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봉 >
북경으로 온 이들은 번왕이 될 장수들 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에서도 이자원의 명령에 의해 왕과 신하들이 북경을 향했다.
그 일행 가운데에는 송시열도 끼어있었다.
"통령께서 명나라를 정벌한 것은 완전히 중국을 병합하려는 뜻이 아니었소이까? 그런데 번왕이라니요?"
이자원을 보자마자 송시열이 물었다.
그의 생각으로는 당연히 주씨 황실이 교체되고 명나라의 자리를 조선이 차지하는 것이었지, 봉건제로의 회귀가 아니었다.
"주나라가 땅을 나눔으로 인하여 춘추의 제후들이 일어났고, 난세가 열렸소이다. 헌데 어찌하여 통령께서는 그 폐단을 반복하려 하십니까?"
"중국은 너무 크오."
이자원은 냉정히 말했다.
조선이 명을 대체한다면 중원을 유지하는 것, 그 자체에 모든 시간과 자원을 소모하게 될 것이다.
이자원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중원을 그대로 집어삼킨다면 이름만 바뀐 청나라가 될 뿐이다.'
너무 과한 덩치에 깔려 원래 역사의 청나라처럼 썩어가리라.
그렇다면 결국 다시 침탈당하는 결말만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자원은 중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은 단념했다.
"각 번왕들의 목줄만 틀어쥘 수 있다면, 이것이 천하를 온전히 소유하는 것보다 이득일 것이오."
이자원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눠야 번왕들이 조선의 개가 되도록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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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들은 중원 전토가 그려진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목울대에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장수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이자원의 말을 기다렸다.
그들에게 땅을 갈라줄 사람은 눈 앞의 통령이었으니.
- 주욱
모두의 시선이 이자원에게 모였을 때.
그는 지도 위에 연필(鉛筆)로 줄을 죽 그었다.
이곳에 모인 장수들은 연필을 신기하게 쳐다보았지만, 요즘 조선에서는 흔한 물건이었다.
쓸 때마다 벼루에 먹을 갈아야하는 붓보다 사용이 편리하니 고루한 일부 양반들을 빼놓고는 어디서든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서양 인쇄기의 도입으로 서적 발행이 활발해진데다,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학당이 설립되는 실정이니 연필은 더욱 빨리 퍼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수들의 흥미는 이내 이런 기물에서 곧 떨어질 떡고물로 옮겨갔다.
이자원이 연필을 놓자 마침내 완성된 판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것은······."
장수들에게는 익숙한 그림이었다.
바로 칠백년 전, 오대십국(五代十國) 시절의 형세가 아닌가.
"공훈과 지리지형에 따라 나누자니 이리 되었소."
이자원이 말했다.
장수들의 눈빛이 변했다.
이중 누가 어느 땅을 가져갈 것인가.
"절강(浙江)은 정 도독에게 내릴 것이오."
이자원이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이곳은 옛날 오월(吳越)이 자리하던 곳으로, 본래가 정지룡의 근거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지룡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복건(福建)은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복건 역시 정지룡의 세력이 뻗쳐 있는 곳이다.
그런데 연필로 절강과 복건 사이에 경계를 그어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의 부하 중 시랑(施琅)이라는 자가 있지 않소?"
이자원이 정지룡을 쳐다보며 말하자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 휘하 일개 두령(頭領)을 대인께서 어찌 아시는지요?"
정지룡의 세력은 각 수적들의 연합체 성격을 띄고 있었으니, 시랑 역시 엄연한 휘하의 군벌이지 일개 두령이라 불릴 만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정지룡은 그렇게 은근히 깎아내렸다.
"임안 공략에 공을 세운 것도 그자라 들었소."
정지룡은 이자원의 말에 주먹을 쥐었다.
시랑은 남명 토벌 당시 항주 공격을 지휘했다.
아들인 정성공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 숙장인 그와 동행케 한 것이다.
그게 이리 돌아올줄은 몰랐다.
"시랑은 복건 명가의 자제인데다, 정 도독이 복건에 두고 있는 기반도 그를 통한 것이 많다 들었소. 응당 복건은 그에게 돌아가야하지 않겠소?"
절강과 복건은 강남에서도 가장 부유한 지방들이다.
