절하겠소."

"이웃의 간청을 어찌 이리 매몰차게 거절하신단 말입니까. 혹 회수와 장강의 천험을 믿고 이러시는 것입니까?"

"뭐라?"

홍승주가 완대성의 건방진 말에 격노하여 외쳤다.

숫제 시비를 거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우리 주나라는 와자나 파촉의 무리와 맞서싸우며 백만 정병을 기른데다, 북방에서 전마 들여오기도 쉽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강남의 다섯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손쉬우나, 오로지 북경에서 맹세한 이웃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그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헌데 어찌 오나라는 작은 이익 때문에 큰 도리를 보지 못한단 말입니까?"

완대성의 위협은 완전한 허세였다.

아무리 주의 군사력이 강하다하나 자연지형에 의지해 방어하는 오나라를 공략하는 것부터 난관이거니와, 그 이전에 한군이 연운에서 출병해 곧바로 주나라 수도인 제남까지 치달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주나라의 덩치가 위협적인 것도 사실.

홍승주는 애써 분노를 삭였다가 제 신하들이 모인 곳에서 일거에 터뜨렸다.

"빌어먹을!"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예조상(禮曹相) 후방역이 급히 홍승주를 달랬다.

"주나라 역시 제코가 석자이니 저리 엄포를 놓아서라도 식량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근래에 화북에 흉작이 계속되어 군사를 일으킬 여력도 없을 것입니다."

"알고 있다. 물지 못하는 개가 짖는 법이지."

하지만 홍승주는 왕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장수로서, 그것도 무명을 떨친 명장으로서 오나라가 단독으로 주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 화북을 통째로-대한이 차지한 영역은 빼고-차지한 저들에게 짓눌려 살아야 할 것인가?

"회하 남쪽의 나라들끼리 독자적으로 회맹(會盟)을 갖자는 제안은 어찌되었는가? 관심을 보이는 곳이 있던가?"

홍승주가 하문하자 후방역이 고개를 숙였다.

오, 월, 민, 초, 조에 이르기까지 다섯 나라가 모여 주에 대항하자는 제안을 얼마 전 각지에 보낸 터였다.

"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었사옵니다."

"제기랄, 당장은 제 일이 아니다 이거로군."

주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것은 국경을 맞댄 오와 초 뿐이었다.

나머지는 여러가지 이유로 이것을 반대했다.

'이미 북경에서 회맹을 갖고 상국이자 맹주로 대한을 모셨는데, 독자적인 회맹을 소집하면 괜한 트집을 잡힐 수도 있지 않은가?'

'다섯 나라 중 가장 강한 곳은 오나라다. 남경마저 그 도읍으로 쓰고 있으니, 회맹을 만든다면 오나라 좋은 일만 해주는 것이 아닌가.'

'대한에만 고개를 숙이면 되었지, 굳이 상전을 하나 더 늘릴 필요가 있겠는가.'

"월왕세자는 제법 전향적인 입장이니 시일이 지나 그가 왕위에 오르면 가능성이 제법 있어보이옵니다만······."

"아직 정지룡이 멀쩡한데 도대체 몇년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홍승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대한에 사람을 보내라. 중재를 요청해 봐야겠다."

결국은 나름 독자적 행보를 궁리하던 그조차 대한에게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대한의 위상이 더욱 높아져가는 것은 당연했다.

홍승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월왕과 민왕은 그렇다치고, 옛 부하인 조대수조차 참여치 않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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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潮州)는 복건과 맞닿은 광동의 동부 지방을 일컫는다.

이 조주 사람들은 한족으로 분류되긴 하나, 그 문화나 언어가 크게 다르다.

심지어 같은 복건 계통의 언어들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장헌충의 대서국(大西國)이 광서를 점령한 탓에, 광동을 분봉받은 조대수는 안보를 위해서라도 동부인 이곳 조주 지방에 도읍을 둘 수밖에 없었다.

조(潮)라는 국명 역시 여기에서 따온 것이었다.

한편 광동 중부로 가면 동관(東莞)이라는 지역이 있으니, 바로 명나라 최후의 충신 원숭환이 나고 자란 곳이다. 원숭환은 죽었으나 그 일족이 여전히 여기에 남아 살고 있었다.

"이곳인가?"

원문필은 어쩐지 감회가 서려 말했다.

그는 요동 출신이니 한번도 와본 적이 없는 곳이지만, 아버지의 고향이라니 그리움이 밀려왔다.

