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 >
"통령 대감."
안세를 안고 있던 박철균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조선에 남겨놓은 심기원을 보좌해 불온세력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자원이 아무리 내부정리를 깔끔히 했어도 그의 공백을 노린 야심가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박철균은 안세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안세는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에게 달려가기는커녕,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도련님."
박철균이 달래보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래도 어린 시기에 오랫동안 떨어져있어 서먹한 모양입니다."
그럴듯한 설명이었다.
아이는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금방 자라거늘, 이자원은 수시로 집을 비웠으니 말이다.
지금 북경에 머무른지도 벌써 수년이었다.
하지만 이자원은 그 설명에 만족하는 대신, 안세의 턱을 잡아 자신에게로 돌렸다.
"······."
여전히 공허한 눈이다.
이곳에 오기 전, 자신이 갖고 있던 것과 같은 눈.
이자원은 저 안에 차가운 불길이 타오르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내게 할말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입을 앙 다문 채 시선을 피하는 안세에게 이자원이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버거운 분위기가 몇분째 계속될 때, 안세가 물었다.
"아버님께서는 왜 황제가 되지 않으신 것입니까?"
자신이 황태자 따위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런 욕망을 품은 자가 텅 빈 눈을 할리가 없다.
이자원은 대답하지 않은채 되물었다.
"너의 목적은 무엇이냐?"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강한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안세가 답했다.
"소중한 것은 무엇이든 지켜낼 수 있는 인간 말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황제가 되지 않았음을 원망한 것이다.
하늘 아래 가장 강한 자.
그 자리를 이어받기 위하여.
이자원은 천천히 말했다.
"내가 지닌 이 통령이란 자리는, 너에게 갈 것이다."
후계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의 생전에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통령을 선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안세의 생전에도.
"황제나 조선왕보다 못할 것이 없는 자리다. 적어도 휘두를 수 있는 권력으로 봤을 때에는."
안세가 눈을 깜빡였다.
"이 자리에 앉으면 네 여동생이나 일가족,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모두 지킬 수 있겠지."
그는 안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거기에 더하여, 내가 만들 나라를 지켜야 한다."
이자원은 한마디씩 또박또박 안세의 귀에 박아넣었다.
"역적 이호가 네 어미의 목숨까지 앗아가며 막으려 했던 나라를."
이자원이 만든 질서는, 체제는, 그가 죽은 이후에도 수호되어야 한다.
다음대까지도 이어져야만 한다.
그는 천천히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황제를 노려서는 안된다. 그런 자리는 세워놓은 꼭두각시에게 맡겨놓으면 돼. 황제는 오로지 저 번국들을 다스릴 명분으로만 존재하면 충분하다."
그가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 임금이 비록 이역만리 북경에 갇혀 있다 한들, 조선의 백성들은 임금의 자리를 빼앗지 않는 이상 알아서 고개를 숙이리라.
아니, 오히려 모시는 임금을 황제로 옹립한 것에 대하여 칭송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선 본토에 있지 않은 왕의 존재는 점차 잊혀지고, 그 빈 공간을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질서가 채우리라.
"너는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필요하다면 안세의 아들도, 그 손자도.
왕이 아닌, 신하와 백성의 대표인 통령으로서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어머니까지, 잃으면서 만든 나라."
안세가 중얼거렸다.
더이상 그는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던 외할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를 잃었으며, 자신과 여동생은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
비록 그 원수들은 처단당했지만, 자신의 상실감은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무엇을 이뤄야 보상받을 수 있을까.
안세의 눈에 서서히 무언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
박철균은 그 모습을 보고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두 부자의 짧은 상봉은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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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조선왕 이백이 명 황제에게서 선양을 받을 것이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하 사방에서 이를 축하하는 사절들이 몰려왔다.
"신(臣) 소소쿠가 동만주 제부족(諸部族) 수령들과 함께 입조하였나이다."
"VOC 조선 상관장 얀 판 엘세라크가 황제 폐하의 등극을 축하드립니다!"