둘 모두 정지룡에게 쥐여줄 수는 없는 터.
'이리 되면 시랑도 정지룡과 갈라설 수밖에 없다.'
물론 정지룡은 불만을 터뜨릴테지만, 이미 남명마저 싸그리 토벌된 판에 그가 왕작마저 내버리고 반기를 들리는 없을 것이었다.
"회수 이남 남직례와 강서성은 홍 장군에게 내리겠소."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대인."
반면 홍승주는 별 토를 달지 않고 사의(謝意)를 표했다.
이만하면 옛날 남당(南唐)의 영토와 견주어볼만 했으니, 그로서도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광동(廣東)은 조 총독의 몫이오."
조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광동이 일개 성에 불과하다지만 충분히 부유한 곳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호광은 좌량옥의 몫으로 떨어졌다.
남명에 가담치 않고 귀순한 것에 더하여, 장헌충과 싸워 그의 진출을 저지한 공로를 감안한 것이었다.
원래가 호광의 병마를 관장하던 자이니 그 역시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눠지지 않은 영역과, 분봉받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오양과 오삼계는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이자원을 쳐다보았다.
"오삼계."
이자원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이역만리 조선까지 넘어와 훌륭히 임무를 수행해주었다. 가도 토벌부터 시작하여 청을 멸하고, 명을 정복할 때까지 그대에게 힘입은 바가 매우 컸다."
이자원은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지도의 가장 큰 부분, 화북을 대부분 차지한 영역을 가리켰다.
"이것은 그대 두 부자(父子)를 위하여 내리는 봉토요."
"통령 대인!"
오삼계는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체면도 신경쓰지 않고 이자원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 아비인 오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크나큰 은혜를 어찌 갚으오리까!"
오삼계가 울면서 외쳤다.
다른 번왕들은 일개 성이나 받은데 반해, 오양과 오삼계에게 내려진 영토는 중원의 중심, 화북의 큰 땅덩어리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정도만 차지하고서도 능히 황제를 일컬었던 자들이 많았으니, 이들의 감격은 더했다.
장수들은 똥씹은 표정이었지만 영토 분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홍승주가 말했다.
"아직 조선의 몫이 나누어지지 않았군요."
이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지도의 가장 북쪽을 가리켰다.
"조선의 몫은 연운(燕雲)의 16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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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운 16주는 하북의 연주(燕州), 계주, 탁주, 단주, 순주, 영주, 막주, 신주, 규주, 유주(儒州), 무주, 울주와 산서의 운주, 환주, 응주, 삭주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이 지역들은 장성 이남의 요지이니 북경과 대동 같은 곳도 여기에 속해 있었다.
지리적으로 이 밑으로는 외적을 막아낼만한 자연지형이 없어 한족은 항상 유(幽), 연(燕)의 지형에 의지하여 외족을 막아냈으니, 그야말로 중원의 관문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만주와 몽골을 사실상 병합한 조선으로서는 이 연운 16주만 쥐고 있다면 언제든 중원에 개입할 수 있는 셈이었다.
그 큰 화북을 통째로 오씨 부자에게 갈라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화북은 그 덩치에 비해선 힘을 그다지 쓰지 못할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강남과 달리 쇠락해버린 화북의 경제력, 그리고 연운 16주가 조선의 손에 들어간 탓에 취약한 안보상황까지 감안하면 화북 중심의 통일은 어림도 없다.
반면 잘개 쪼개진 강남의 나라들은 이 거대한 화북 국가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 항상 조선의 개입을 애걸해야 할 것이었다.
이것이 이자원이 중원 번국들에게 걸어놓은 목줄이었다.
이자원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여기에다 등주(登州)가 추가적으로 조선에 귀속될 것이오."
등주는 산동의 끝자락으로, 조선과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조선이 등주를 취하면 화북의 해안가는 사실상 조선의 통제 하에 떨어진다.
"더하여 주산(舟山)과 해남(海南)까지."
아까부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정지룡이 물었다.
주산 군도는 상해, 영파와 가까워 조선 수군이 여기에 주둔하면 강남의 목줄을 틀어쥘 수 있다.