입관 후 그는 조대수 밑에서 종군했는데, 조대수는 옛 상관의 아들인 그를 각별히 여겨 조왕에 봉해진 후 동관후의 작위를 내려주었다.

말 그대로 고아 출신 쿠툴러로 시작하여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것이다.

"동관후 대인께서 행차하셨으니 원씨 일족 사람들은 모두 나와 대인을 맞이하라!"

병사들의 외침에 마을이 부산스레 움직였다.

이내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아이고, 상서 대인의 아드님이라더니 정말 모습이 닮았구나!"

"역적의 고향, 역적의 일문으로 찍혀 고초를 겪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나이많은 축들이 원문필의 얼굴을 보고 수군거렸다.

"······."

예전같았으면 얼굴이 화끈거렸을 그였으나, 이젠 제법 관록이 붙어 짐짓 태연한 체를 할 수가 있었다.

"내 동관을 식읍으로 받았으나 나 한 사람이 먹고 살 것은 이미 충분하오! 수조를 거두더라도 민폐 끼치지 않고 우리 일가를 위해 환원할 것이외다!"

원문필의 외침에 일가친척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이것은 원문필이 무슨 성인이라서가 아니었다.

"일가 중 군공 세우기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지원하시오! 내 밑에 배속시키도록 하겠소!"

원문필은 팔기의 쿠툴러 출신이다.

팔기의 각 부대는 혈연과 지연 등으로 묶여있어 결속력이 높았으니, 원문필 역시 그것을 보고 따라하려는 것이다.

어쨌거나 빈둥거리며 날건달질이나 하던 청년들을 등용하고, 거둔 수조도 모두 그들과 그 집안을 먹여살리는데 쓰겠다 하니 원씨 일족의 호응은 높았다.

그 자리에서 제발로, 혹은 등떠밀려 나온 원씨들이 수십 명은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한 노인이 툭 말했다.

"에구, 조기가 살아있었으면 동관후 대인께 도움이 되었을텐데."

"조기?"

원문필이 의아해 묻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조기라고, 상서 대인의 수양아들입니다. 동관후 대인께는 형님이 되지요. 금의위 출신이라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을 것인데 상서께서 그리 되시고 난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아무래도 죽었겠지요."

"금의위······."

원문필이 중얼거렸다.

그때 부하가 보고했다.

"대인, 차비가 다 되었습니다."

원문필은 명을 받아 남령(南?)의 지맥에 웅거중인 복명(復明) 세력을 치러가는 중이었다.

복명 세력이래보았자 대단한 규모는 아니었다.

원래 역사에서야 청나라가 입관하며 학살을 벌인 것도 있고, 상종 못할 오랑캐라는 인식이 강했으니 남명이 그나마 성 몇개를 차지하며 명맥을 이어나갔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북경에 조선 출신 천자가 들어앉든 말든 자신들을 직접 다스리는 번왕은 한족이 아니던가.

그런 판이니 무언가 제대로 해준 것도 없는 주씨가 큰 세력을 모을리도 없어, 도적마냥 산채에 의지하여 저희들끼리 황제니 육부상서니 자칭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동안은 광서에 주둔한 장헌충의 양자 이정국이 뒤를 봐주고 있어 토벌이 어려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젠 운이 다했다.

"장헌충이 급사하니 의자(義子)들 중 맏이인 손가망이 장헌충의 친자들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지?"

"게다가 그동안 쓰던 장씨 성마저 버렸다더군."

장헌충은 확실히 나라를 경영할 그릇은 아니었다.

원래 역사처럼 궁지에 몰리지 않아 학살마로 변모하진 않았으나, 대신 성도의 황궁에서 음락에 탐닉했다.

그러다보니 자연 대서의 개국공신 격인 양자들의 위세가 강해졌으니, 대표적인 이가 손가망과 이정국이었다.

승상 손가망은 장헌충이 복상사하자 즉각 군을 일으켜 황자들을 제거했다.

이정국은 거기에 반발해 광서와 운남, 귀주에서 항거하는 중이었고.

즉, 그간 지원하던 복명 세력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아직까지 명나라 따위를 섬기고 있다니, 웃기지도 않는 놈들이다. 적이 보이는대로 모조리 쓸어버려라."

원문필은 그렇게 명령했다.

< 그들이 사는 세상 (2)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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