"팔참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신 아마쿠사 시로가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뜬금없는 인물도 끼어있었다.
"몽골 대칸 아부나이가 친히 입조하였습니다!"
"아부나이라고?"
아부나이는 명목상으로나마 몽골의 대칸이다.
비록 예전부터 조선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곤 하나, 응창에서 제 조정을 꾸리고 있는 군주가 직접 선양을 축하하러 오다니.
하지만 이자원은 자세한 사정을 듣자마자 어찌된 일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칭상 지르갈랑의 전횡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그가 오이라트와의 싸움에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사사로이 노얀들을 소집하였는데, 제 말에 따르지 않은 자들은 트집을 잡아 모조리 주살해버렸습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대칸께서도 화를 입을까 두려워 상국에 의탁코자 왔습니다."
끝내 세력다툼에서 지르갈랑이 승기를 잡은 것이다.
다르한 조리그투마저 앓아눕자 지르갈랑은 거침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지금 아부나이가 한 행동은 스스로 나라를 들어바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적에게 쫓겨들어온 임금을 어찌 박대하겠는가. 그대를 번왕으로 대우하고, 군사를 내어 지르갈랑을 토벌하겠다."
물론 그 빈 자리를 아부나이가 차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간 조선의 역량도 신장되었고, 몽골에 국가의 기틀도 제법 잡힌 터이니 그대로 접수하면 될 뿐이었다.
옛날 청나라에서 몽골아문을 운영한 것처럼, 잘게 나누어진 각 부족들을 직접 복속시키는 것이다.
'지르갈랑의 소용도 다했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은 만주 출신이라는 것이다.
지르갈랑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토벌에 나서면 기반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거기다 곁에 붙어있는 소닌 역시 이자원이 미리 포섭해둔 자이니 더욱 더.
지르갈랑이 명나라 정복 당시 직접 군사까지 몰아와 공을 세운 사실 따윈 지금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토끼가 죽으면 개는 삶기기 마련이므로.
한편 만주에서도 제각기 조선의 관직 하나씩 받든 족장들이 북경에 들어섰는가 하면, 건주공 두르후와 옛 청주 쇼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천하 사방에서 몰려든 왕공제후와 문무백관이 선양의 의식이 펼쳐지는 단 아래에 죽 도열하니, 그 넓은 천단(天壇)의 공간이 가득 찼다.
맨 앞열에는 물론 가장 지체높은 번왕들이 섰는데, 그 중에서도 통령 이자원만은 특별히 단 바로 밑에 섰다.
그 광경을 보는 모두의 시선은 단 위의 명 황제 왕지명이나, 조선왕 이백이 아니라 통령 이자원에게 향했다.
저 천단(天壇) 위의 존재들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과 같은 곳에 서서, 그들을 이끄는 자.
통령(統領)만이 그들의 경배를 받을 수 있었다.
이자원은 황제의 이름으로 작성된 칙서를 펼쳐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너 조선왕이여! 옛일을 살펴보면 당요(唐堯)는 우순(虞舜)에게 선위했고 순 역시 우(禹)에게 선위하였다. 천명(天命)은 한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덕 있는 이에게로 점차 돌아가는 것이다.
명나라의 도통(道統)은 이미 쇠한즉 흉악한 무리가 멋대로 반역을 하여 우내(宇內, 천하)가 전복되려 하였는데, 조선의 신무(神武)에 힘입어 사방을 어려움에서 구해내고 천하를 안정시켰으니 실로 하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겠다.
이제 짐은 왕에게 선위코자 하니, 유업(遺業)을 계승하여 덕을 밝히고 문무(文武)의 대업(大業)을 넓히며 대대로 이어져온 사직을 더욱 밝게 빛내라."
이자원이 칙서를 모두 읽자, 왕지명은 주춤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곧 오랜 선양의 절차에 따라 열두줄 면류관을 벗어 새 천자인 이백의 발 밑에 바치고, 신하의 예를 갖추어 복배하였다.