수적 출신인 정지룡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대들의 공훈을 고려하여 좋은 땅들을 모두 갈라내렸고, 단지 북방의 작은 땅과 조그마한 섬들만 취하였소. 그런데 이것조차 불만이란 말인가?"
이자원이 정지룡을 보며 묻자 그는 찔끔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니, 사실 조선이 약속을 어기고 허울뿐인 왕작만 던져준다 하더라도 뭐라 하지 못할 형국이었던 것이다.
"소장은 불만이 없습니다."
홍승주가 눈치를 보더니 말을 보탰다.
바로 옆나라 임금이 될 자가 이리 나오자 정지룡은 끝내 굴복하고야 말았다.
"소, 소인이 짧은 생각으로 대사를 그르칠 뻔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일련의 대화로 장수들은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곳에 모인 서로의 손아귀에서 나라를 건사하고 살아남으려면 조선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럼 다들 동의한 것으로 알겠소."
이자원이 말했다.
화북을 얻은 오삼계는 희희낙락하고 있었고, 그보다는 못하지만 남직례 상당수와 강서성을 먹은 홍승주 역시 나름 만족하는 눈치였다.
정지룡을 제외하고는 다들 큰 불만은 없어보였다.
이자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북에는 언제든 군사를 보내 개입할 수 있고, 강남은 잘개 쪼개져 있으니 감히 북벌을 감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강남은 기본적으로 토호들의 입김이 강하고, 그렇기에 복지부동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기껏해야 옛 성(省) 하나를 영토로 삼은 중앙정부가 그들을 누르고 강남 일통, 혹은 천하통일에 나서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해상을 통해서도 조선의 입김을 투사할 수 있으니 더욱 그랬다.
저 남쪽 끝에 있는 해남은 명목상으로 취해두었을 뿐, 당장 영향력을 투사할 순 없겠지만 주산은 이야기가 다르니 말이다.
이것으로 중원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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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으로 불려온 조선왕 이백과 대비 강씨는 자금성 한켠에 머물렀다.
"명을 멸한다고요?"
"그렇사옵니다. 전하께서 명 황제에게 선양을 받아 천자로 등극하시고, 각 번왕을 책봉하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대비의 표정은 어두웠다.
자신의 아들이 당당히 한 사람의 영웅으로서 즉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손에 옹립되기 때문일까.
이자원은 그런 대비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신은 황제가 될 수 있었사옵니다. 저 가짜 주씨에게서 단지 옥새만 받아내면 되었지요."
"······."
어려울 것은 없었다.
그는 이미 명나라를 정복한 영웅이 아닌가.
그렇게 제위에 등극하고 나면, 궁중에 박힌 조선왕 따위는 대수가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신은 그리하지 않았사옵니다."
이자원은 날카롭게 말했다.
대비는 그 모습에 몸을 흠칫 떨었다.
"그간 이 나라 왕실이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영광을 안겨드렸습니다. 실로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 올려드렸으니 그것으로 만족하시지요."
대비는 파리한 입술을 겨우 열어 말했다.
"······통령의 말에 따르겠소."
이자원은 이어 말했다.
"이제 연운의 땅이 조선의 품에 안겼으니 이 자금성 역시 조선의 궁궐이 될 것이옵니다. 북경은 춘추 시절부터 내려온 고도이니, 도읍으로 삼기 적당하겠지요."
"도읍이라니?"
"신이 굳이 이곳까지 임금을 모셔온 이유가 무엇이겠사옵니까."
임금은 더이상 한양으로 돌아갈 수 없다.
명목상의 '황제'로서 이 자금성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 그런······."
대비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자금성에 소조정 하나 정도는 만들어드리지요. 옛날 주나라 천자가 그러했듯이, 제사나 받들면서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한양 도성에 열성조가 뫼셔진 종묘가 있거늘 어찌······."
"걱정 마시옵소서."
이자원이 태연히 대답했다.
"신이 성심을 다해 돌보겠사옵니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훗날 귀한 문화재가 될 장소인데 왜 허투로 관리하겠는가.
"안세가 같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이자원이 말했다.
"신은 부자간의 상봉을 하려하니, 이만 물러가보겠사옵니다."
뒤에서 대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자원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 분봉 > 끝
ⓒ 핏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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