이백 역시 정해진 절차에 따라 면류관을 쓰고, 십이장복(十二章服)을 걸치고, 홍무제 주원장으로부터 내려오는 명의 국새를 인수하였다.
누구도 두 임금에 대해 경외를 품지 않았다.
이 천외(天外)의 존재들은 단지 통령의 명에 따라 한바탕 연극을 벌이고 있을 뿐이었으니.
"새 황제가 세워졌으니 이제 옛 황제는 사라지는 것이 순리요. 전주(前主) 주자랑을 봉양공(鳳陽公)에 삼고 식읍 1만 호를 내리니 명 황실의 제사를 잇도록 하시오."
봉양은 주원장이 태어난 고을이니, 위의 조환이 선양 후 진류왕에 봉해졌듯 선조의 고향에서 봉호를 따온 것이다.
관점에 따라 이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일수도 있겠지만, 왕지명은 애초에 주씨조차 아닌고로 잠자코 물러났다.
"이어 신 통령 이자원, 주왕(周王) 오양, 오왕(吳王) 홍승주, 조왕(潮王) 조대수, 월왕(越王) 정지룡, 민왕(?王) 시랑, 초왕(楚王) 좌량옥이 맹서(盟誓)하겠나이다."
이자원과 앞에 서있던 번왕들이 일제히 외쳤다.
"우리는 위로 천자를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돌보아 하늘의 뜻에 한치도 거스르지 않을 것이다! 새로이 세워진 질서에 거스르는 자가 있다면 천하가 하나되어 그자를 토벌하리라!"
백마의 피를 입술에 발라 이를 공언(公言)하니, 곧 열국이 다투지 않고 상국을 받들 것을 천명한 것이었다.
물론 그 상국이란 조선, 아니 이제는 국호를 바꿔 새로이 세워질 나라였다.
"조선은 곧 삼한의 땅으로 금상의 대에 이르러 이를 비로소 아울렀으니, 나라의 이름으로 한(韓)보다 좋은 것이 없소. 새 국호는 한이올시다!"
삼한은 현대엔 마한, 진한, 변한을 의미하지만 이 시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다른 표현으로 여겨졌다.
이백의 대에 북벌을 완수하여 만주를 얻었으니 '금상의 대에 비로소 아울렀다'는 이자원의 설명은 제법 타당한 것이었다.
실상 이것은 핑계일뿐, 국호를 결정한 이자원에게는 다른 진짜 이유가 있었지만 말이다.
"황제께서는 하늘의 아들로서 북경에 머무시며 천하 열국을 굽어살피고, 본국의 군국사무는 현명한 재상에게 맡기어 다스리게 할 것이오."
물론 열국을 굽어살핀다 함은 형식상으로 오는 조공이나 받으며 궁궐에서 숨만 쉬겠다는 뜻이요, 현명한 재상에게 맡긴다는 것은 이제부터 통령이 공식적으로도 모든 행정을 관장하겠다는 뜻이었다.
실로 옛 주나라 왕실의 부활이나 다름없었다.
"통령은 각 번왕에 버금가는 자리로서, 앞으로 열국의 맹주 역할을 맡게 될 것이외다."
천자가 직접 패자의 역할까지 담당할 수는 없으니 통령은 대한의 일인자로서 천하의 패자(?者), 즉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하지만 번국들 입장에서도 명목상 자신의 군주인 황제보다, 제후들 중의 일인자와 교섭하는 것이 편한 것도 사실.
그들은 이 결정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이어서 이자원은 도열한 신하와 백성, 군사들을 향해 외쳤다.
"대한은!"
그의 입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민국(民國)이 될 것이오!"
곧 여기저기서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나왔다.
"대한 만세!"
"대한 만세!!"
그러나 이렇게 함성을 질러대는 이들 중, 이자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자가 하나라도 있을까.
별로 중요하진 않으나 새로이 제정된 연호는 융희(隆熙)였으니, 원래 역사에서 제국(帝國)의 문을 닫은 자가 쓰던 연호였다.
이자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황제의 시대는 끝났다.
{@PIC:597702}
< 건국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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